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발칸 전쟁 Third Balkan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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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 중인 루마니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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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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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월 29일 ~ 1947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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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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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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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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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헝가리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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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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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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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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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트란실바니아 전역 합병, 바나트 SS국 수립, 루마니아 분할, 불가리아의 왈라키아 보호령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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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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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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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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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독일국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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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루마니아 왕국 국기.png 루마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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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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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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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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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폰 만슈타인 호르티 미클로시 보리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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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루마니아 왕국 국기.png 미하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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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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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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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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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시는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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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유럽의 화약고
독소전쟁의 승리 이후 승승장구하던 추축국은 유럽 신질서라는 목표를 이루고 분열의 조짐이 있었다. 특히 빈 중재로 인해 북부 트란실바니아 영토를 헝가리에게 양도한 루마니아 내부의 상황은 심각했다. 루마니아는 수차례 북부 트란실바니아 반환을 요구했으나 무시 당했고, 결국 루마니아가 헝가리를 1947년 1월 침공하며 유럽의 화약고는 터지고 말았다.
개전: 불가리아의 참전
개전 당시 40만이 넘는 루마니아군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기 시작했다. 병력 수 차이로 인해 밀리던 헝가리는 독일에 도움을 청했다. 다만 이탈리아 남부에 주둔한 연합군의 재침공 우려, 이베리아 침공을 개시하고 있던 독일은 직접적인 개전은 피하기 위해 만슈타인 원수를 필두로 한 기갑 의용군을 파견했다. 한편 불가리아의 문제는 달랐다. 마케도니아와 도브루자, 그리고 서트라키아를 합병해 대불가리아를 이룩한 불가리아는 당연히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불가리아 또한 남부 도브루자를 루마니아로부터 할양 받았고, 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불가리아는 도브루자의 자국민 보호와 헝가리와의 동맹을 이유로 개전 1주일 뒤인 2월 5일 헝가리의 편으로 참전하였다.
전황: 다뉴브 강을 지켜라
불가리아의 참전과 독일 의용군의 파견으로 전황은 뒤집어졌다. 루마니아는 서부와 남부, 양면전선에 놓여졌다. 루마니아는 불가리아군을 막고자 남부에 다뉴브 강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헝가리 전선에는 공세를 이어나갔다. 이런 상황은 약 5개월간 지속되었다.
전황: 6월 대공세
전쟁을 끌고 싶지 않아했던 헝가리와 불가리아의 작전참모부는 6월 다뉴브강과 트란실바니아 산맥을 돌파하기 위한 대대적 공세 계획을 세운다. 불가리아군이 중심이 되어 다뉴브 강을 공세하기 시작했고, 이 공세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다뉴브 강을 도하하는 데 성공했다. 다뉴브 강을 넘은 불가리아군은 파죽지세로 부쿠레슈티에 입성하였고, 7월에는 트란실바니아까지 공세하여 헝가리군과 조우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 참모부는 부코비나까지 가 항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미하이 1세는 항복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불가리아와 헝가리에게 항복하려던 미하이 1세는 루마니아군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다.
종식: 루마니아의 항복
루마니아가 계속해서 저항하자 불가리아와 헝가리 연합군은 최후의 공세를 가해 왈라키아 전역과 트란실바니아 전역, 그리고 몰다비아 지방의 80% 이상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결국 임시수도였던 수체아바가 함락되며 루마니아는 항복한다.
소피아 조약
전후 처리는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이루어졌다. 트란실바니아 전역은 헝가리에 의해 합병되었다. 바나트는 독일의 군사점령 상태로 남았으며, 불가리아는 왈라키아 보호령을 수립해 미하이 1세를 복위시켰다. 몰다비아에는 친독 협력정부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