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56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아이젠하워 416인 (78.0%)
(22.0%) 117인 스티븐슨
1952년 11월 4일
1952 대선
1956년 11월 6일
1956 대선
1960년 11월 8일
1960 대선
투표율 62.4%
투표자 73,295,113표
선거일시 1956년 11월 6일 5시 ~ 7일 6시 (UST)
선거 결과
후보 공화당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부통령
리처드 닉슨
민주당
대통령
애들레이 E. 스티븐슨
부통령
에스테스 케파우버
선거인단
416 117인
전국득표
52.9%
38,772,858표
46.2%
33,873,001표
 부통령 당선인
대통령 당선인  
공화당
 리처드 닉슨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1956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1956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는 1956년 11월 6일 실시된 미국의 43번째 대통령 선거이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4년 전 패배한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전 일리노이 주지사를 상대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번 선거는 대통령 선거 역사상 6번째로 높은 투표율을 보인 선거이자, 양당 지명 후보가 연속으로 같은 두 번째 선거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웅적 지휘를 통해 유명해진 아이젠하워의 인기는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이어졌다. 1955년의 심근경색으로 그가 재선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지만, 건강은 곧 회복되었고 1956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스티븐슨은 민주당 내 자유주의의 핵심으로 인기를 유지했지만, 공직을 맡지도 않았고 실질적은 지지 기반도 없었다. 그는 1956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1차 투표에서 아벨 해리먼 뉴욕 주지사와 다른 상대를 따돌렸다. 스티븐슨은 사회보장정책의 상당한 증액과 국방 예산의 감소를 요구했다.

사우스코리아 문제에 대해 확실히 해결하겠다고 한 아이젠하워였지만 막상 실제로 사우스코리아를 연방에서 퇴출시키려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52년에 약속한 사우스코리아 방문 약속 또한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경제가 성장세를 보이면서 강한 지도력을 보이고 있는 아이젠하워가 재선될 것이라는 견해가 확고했다. 지지자들은 "성품, 근면함, 의무감, 가족애, 종교적 헌신"에 기반한 국정 철학보단, 선거 몇 주 전 중동과 동유럽에서 발생한 두 가지 주요 국제위기에 대한 대처를 지지 이유로 꼽았다.

아이젠하워는 1952년 대선과 비교해서 득표율과 득표수, 선거인단 확보 수 모두에서 공화당의 입지를 약간 더 확장했다. 그는 특히 북부와 중서부의 백인들과 도시 및 교외에 거주하는 남부 백인, 그리고 사우스코리아의 도시 및 교외에서 높은 지지율 상승세를 보였다. 이 선거는 1959년 알래스카와 하와이가 연방에 가입하기 전의 마지막 대통령 선거였으며, 매사추세츠와 미네소타가 공화당에 투표한 마지막 대통령 선거였고, 양당 후보가 19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선거였다. 또한 이 선거는 1900년 이후 처음으로 현직 공화당 대통령이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치고 재선에 성공한 선거였다.

후보

공화당

공화당 (51주)
공화당 (51주)
1956년 공화당 지명 후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34대
미합중국 대통령
(1953–1961)
제36대
미합중국 부통령
(1953–1961)

1956년 초,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자신의 건강을 우려해 재선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1955년 아이젠하워가 심각한 심근경색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곧 회복되어 두 번째 임기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아이젠하워의 높은 지지세를 반영하듯,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1956년 공화당 전당대회는 반대 없이 아이젠하워를 재지명했다.

해럴드 스타센은 닉슨의 부통령 후보 지명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유일한 공화당원이었고, 닉슨은 유권자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유지했다. 닉슨 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6년 봄, 아이젠하워는 닉슨이 다시 러닝메이트가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했고, 스타센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닉슨을 지명할 것을 강요받기도 했다.

민주당

민주당 (51주)
민주당 (51주)
1956년 민주당 지명 후보
애들레이 E. 스티븐슨
Adlai E. Stevenson
에스테스 케파우버
Estes Kefauver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1949–1953)
미국 상원의원(테네시)
(1949–1963)

예비 선거

1952년 후보였던 스티븐슨은 1956년 후보 지명을 위해 포퓰리스트인 에스테스 케파우버 테네시 주 상원의원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케파우버는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만장일치로 승리했다. 미네소타 프라이머리의 결과를 받아든 스티븐슨은 자신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고 케파우버와 후보자 토론회를 열 것을 제안했다. 스티븐슨과 페카우버는 플로리다 프라이머리 직전인 1956년 5월 21일 생중계 경선 토론회를 열었다. 스티븐슨은 토론회 이후 플로리다에서 52 대 48로 접전승했다. 1956년 6월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케파우버 선거본부는 자금이 모자랐고, 상대적으로 자금이 많았던 스티븐슨에게 광고에서 밀릴 수 밖에 없았다. 스티븐슨은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63 대 37로 승리했으며, 케파우버는 경선에서 사퇴했다.

민주당 전당대회

1956년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해리 S. 트루먼 전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아브렐 해리먼 뉴욕 주지사는 스티븐슨의 후보 지명에 도전했다. 그러나 스티븐슨의 대의원 격차는 해리먼이 극복하기에는 너무 컸고, 스티븐슨은 1차 투표에서 승리했다.

1956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하이라이트는 스티븐슨이 경선의 열기를 뜨겁게 하기 위해 대의원들이 직접 러닝메이트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깜짝발표를 했을 때였다. 이 선언으로 여러 후보자들이 부통령 러닝메이트에 지명되기 위해 필사적인 홍보를 시작했다. 부통령 후보 지명 투표가 시작되기 전에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날은 단 하루 뿐이었다. 두 명의 주요 후보는 케파우버 상원의원과 무명의 매사추세츠 출신의 상원의원 존 F. 케네디였다. 스티븐슨은 개인적으로 케네디를 러닝메이트로 선호했지만, 대의원 투표에서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려 하지 않았다. 케네디는 투표에서 2등을 기록해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케네디는 아름다운 패배 연설을 했고, 이 연설이 장기적으로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통령 후보 지명

선거

선거운동

스티븐슨은 아이젠하워를 상대로 열심히 캠페인을 벌였고, 처음으로 양 측 모두 TV광고를 주요한 홍보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아이젠하워의 1952년 승리는 대부분 여성 투표에서 그가 앞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선거운동 기간 동안 "주부"에 초점을 맞춘 광고가 넘쳐났다. 당시 일부 평론가들은 TV를 통한 선전이 아이젠하워가 1955년 심근경색으로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66세의 나이에 재선에 출마하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라고 분석했다. TV의 대중화를 통해 아이젠하워는 반복되는 서부와 동부의 이동에서 발생하는 부담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스티븐슨은 국방비를 줄이고 양 진영의 핵 실험을 끝내기 위해 소련의 조약을 체결한 후, 줄인 예산을 사회복지 정책에 투자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또안 징집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고, 완전 모병제로 군대를 전환할 것을 공약했다. 아이젠하워는 개인적으로 지상 핵 실험을 금지하는 공약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공개적으로는 이런 생각에 반대했다. 아이젠하워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얻은 엄청난 개인적, 정치적 인기를 내내 유지했으며, 선거 운동 기간동안 여론조사에서 단 한번도 뒤쳐지지 않는 선두를 유지했다.

아이젠하워는 또 선거 몇 주 전에 발생한 두 가지 외교 위기로 지지율을 높였다. 소련이 점령한 헝가리에서는 1956년 혁명으로 시민들이 소련 지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소련은 10월 26일 헝가리를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흘 후,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군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나세르 정권을 무너뜨리고 국유화된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후자의 위기는 신속한 유엔의 개최로 해결되었고, 헝가리 반란은 소련이 군대로 이를 진압하며 잔인하게 분쇄되었다. 아이젠하워는 두 외교적 사건에 있어서 모두 비난했지만, 헝가리를 도울 수는 없었고, 서방을 수에즈에서 철수시키는 것은 성공했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 많은 미국인들이 대통령을 지지하자는 집회를 열었으며, 정부 지지율이 높아졌다. 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4년의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을 지지했다. 미국 대법원의 판결은 공립학교에서의 인종분리를 종식시켰다. 한편 스티븐슨은 연방대법원의 인종분리 판결에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이것은 주권민주당이 지지하는 시민권법과 같은 수준의 대응이었다. 반면 아이젠하워는 브라운 결정에 대한 명확한 입장 발표를 피했다. 그는 흑인 유권자들로부터 40%의 지지를 얻었고, 그 수준의 지지를 받은 마지막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다.

결과

아이젠하워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모든 여론조사를 큰 차이로 이끌었다. 선거 당일 아이젠하워는 국민 53%의 지지를 받았고, 49개 주 중 41개 주에서 승리했다. 스티븐슨은 남부 여섯 주와 미주리 주, 사우스코리아 주에서만 승리하여 1900년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이후 최초로 미주리에서 이기고도 선거에서 패배한 후보자가 되었다.

선거 결과

선거 결과
대통령 후보 정당 홈스테이트 득표 선거인단
득표수 득표율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공화당 뉴욕 38,772,858 52.90% 416
애들레이 E. 스티븐슨 민주당 일리노이 33,873,001 46.21% 117
토마스 C. 앤드류 주권민주당 버지니아 308,956 0.42% 0
에릭 하스 사회주의노동당 뉴욕 74,450 0.10% 0
에녹 A. 홀트윅 금주당 일리노이 45,937 0.06% 0
파렐 도브스 사회주의노동자당 뉴욕 8,197 0.01% 0
기타 211,714 0.29% 0
합계 73,295,113 100% 533
선거인단 과반수 267

카운티별 득표 결과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