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동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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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5" style="font-size: 13pt; color: #FFFFFF; background: #000;" | '''<big>여운형</big>'''<br><small>呂運亨</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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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5" | <center>[[파일:여운형 선생 초상.jpeg|300px]]<br>1945년경의 사진</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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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4일 (금) 03:39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한국 내각총리대신
[ 펼치기 · 접기 ]
여운형
呂運亨
출생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근군 서시면
(현 대한성 경기도 양평군)
사망
1971년 12월 19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중구
국적
대한제국
작위
자작 [1]
학력
배재대학 법학과 중퇴
숭실대학 법학 학사
역임 직위
대한공산당 서기장
1909년 3월 4일 ~ 1910년 1월 3일
사회민주당 당수
1931년 5월 1일 ~ 1955년 10월 8일
부총리대신 겸 26대 재무대신
1939년 11월 9일 ~ 1945년 11월 17일
15대, 17대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1945년 10월 11일 ~ 1952년 4월 3일
1956년 4월 2일 ~ 1960년 4월 12일
가족관계
슬하 4남 5녀

개요

대한제국의 15대, 17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정치인, 사민주의자, 공화주의자. 일본과의 전쟁 도중 김창암과 거국적인 대연정을 결성했으며 김창암을 충실히 보좌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집권 이후에는 사회 제도등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현대 한국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생애

어린 시절

젊은 공산주의자

엄격한 보수주의 양반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에 대한 반동이었던 것인지 여운형은 급진적인 사상에 점차 빠져들게 된다.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처음 접한 것은 1905년으로 당시 배재대학에는 ‘코뮤니즘 그룹’이라 하여 마르크스의 서적을 읽고 공산주의에 대해 토의하는 곳이었는데 친구의 권유로 그는 이곳에 가입하게 되었고 한성의 다른 공산주의 단체와 협력하여 계급 투쟁이나 구습 타파 같은 신사회운동에 참여했다.
세상을 한번 바꿔보자고 결심한 그는 1907년 12월 7일 대한사회주의청년단을 조직해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에 매진하는데 여러 공산주의 단체가 규합되면서 그 세력이 점점 커졌고 극좌 계열 자유민권 단체도 참여하면서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좌파 단체로 거듭났다.
하지만 정부의 탄압으로 1908년 청년단은 해산되었고 여운형도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두달동안 한성형무소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다 풀려난다. 배재대학에서도 제적당한 여운형은 만주로 건너가 그곳에서 반제국주의범민족동맹을 결성, 열정적인 공산주의 투쟁을 벌인다. 또한 일본제국의 고토쿠 슈스이등 여러 사회주의 활동가와 연대하기도 했다.
1909년 에는 할빈에서 아예 대한공산당을 조직해 스스로 서기장에 취임, 반제국주의/반황(反皇) 구호를 내걸고 공산 혁명을 모의하다 1년도 안되어 또다시 반역 혐의로 체포, 고문을 받기도 했으며 1910년 4월에는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하지만 당시 3차 김홍집 내각때 법무부대신을 지냈고 당시 압도적인 여당 지위에 있었던 대한국민당의 전신 입헌유신회에서 부총재를 지내고 있었던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같이 사형선고를 받은 동지들과 함께 사형을 면해 모두 10년형으로 감형되어 충청도 회덕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중에서도 여운형은 1년 10개월만에 가석방된다.
가석방된 그는 아버지의 지독한 설득에 평양 숭실대학 법학과에 중도입학하였고 1915년 졸업한다. 이후에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해 평양에서 지냈지만 기생집에 드나들거나 도박을 하는등 1년이라는 세월을 난봉꾼으로 보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만주로 가서 이전의 탄압으로인해 지하 점조직으로 활동하던 각 공산주의 단체를 다시 규합한다. 그리고 혁명의 상황을 시시각각 보고받아 지하 신문으로 발간하는 발행인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그를 전향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처형이었다. 당시 러시아에 파견되어있던 특파원은 니콜라이 2세 처형 당시의 온갖 소식과 소문을 전달하였고 이는 여운형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다.
무능력한 임금이라지만 일국의 황제였던 사람을 재판도 없이, 그것도 황제 본인만이 아니라 일가족 심지어 하인들까지 모조리 총살했다는 것에 대해 여운형은 큰 충격을 받았고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된다.
결국 1919년 초 여운형은 공산주의 지하단체를 탈퇴하였고 평양으로 돌아와 제대로된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저소득 평민 계층이나 옛 천민이 겪은 부조리한 사건들에 대해 주로 변론을 맡았고 이로인해 평양에서 큰 인기를 얻게되었으며 이 덕분에 사회민주당의 전신인 신사회동맹의 법무 책임자로 영입된다.

  1. 동아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무종이 서훈하였으나 거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