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한국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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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제45, 47-49대 내각총리대신
노무현
盧武鉉 | Roh Mu-Hyun
출생 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現 김해시 진영읍)
사망 2011년 8월 2일 (향년 64세)
황도특별시 중구 황도대학교중앙병원
묘소 김해시 진영읍 노무현총리묘소
재임기간 제45대 내각총리대신
2003년 10월 21일 ~ 2004년 6월 18일
제47대 내각총리대신
2005년 7월 11일 ~ 2005년 9월 13일
제48대 내각총리대신
2005년 9월 13일 ~ 2009년 9월 12일
제49대 내각총리대신
2009년 9월 13일 ~ 2011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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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계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大匡輔國崇祿大夫)
시호 각의공 (恪懿公)
본관 광주 노씨[1]
부모 아버지 노판석
어머니 이순례
배우자 권양숙
자녀 1남 1녀
의원 선수 7선
의원 대수 34, 36, 37, 38, 39, 40, 41
소속정당 국민당
약력 제34대 국민원 의원 (김해·밀양·양산·진해·서부산 / 국민당)
제36대 국민원 의원 (김해·밀양·양산·진해·서부산 / 국민당)
국민당 김해·양산 지역위원장
국민당 영남지역위원회 대표위원장
국민당 국민위원회 의장

개요

대한국의 법조인, 정치인으로 45대, 47-49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약력

  • 1959.2 진영대창소학교 졸업
  • 1962.2 진영중학교 졸업
  • 1965.2 부산상업학교 졸업
  • 1965. 삼해상업 사원
  • 1966. 제13회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 합격
  • 1970.3 제35회 사법시험 합격
  • 1972.8 제12기 사법연수원 수료
  • 1972.9 충남지방법원 판사
  • 1973. 노무현 법률사무소 변호사
  • 1975.2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졸업
  • 1977. 부산공해문제연구소 이사
  • 1978. 평흥환경문제연구소 이사
  • 1979. 노무현·문재인 법률사무소 변호사
  • 1981. 부산노동자처우개선협회 법률위원회 위원장
  • 1986.5 제34대 국민원 의원 (서울 1구)
  • 1986.6 제34대 국민원 노동위원회 간사
  • 1989.7 김해·밀양·양산·진해·서부산 지역위원장
  • 1994.8 제36대 국민원 의원 (김해·밀양·양산·진해·서부산)
  • 1996.5 국민당 경제대책위원회 위원장
  • 1997.8 국민당 부총재
  • 1998.8 제37대 국민원 의원 (김해·밀양·양산·진해·서부산)
  • 1999.10 제37대 국민원 재정위원회 간사
  • 1999.10 제38대 국민원 의원 (김해·밀양·양산·진해·서부산)
  • 1999.10 제30대 노동부대신
  • 2001.4 제19대 환경부대신
  • 2001.9 국민당 부총재 겸 국민위원회 의장
  • 2003.9 제39대 국민원 의원 (김해·양산·진해·서부산)
  • 2003.10 제45대 내각총리대신
  • 2004.7 제39대 국민원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 2005.7 제47대 내각총리대신
  • 2005.7 국민당 총재
  • 2005.9 제40대 국민원 의원 (김해·양산·진해·서부산)
  • 2005.9 제48대 내각총리대신
  • 2009.8 제41대 국민원 의원 (김해·양산·서부산)
  • 2009.9 제49대 내각총리대신

생애

고졸 학력으로 1970년 제35회 사법시험에 합격, 충남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다 8개월만에 사임한 뒤 부산으로 돌아와 법률사무소를 개업하였으며 부산의 환경오염 문제와 노동자 처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78년에는 평흥에서 환경오염 및 노동자 처우 문제로 인해 노동자단체가 화영 및 12개의 기업을 고소하자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환경과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 경력을 눈여겨보던 정치권에서 여러 입당 제의가 들어왔으나 1985년 김영삼의 제의로 국민당에 입당하였고 34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전국환경오염, 노동자학대 특별청문회에서 초선 의원임에도 같은 정당 소속의 전임 각료와 원로들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모습이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이후 양김 노선 갈등으로 당이 분열되자 김영삼을 따라 자유당에 가지 않고 차기 의원 선거도 불출마, 낙향하여 본업으로 돌아갔다. 국민당의 요청에 지역주의 해소를 내세워 자유당의 텃밭인 부산에 시장으로 출마하였고 차기 총선 출마까지 선언하는 모습을 보여 지지자들에게서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까지 생겨났다. 1994년 36대 총선에 출마, 현역 자유당 의원 김동욱을 꺾고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고 단숨의 국민당내 유력 정치인으로 급부상했다.

99년에 다시 출범한 3차 김내중 내각에서 노동부대신과 환경부대신을 역임하였고 03년 총선에서 승리하자 내각총리대신으로 선출되었으나 국민당 내부의 분열로 8개월만에 사임하였다. 그러나 2005년 다시 총리직에 복귀하였다.

2011년 7월 10일 오후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며 이튿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5일에는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의식을 잃었고 결국 8월 2일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래는 평양현충원 총리묘역에 안장될 예정이었으나 고인이 늘상 고향에 묻히길 원했기에 정부와 국민당장을 치른 뒤 고향인 김해시 봉하마을 개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노무현 내각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친노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 36대 총선 이후 국민당 내 유력 정치인으로 급부상하자 그를 중용하긴 했지만 서로 그리 편한 관계는 아니었다. 우선 김대중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영삼의 천거로 국민당에 입당한 데다가 호남, 호서, 관서 출신도 아니었고 동교동계가 이끄는 국민당 주류와는 환경오염, 노동자학대 특별 청문회를 통해 틀어질대로 틀어진 사이였기 때문이다. 김대중 본인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동교동계 의원들은 노무현에 대한 확고한 견제 심리를 갖고 있었으며 02년 국민당 전당대회 직전 김대중 총리가 총재직을 연임을 포기하려 하자 결사반대를 하고 총재직 연임을 권유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결국 김대중에 의해 실질적인 차기 총리로 지명된 노무현이었지만 03년 총선 기간 동안 부총재 겸 국민위원회 의장이라는 어정쩡한 직함을 얻어 제대로된 선거 지휘도 하지 못했다.

선거후 총리직에 올랐음에도 동교동계를 비롯한 견제는 계속됐다. 노무현이 추진하는 개혁법안을 사사건건 반대하였으며 2004년 정초 호주제 폐지와 자식의 성을 부모중 아무나 따르게 할 수 있게한 민법 개정안에 유생들과 반대운동을 전개하여 국민당 국민원 의원 절반이 조금 안되는 127명의 반란표가 나왔고 중추원에서도 간신히 통과되었다.

  1. 광주군계 매죽와공파 31세 ○현(鉉)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