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난의 역대 대통령
신센 시대
신센 막부 역대 쇼군
1대 2대 3대 4대
나가야 쿄타 오토리 아시스케 타가와 미에나리 오누치 시다요리
난세이 시대 역대 대통령
타가와 미에나리
(일본어: 箍和三重也)
파일:箍和三重也.jpg
타가와 미에나리의 모습
인물 정보
본명 타가와 미에나리
(箍和三重也)
주요 직책 타이난 공화국 대통령
생몰연도 1841년 7월 3일 ~ 1921년 7월 4일
임기 기간 타이난 공화국3대 대통령
(1882 ~ 1887)

타가와 미에나리(일본어: 箍和三重也)는 타이난 공화국의 정치인으로서 3대 대통령직을 역임하였다. 최초로 공화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대통령이기도 하다.[1] 사실상의 군주와 다름 없는 권력을 가졌던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보다 대중적인 정치를 추구하던 민본주의자이기도 했다.[2]

초반 생애

1841년 미츠소바켄(密稜縣) 출신으로 1859년 스스로 지유닌(自由人)을 자처하면서 방랑 생활을 했으며, 이후 신센 막부 시기 조정에서 외무성, 농무성의 임시 채용되어 근무하다가 1868년 공화파에 입당하였다. 1872년 공화 혁명으로 나가야 쿄타의 공화 정권이 수립되자 국영 신문인 코에 신문(光遠新聞)의 사장이 되었다.

1880년 공화파에 휘하 파벌을 이끌고 입헌회 창립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정계의 참여하였으며, 오토리 아시스케 정권 당시에는 농림산업부의 차관을 맡았고 1881년에는 우정산업청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주요 정권 요직을 역임한 뒤 1882년 입헌회 제2대 장재(長裁)에 취임했다.

미에나리는 처음으로 '공약'이라는 것을 내세워 국민권 확대,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정책들을 내세웠고 이 시대부터 좀 더 대중주의적인 정치, 이른바 포퓰리즘이 시작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공화파의 파벌로서 분류되기도 했으나 정치적 이익이나 참여를 주장하는 집단인 정당 지도자 출신의 대통령이기도 했다.

3대 대통령으로서

그는 자신이 말했던 '공약'대로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을 겸하고 있다는 점과 절대적 권한 가지고 있는 것, 임기가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었다는 점을 문제로 보고서는 행정부 수반인 내각 총리하의원(下議院)에서 선출하도록 했으며, 대통령의 법안 통과권을 국회에 반납하고 대통령을 국민의 뜻에 따라 탄핵할 수 있다는 것을 법률로 명시토록 했다. 이때부터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점차 내각제를 중심으로 정치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한 엽관제를 적극 시행토록 하여 비 공화파 인물들의 정계 진출을 지원하는 등 대중 정치에 발판을 다지기도 했다.[3]

교통운수시책의 확충을 내세우며 기존의 철도원을 철도성으로 승격하기도 하는 등 철도 부설에 각별히 신경을 쓴 인물인데, 그의 적극적인 철도 정책으로 개통된 것이 바로 야마다 선(山田線).

외교 정책에서는 스페인의 필리핀 도독령의 관할이었던 타위타위 제도를 사들여 "홋포토"(北方島)라고 명명하였다.[4]

사후와 평가

퇴임 이후 입헌회의 명예 장재로서 역임하는 등 정계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 갔다가 1921년, 자신이 매입한 홋포토의 '마카야리켄'에서 노년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루어 졌으며, 타이난 공화국의 대중 정치 시도 및 민본주의 기여에 노력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각주

  1. 물론 전임 대통령엽관제를 통해 비 공화파 출신 인물들이 정계로 진출했으나, 여전히 공화파가 정계의 주도권을 차지했고, 미에나리 역시 공화파 출신이기는 하다.
  2. 이 때문에 타이난의 포퓰리즘 정치의 시작은 그를 시작으로 보고 있으며, 이 시기부터 풍요로운 사회를 낭만적으로 보는 쿄와 로망(共和-ロマン)이 대두되었다.
  3. 다카우에 미노루(高上実縷) 대통령이 미에나리 정권 시기에 처음으로 정계 진출을 시도했다. 사실상 난세이 시대를 열 수 있도록 한 인물.
  4. 당시 필리핀 제도는 이른바 "반스페인 민족 운동"이 고조된 시기로서 온건 개혁 정책에서 무장 투쟁으로 급격한 변혁을 겪던 시기이다. 스페인 당국으로서는 별볼일 없는 군도들을 매각시켜 타이난에게 민족 운동 진압의 협조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타이난의 입장으로서는 국제적 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하여 소수의 병력을 파견하였고, 이 소수 병력마저도 반 스페인 시위에 방관자 노릇을 했다가 1898년에 스페인 지배기가 종료되자 귀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