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게르만국 (신질서의 황혼)

Destiny634, 2024 - | CC-0


대게르만국
Großgermanisches Reich
국기 국장
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
1946년 4월 20일 ~ 1990년 10월 2일
국명 변경 이전 민주혁명 이후
대독일국 독일국
베너룩스 공화국
모스코비엔국
노르베겐 연방
상징
국기
하켄크로히츠(Hakenkreuz) 기
국장
라이히스아들러(Reichsadler)
국조
검독수리
역사
[ 펼치기 · 접기 ]
2차세계대전 승전 1945년 8월 15일[1]

히틀러 사망 및 슈페어 정권 출범 1963년 9월 9일

헬무트 콜 정권 출범 1983년 5월 2일

1990년 독일 민주혁명 1990년 5월 28일

해체 및 독일국 출범 1990년 10월 3일

지리
[ 펼치기 · 접기 ]
수도
게르마니아
최대도시
게르마니아
위치
유럽 중부, 러시아, 아프리카
주변국
프랑스국, 이탈리아 제국
인문환경
[ 펼치기 · 접기 ]
공용어
게르만어
공용 문자
알파벳
인구
325,894,761명 1987년, 국가판무관부 및 총독부 포함
민족
독일인, 네덜란드인, 노르웨이인, 덴마크인 등
군대
국방군
정치 · 경제
[ 펼치기 · 접기 ]
정치 체제
군사독재, 전체주의, 일당독재, 파시즘
정부 수반
총통
국가 원수
총통
총통
헬무트 콜
행정 수반
대게르만국 국가수상
여당
국가사회주의 게르만 노동자당
경제 체제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통화
라이히스마르크
1981년 게르마니아 국민대회당
위치 (1987년)
     본토
     국가판무관부령
     총독부령[2]



개요

1946년 아돌프 히틀러의 국명 변경 선언으로부터, 대독일국 시대부터 포함할 경우 1934년 히틀러의 총통 취임부터 1990년까지, 독일, 폴란드, 네덜란드 등 유럽 일대와 러시아 지역, 아프리카 등의 국가판무관부에 걸쳐 존재했던 국가이며, 냉전 시대에 일본, 미국과 함께 세계 3강인 초강대국의 하나였다.

다만 공식 국명은 대게르만국이었으나 사실상 냉전 시대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본래 국명 "독일"로 불리는것이 일반적이었다. 미국은 Germany, 일본은 ドイツ。

역사

초기: 히틀러 정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한 1945년 8월 15일부터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고 히틀러의 57세 생일인 1946년 4월 20일. 대게르만국 헌법이 확정되고 공식적으로 대게르만국이 들어섰다. 수도 베를린의 이름이 게르마니아로 개칭됐다.

1950년에 게르마니아로 개칭된 신수도의 도심 및 도회지가 완성되어서 게르마니아 국제박람회를 열었다.

대게르만국은 이로서 미국, 일본과 함께 냉전의 세 축 중 하나가 되었다. 독일이 주도하는 아인하이츠팍트도 출범했다. 하지만 건국된지 불과 수년 만에 독일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운테멘쉬로 불린 민족, 특히 소련 계열 슬라브족에 대한 독일의 강경한 탄압은 피지배민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오기에 충분했고, 1950년 9월 동부 영토에서 대규모 봉기인 서러시아 전쟁이 벌어졌다. 독일군의 전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봉기는 막아냈지만 동부영토와 그곳에 거주한 독일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독일의 그에 대한 반응은 더욱 강화된 탄압이었다. 급기야 1953년엔 대게르만국 국가의회에선 노예제 공인 법안을 가결하여 이제 합법적으로 러시아인 슬라브족에 대한 무급 착취가 가능해졌다. 특히 우크레이네의 농업지역에서 농업 노예는 극성이었다.

외교적으로는 일본과 갈등을 빛다가 도조 히데키 저격 사건으로 친독파가 밀려나자 1951년 추축 동맹이 종료되었으며, 1953년엔 독일의 고압적 태도와 유대인 탄압을 문제삼은 이탈리아 제국을 비롯한 지중해 국가들이 독일과 동맹을 파기하면서 급격히 국제사회에서 우군을 잃었다.

물론 이런 와중에서 경제는 크게 성장하여 적어도 독일인들의 생활 수준은 미국이 부럽지 않았고, 겉으로 독일의 번영은 영원할듯 보였다. 독일인들이 보기에 볼가 강은 독일의 미시시피 강이었고, 게르마니아는 뉴욕이었다. 서부 영토와 영국, 프랑스 역시 최소한 동부영토보단 좋은 취급을 받았다.

"유대인 문제"는 1950년대 말까지 모두 해결했다. 해결이라는 것은 유대인을 모두 제거한 형태였지만, 정부는 유대인이 시베리아 어딘가로 이주되어 섞여 살고 있다고 했을 뿐이었다. 구 폴란드 영토 역시 폴란드인을 모두 추방하고 독일 본토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폴란드인은 시간이 지나며 동부영토 또는 그 밖에 위치한 시베리아까지 밀려나 슬라브족에 동화되며 민족 정체성 자체가 사라졌다.

이렇게 대게르만국의 속한 시민들은 그 인종에 따라 생활 수준이 철저히 구분되었다. 아예 법률에 아리아인 혈통이 입증된 독일인은 1급 시민, 독일에 신규 병합된 지역에 거주하던 인종과 그 혼혈이 2급 시민, 국가판무관부령에 거주하는 인종을 3급 시민, 총독부령(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인종을 4급 시민으로 규정해 계급제를 명문화했다. 이중 국가의회 참정권은 1급 시민에게만 주어졌다.

1957년에 SS대장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1957년 독일 쿠데타가 벌어졌다. 이 쿠데타는 히틀러의 권위에 큰 도전을 남겼다. 이때 알베르트 슈페어가 SS의 무장반란 진압의 총책을 맡게 되며 급격히 부상했다.

슈페어 정권

1960년에 히틀러가 매독으로 쓰러지고, 1963년 알베르트 슈페어가 총통에 올랐다. 슈페어는 2차 장검의 밤을 통해 헤르만 괴링,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마르틴 보어만 등이 반역을 꾀했다는 명분으로 제거했고 자신의 권위를 세웠다.

슈페어는 집권 과정에선 강경했지만 이내 독일의 자유화를 추구했다. 재벌의 범죄 사실을 캐내고 부패한 정재계를 일신하능 한편 1966년부턴 히틀러 시기의 유산인 경직된 사회를 타파하기 위하여 히틀러 격하 운동을 벌여 동상 철거 등의 조치를 따로 취했다. 또 미국 및 옛 동맹 일본, 이탈리아와 관계 개선을 추진해 1969년에는 데탕트를 조성했다.

1970년대엔 일본의 제국 자유화와 거의 비슷한 시점인 1971년에 노예제를 폐지하고 인종법을 폐지해 단지 본토와 국가판무관부, 총독부 등의 지역으로 시민들을 구분하게 되었다.

독일은 한때 세계 1위 강국이었으나 60년대 초반 미국에 따라잡히고, 6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에도 밀려가기 시작하면서 냉전의 주요 3국 중 최약체가 되어갔다. 거기다 점차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 질서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노예제 철폐 이후에도 지속되는 슬라브 인종에 대한 차별, 서유럽과 발칸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수탈 등이 문제가 되면서 쇠락해갔다.

그렇다고 독일 본토도 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었어서, 전체주의 독재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국민들도 늘어갔다. 미국과의 데탕트 이후 민주주의를 접한 독일 청년들은 미국을 동경했으며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에서도 동시기 일어났던 현상이었다.

경제적으로는 1970년대 수차례 벌어진 석유파동에 슈페어 정권은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으며, 중동을 잡고 있는 이탈리아와 관계가 양호해 석유파동을 다소 피해갔던 일본이나 직접 텍사스 석유로 자족했던 미국과 다르게 어느 쪽도 아닌 독일은 석유파동에 정면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1973년 독일의 경제 성장률이 -7.7%일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의 민생은 확연히 이전보다 나빠지면서 나치 정부에 대한 반감은 더욱 거세졌다.[3]

말기: 마이어 - 콜 정권

1981년에 슈페어가 죽었고, 1910년생으로 SS 출신이자 71세였던 쿠르트 마이어가 제3대 총통으로 올랐다. 하지만 마이어 또한 고령이었던지라 얼마 지나지 않은 1983년에 1930년생의 기수인 헬무트 콜에게 총통직을 양도하고 퇴임하였다.

콜은 뿌리깊은 인종별 차별로 인한 제국 내부 "운터멘쉬"들의 불만, 영국과 프랑스의 독립성 강화, 이탈리아로부터의 자유주의 유입, 석유파동 이후 회복되지 못한 경제로 인한 민생파탄 등으로 누더기가 된 독일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콜은 1984년부터 독일 전반에서 자유화와 개혁을 단행했다. 정치범 수용소 해체 등 공포정치 완화를 위한 조치가 이루어졌으나, 정작 국민들의 요구 사항인 민주주의는 빼놓고 개혁개방을 단행하였다. 결국 1986년, 프랑스 파리에서 반독일 봉기가 벌어졌다.(파리 봉기)

파리에서의 봉기를 시작으로 1987년 이것이 유럽 혁명으로 확대되었다. 친독일 정부들은 시민들의 분노에 이기지 못해 실각하고 심지어 루마니아를 위시한 발칸 반도에서는 내전으로까지 번졌다. 동부 영토에서도 일어난 파르티잔들이 독일군에게 저항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분노와 한이 극에 달하여 독일을 타도하기 위해 총을 들었다.

1987년에 이미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식민지 독립과 민주화를 받아들였다. 독일 역시 이미 전 유럽에 퍼진 혁명의 바람을 막아내지 못하였고, 1988년에 함부르크 조약틀 통해 독일은 유럽 국가들의 내정에 불간섭함으로서 대게르만국은 사실상 붕괴했으며 냉전은 피날레를 향해갔다.

이후 콜 정권은 1989년 6월부터 다당제를 허용하면서 민주화를 위한 기본적인 조치에 들어갔으나 독일 국민들은 유럽 경제블록 붕괴로 인한 민생의 몰락에 대해 분노했고, 1990년엔 끝내 1990년 독일 민주혁명이 터졌다.

민주혁명의 결과 대게르만국과 나치 정권은 전 국민적인 분노에 못 이겨 민주화와 개헌을 수용하였다. 헬무트 콜은 녹음본 라디오로 사임 의사를 밝힌 뒤 중동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할 심산으로 비행기에 오르다가 체포되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국 헌법이 발효되면서 대게르만국은 44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나아가 나치당의 지배는 57년만에 종식되었다.

상징

국기


하켄크로이츠기
Hakenkreuz

대게르만국 국기는 1935년 제정된 하켄크로이츠였다. 갈고리 문양이 왼쪽에 치우친 것이 국기. 가운데에 있는 것이 나치당기였다.

국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가 헌법에서 공식 국가로 채택되었다.

국장

정치

총통


대게르만국 총통
[ 펼치기 · 접기 ]


부총통

국가수상

국가의회

국민대회당

국가사회주의 게르만 노동자당

사회

종교

언어

교육

생활

군사

무장친위대 (SS)

경제

민족

독일인

명예 아리아인

슬라브인

흑인

  1. 이탈리아 및 일본과 동일하나, 일본은 1947년 9월 2일을 따로 "지나 승전의 날"로 본다.
  2. 오스트란트와 우크레이네는 슬라브족 추방 및 동화를 완료하고 1976년에 본토로 편입하였다.
  3. 엄밀히는 일본도 경제 타격을 입었으나, 이케다 내각의 유연한 대처로 최소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