임신개혁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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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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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에 포함되는지 아닌지에 대해 학술적인 논쟁이 있음.

대한제국의 식민지 · 자치령 및 조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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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역 명칭 담당기관
북만주 만주 만주총독부
동몽골 제국 몽고주 몽고도독부
프리모예 연해주 자치령 연해총관부
해당지역 명칭 기관
칭다오 청도 청도행정부
* 자치령은 1920년대 괴뢰국으로 [1]승격
괴뢰국 · 군정청
한자문화권의 황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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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 (야마토)

일본
대일본제국
일본국
(대월) → (대남) 대한
대한제국
대한국
임신개혁 단행 당시에 찍힌 사진

개요

임신개혁(壬申改革)은 1873년부터 대한제국, 당시의 구 조선에서 단행된 개혁으로, 세도 정치의 종료 이후 격변을 거친 조선 정부가 체제 변화를 시도, 정치·경제·문화 전 분야에 걸쳐 한국의 근대화를 성공시킨 일련의 개혁을 말한다. 이를 통해 한국은 세도 정치 시기의 문제점과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배를 피할 수 있었고, 오히려 동아시아의 열강으로서 거듭날 수 있었다.

역사학에서 분류한 시기는 사화 이후 보빙사를 파견한 뒤 전등을 설치할 것이 명령된 1873년으로 간주되며, 당시에 부르던 명칭은 '어개신'이 더 대중적이었다.

배경

변혁의 조짐

16세기 임진왜란의 조기 진압, 사르후 전투 파병과 여진정벌, 요동의 농지 개간권 획득 그리고 분열로 인한 중국의 개입 약화 등으로 조선은 다사다난한 세기들을 보내야만 했었다. 자연스레 민간에서는 처음엔 조선이 천명을 이었다고 인정하지 않던 순나라와의 밀무역 활성화를 시작으로 상업이 대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후 중국 무역의 손해를 메꾸기 위한 주변국들, 심지어 장거리에서 중국과 무역하던 국가들까지 외교적으로 조선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이전보다 더 정확한 해외 정보를 입수하고, 효종 시기에 요동정벌로 얻은 농민 차출지인 요동 지방과 외교 활성화와 밀무역에 따른 민간의 해외 무역 활성화도 서서히 시작되면서[2]본격적으로 자본이 쌓이기 시작했다. 중원에서 군벌이 난립하여 확고한 천자국도 불확실한 마당에 흔들리는 성리학관만으로는 파멸적인 국가 부도를 피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빠진 집권층은 적어도 경제적 부문에선 상업의 확대를 용인은 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조선은 변화한 사회에 기반한 문화의 발달과 상공업의 발전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문제점들과 서서히 드러난 안동김씨 일가의 무능은 다른 계층들의 불만을 사기 시작했고, 능력있는 이들은 관직에 오르지 못해 현 정국에 대해 분개했다.

여기에 기존 성리학에도 유의미한 변화가 찾아왔는데, 티베트와 몽골이 얽히며 200년이 지나도록 비록 국가가 2개로 축소되기는 했으나 중국이 완벽히 통일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명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송과의 거리 문제, 그리고 조선 당국이 정통성이 없는 중화라 보고 있던 순나라와의 분쟁과 화관을 통한 서학의 유입으로 기존 세계관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 무렵에는 조선에게 확장을 통한 천조질서를 이어야 하는 의무가 갔다고 주장하는 유학세력들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조선이 단순히 번국이 아니라는 정서의 형성은 유학의 새로운 길을 트기 시작했는데, 이 사상의 분파가 당시 세도정치로 인해 민간에 돌던 근왕주의와 합쳐지면서 일명 왕도파라는 학파가 음지에서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점차 약화되어가던 세도가에게 결정타를 준것은 대원군 세력의 우세화와, 병인양요로 인한 강제적인 개항이었다. 베트남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로 기고만장해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기독교 탄압에 대한 소식이 조선에서 들려오자 프랑스의 국위를 정점에 달하게 하는 겸 기독교도들을 탄압한 이교도들을 응징하기로 결정, 압도적인 병력으로 조선군을 박살내고, 겁에 질린 안동김씨 일가와 지금 개항을 하지 않는다면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우려한 국왕으로부터, 끝내 조선의 개항을 집행시켰다.

한편 안동김씨 세도가는 개항으로 인해 본인들에 대한 여론이 좋아지지 않고 있다는것을 간파했고, 급한대로 여러 인재들의 등용에 대한 건을 통과시키거나 서양 문물을 유입시켜 기술발전을 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결과적으로 시스템 자체에 변화가 없던데다 오히려 서민들의 삶은 저렴하고 질 좋은 외국산 물건들의 유입으로 서서히 빈곤해지기 시작한지라 민심이 더 악화되기만 했다.

또한 조정의 새 정책을 통해 유입된 개화파와 왕도파, 위정척사파들은 '세도정치 척결'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안동김씨 일가를 맹비난하기 시작했고, 이후 이향로가 지부상소 도중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기회를 잡은 흥선군 이하응은 안동김씨 세도가 국왕에게 진심어린 충언을 하는 충신도 죽이는 역적이라고 매도하기 시작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고조가 이들의 손을 들어주며 안동 김씨는 3당파의 연대와 이미 치밀한 정치공작으로 넘어간 5군영의 통제권에 힘없이 무너져내렸고, 마침내 1871년 조정의 권력구도가 다시 한 번 정상화되었다.

이후 국내의 안정화가 이루어지자, 조선 정부는 외세로부터의 생존과 사회 문제 혁파, 그리고 부국강병을 위한 길을 찾고하 했다. 이에 따라 격변한 천하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아 제일의 방식을 택하자는 입장이 집권층으로부터 도출되었고 이에 따라 파견된것이 유럽의 보빙사, 중국의 영선사 그리고 상황이 비슷했던 일본의 통신사였다. 약 2년간의 순방을 끝내고 1873년 모인 이들이 종합하여 내린 결론은 같은 동양국가인 일본의 선례를 보아 구미 열강을 따르는 것이 현재 가장 적합한 방식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잉데 따라 조선 정부는 주로 구미 열강 국을 따라 잡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였다.

그러는 한편, 왕도파보다 수구적인 위정척사파를 위시한 강경 보수파는 흥선군 이하응의 설득과 유럽과 중국 순방에 대한 충격, 바뀌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는 정부의 변화로 인해 기존 위정척사들은 노선에서 양이를 위해 양이를 알아본다는 방식으로 노선을 선회하였다. 또한 이들은 조선 고유의 전통을 지키는 방식을 근대적인 제도에 일부 첨가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내곤 했고, 유럽의 경우에는 본인들의 기준 정당한 제도라고 판단한 독일 제국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여러 방면에서의 개혁

안동 김씨가 개항장을 통해 점차 들여온 물산들을 시작으로, 1870년대부터 진행된 본격적인 서구화는 조선 사회에 여러 변화를 몰고 왔다. 고조의 경우 부국강병과 정치적인 수단으로서 입헌군주제를 도입시키기로 결정했고, 위에서부터 주도한 근대화는 헌법 제정, 궁중 개혁과 이념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가능케 했다.

정치적인 면모에서도 변모가 있었다.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 시스템과 법률들이 도입되었으며, 서양식 군대의 본격적인 양성을 통한 부국강병 정책 또한 독일식 교육을 본따 이루어졌다.

또한 근대국가의 사민평등적인 사상을 도입하여, 기존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하고 직업을 자유화시키는 한편, 국가적으로 농민을 주로 양성했던 성리학에도 변화를 주어 국가 정책에 부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로이 변모시켰고, 이는 훗날 국체유학으로 거듭나 단순한 사농공상 폐지의 정당화와 왕도사상 그 이상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는 한편, 공신 및 친정부적이었던 기득권에 대한 배상은 칭제건원 이후 새로운 귀족 제도인 사족제도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를 넓어진 강토와 높아진 국위에 따른 공신임명의 변화라며 정당화했다.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는 신문물에 대한 충격으로 피어나긴 시작한 문명 개화의 움직임, 육식 보급과 철도 개통 등과 함께 본격적인 국민의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금융제도에서도 통화단위로 '원'이 1876년부터 도입되었고,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의 설립에 이어 한국의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으로써, 한국 은행 또한 1884년에 설립되었고, 이를 통해 근대국가에 꼭 필요한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 활동에는 재산 축적을 원한 공신들과 기회를 꿈꾸는 부농, 혹은 상인들의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외교적으로의 최종 목표는 구미 열강과의 동등한 관계였음으로, 불평등 조약 폐지를 위해 위의 개혁과 같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노력을 다하고, 만국공법을 수용하는 한편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격들을 금지시켰다. 다만, 여전히 한국을 근대국가로 보지 않았던 열강들의 조치로 인해 불평등 조약의 폐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마침내 한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서야 육상에서의 활약을 통해 열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정ㅊ

대동아시아 정책의 경우 먼저 몇 년 앞서 개항한 일본과는 역량적인 차이가 나긴 했지만 일본의 역량 또한 미숙했기에 대등한 관계에서 친선관계를 펼칠 수 있었다. 훗날 개혁 극후반부에 들어서는 각각 만주와 사할린에서 러시아와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던지라 당시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그레이트게임에서 육상, 해상을 통해 러시아를 완전히 포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영국이 한국의 대청제국 식민화를 용인하는 결과 또한 가져왔다. 한편 중원 2개국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송을 가급적 더 높게 치는 정책에서 이어진 친송, 반순으로 요약할 수 있었으며, 후금의 경우 한국 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용도와 후금의 지속적인 통상 거부, 그리고 러시아와의 대립 문제로 인해 대한제국 내에서 '정만론'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2. 이 시기에 비슷한, 아니, 오히려 중국의 부재로 인해 선진문물 도입이 힘들어진 상황이었던 일본과의 무역지수도 이전과는 비교가 안될 수준으로 비대하게 변모했다. 그 탓인지, 조선 중후기와 후기에 들어서는 왜구 문제의 발생 빈도가 미미할 수준으로 낮아졌던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