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아침해의 원유관 세계관의 주요 사건들과, 시간에 따른 일들을 정리한 문서이다. 사건의 경우, 사건 문서에 각 사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는 식으로 분업되어있다.

일부 시간대의 일들은 개인작이라는 한계상 조금 부정확할수도 있으니 유의.

16세기

  • 1535년:문정왕후가 출산 중 지나친 진통으로 사망. 아침해의 원유관 세계관의 첫번째 분기점이다 . 이에 따라 신체적, 정신적이 없어진 인종은 구심점인 문정왕후의 증발로 붕 떠버린 공신들과 보수파들을 대대적으로 갈아엎을 수 있었다.
  • 1547년:인성왕후가 의성군 이효를 출산하였다.
  • 1559년:불의의 사고로 원균이 변소에 빠졌고, 뒤늦게 건져졌으나 얼마 못 가 세균성 감염으로 사망하였다. 아스트랄하지만 아침해의 원유관 세계관의 2번째 분기점이다(...)
  • 1565년:대대적인 개혁의 진행 이후 노쇠한 인종이 세자 이효에게 퇴위의 뜻을 밝히고, 그해 6월부터 상왕으로서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효는 자신의 대에서도 개혁정책이 계속될 것임을 즉위 당일 대신들에게 하명하였다.
  • 1570년:1월 3일, 노환으로 몸이 쇠약해진 인종이 세상을 떠났다.
  • 1579년:조정에 올라 온 십만양병설에 이효가 호의적이 의견을 보였고, 이후 대신들과의 합의로, 10만양병설 원본에는 못 미치더라도 여전히 전보다는 큰 수인 병력양성계획이 시작되었다.
  • 1588년:이효의 왕비 의목왕후가 쌍둥이를 출산하였으나, 한명이 어린 나이에 돌이 지나기 전에 백일해로 사망하였다. 남은 한명은 이후 경해군 이균이라 불리게 된다.
  • 1590년:일본에 파견된 뒤 돌아온 조선의 사절단이 히데요시의 잠재적 위험성에 대한 정보를 들고 왔고, 이를 염려한 이효는 비밀리에 일본의 침공에 대한 대처를 준비할것을 하명하였다.
  • 1591년:많은 왈가왈부 속에서 대응이 준비되던 도중, 일본 해안가 일대로 표류했다가 돌아온 어부들에 의해 나고야성의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염탐을 위해 파견된 조선 수군이 진짜로 나고야성이 건축되고 있는 게 보인다는 첩보를 들고 오면서, 전쟁 준비에 대한 반대여론이 상당히 수그러들었다.
  • 1592년:조선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며 더 격렬해진 출병 반대 의견에도 불구, 기어코 히데요시는 5월 23일 출병을 감행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일본군이 부산포까지 접근하였으나 조선이 미리 대기시켜놨던 해상병력으로 인해 조기에 포격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 1593년:부산포에서의 처절한 실패 이후 거제도를 통해 쓰시마섬으로 후퇴한 일본군은 그해 8월 조선과 당사국 중 하나인 명나라에게 휴전협정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결렬되어 얼마 후 전쟁이 다시 재개될것이 기정사실화되다.
  • 1594년:예상과 달리 1월에 히데요시의 더 이상의 추가적인 파병에 반대한 다이묘들이 오사카성을 야밤에 습격하여 주위를 점거, 히데요시를 포위하였다. 히데요시는 그들로부터 부산포 해전 참패와 쓰시마 영유권의 위기로 할복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였고, 결국 다이묘들이 직접 오사카성 안으로 들어와 히데요시를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관백 자리가 공석이 되자, 히데요시 살해를 주모한 다이묘들은 1살 남짓한 히데요리와 히데츠구를 우선 그대로 자리에 유지시키느냐, 아니면 아예 새로운 관백을 들이느냐를 두고 다시 한 번 내분을 시작하였다.
  • 1595년:일본의 내분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은, 명과의 합동작전으로 제 1차 쓰시마 해전을 감행, 혼란한 틈을 타 쓰시마를 점거하는데까지 성공하였다. 이 시기의 쓰시마를 '조선령 대마도'라고도 부른다.

17세기

  • 1602년:도쿠가와 가문의 세력이 일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한 조선은, 조정에서의 논의 후 그들에게 투자용으로 수군 등 해양 방면에서의 지원을 하였다.
  • 1605년:히데요리를 확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일본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후 에도막부는 조선에 화친할 뜻을 밝혔고, 조선은 쓰시마 할양과 기타 요구사항들을 조건으로 화친요청을 수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각각 조선통신사와 왜관이라는 교역처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재임기간의 절반 정도를 히데요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극도로 불안정해진 일본 정계 정상화에 사용해야 했다.
  • 1607년:이효가 붕어하였으며, 사후 묘호는 쓰시마를 정복하고 일본을 몰아세운 점 등이 고려되어 태종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인 경해군 이균이 즉위하였다.
  • 1618년:누르하치의 후금이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동시에 조선도 명나라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만주 지역을 기점으로 후금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 1624년:대륙과 만주에서의 치열한 접전 끝에 누르하치가 화살에 맞아 죽으면서 후금은 대륙에서의 퇴각을 시작하였다. 승전 축하를 위해 북경에 당도한 조선의 사절단은, 명나라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란과 호란을 모두 조기에 막아냈다며 조선을 치하한 만력제에게 상으로서 점령한 남만주 지역의 일정 부분에 대한 영향력을 허락받았다.
  • 1627년:얀 얀서 더벌터브레이가 제주도로 표류하였고, 조선에 잔류하여 병기에 대한 지식을 전파했다.
  • 1630년:후금과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명나라에서 이자성의 난이 발발하였다. 조선은 해당 사태에 대해 유감을 표했으나 우선 중립정책을 고수하였다.
  • 1632년:수도 북경에 이자성이 입성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나름 상태가 멀쩡했던 북경에 진입하기 위해 벌인 수많은 살육으로 정통성에 대한 의구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조선 또한 인의를 져버린 이자성을 천자로 볼 수 없다며 순나라의 중화제국으로서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
  • 1635년:정권의 명분 확보를 위해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던 이자성에게 독이 든 차가 올라갔다. 이자성은 차를 마시고 피를 토한 뒤 즉사하였다.
  • 1636년:이자성의 동생 이자경이 황위를 이어받았고,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선파병을 취소하려고 시도하였다. 이후 이 건에 대해서 내분이 일어나다가 결국 지방 세력들의 반란과, 티베트의 선공으로 순나라가 다시 분열기에 접어들었다.
  • 1638년:순나라의 멸망으로 분열되어버린 중국에서 무역이 적자를 보기 시작하자, 조선은 무역처를 늘리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왜관에서의 무역, 유구나 베트남 그리고 친조선적인 중국 내 군벌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또한, 이 과정에서 당시 군벌 세력 중 하나인 후송에 머무르던 아담 샬과의 접촉으로 서학이 전파되었다.
  • 1641년:조선이 황해 근처에서 악명이 자자하던 중국 출신 해적들을 토벌하던 도중, 중국무역을 끝내고 일본으로 가는 중이었던 네덜란드 함대의 도움을 받아 해적들을 격퇴하였다. 이 때 네덜란드에 대한 정보가 조선에 처음으로 전해졌으며, 첫 조우 당시 의사소통은 중국어로 이루어졌다.
  • 1642년:분열로 인해 중국 내부에서 한족 근본문화가 대두되어 교역이 명나라 시기보다 못해지자, 손해를 메꾸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조선에게 접근, 무역을 제안하였다. 당시 서학 지식과 왜관에서의 해외정보, 얀과의 취조로 모은 정보를 총동원하여 이들이 원하는것이 무역이라는것을 알게 된 조선은 중국 통일왕조의 소멸로 아직도 나고 있던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에게 제물포와 쓰시마 인근에 이들을 위한 개항장을 마련해줄것을 제의, 뭐가 됬든 동방 무역으로 돈을 벌 방법이 절실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제물포에 네덜란드인 거주지인 '화관'이 설치되었다.

18세기

  • 1735년:여진족이 만주 내에서 일부 지역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남만주에서 조선과의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으나, 조선의 승리로 전투는 끝을 맺었다.
  • 1740년:재수복된 후금이 연해주, 몽골 일대로 진출을 시도하였고 일부 성공하였다.
  • 1754년:길림촌에 정착한 조선 농민들을 시작으로 농지를 원한 농민들에 의한 남만주 개척이 시작되었다.
  • 1775년:중원에 후송과 대순,후평이 자리잡은 3강 체제가 구축되었으며, 이들은 세력의 붕괴를 염려한지라 서로에 대한 교전을 꺼렸다.
  • 1788년:네팔 왕국이 티베트를 침공하였고 이 과정에서 티베트의 국력이 약회되었다.
  • 1797년:비밀리에 상인 세력에 대한 지원을 통해 영향력을 서서히 확대한 안동 김씨 가문의 금권기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농민들을 남만주로 보내 자국 내 잉여인구를 분산하는 활동이 더 가속화되었다.

19세기

  • 1804년:위험요소라고 간주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조선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네덜란드가 이 사태에 대한 대처로 조선 내에서의 선교를 완전히 포기하였고, 주요 서학 지식인들이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방침을 따르면서 서학의 세가 아예 사그라들어버릴 위기를 면했다.
  • 1812년:함경북도에서 홍경래의 주도 아래 대규모 소요사태가 발생하였다. 안동김씨 세력은 이 사태에 대한 진압을 성공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비효율적인 진압으로 서서히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 1825년:제물포의 화관이 대마도 화관의 영향력을 흡수하면서 대마도 시장의 가치가 미미해졌다.동시에 중국에서는 후송이 후평을 집어삼키고 순나라와 함께 마지막 안정기를 누렸다.
  • 1840년:영국이 순나라와의 교역문제로 제 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 1850년:태평천국의 난이 순나라와 송나라 국경 지대에서 발발하였다.이로 인해 송, 순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 1853년:에도 막부에 흑선내항 사건이 발생하였다.
  • 1855년:왜관의 인원들이 대규모로 철수하는 등 무언가 이상한 일본의 상황에 의문을 품은 조선이 10년간 단절됬던 조선통신사를 다시 파견하였다.
  • 1856년: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였고, 이 과정에서 순나라의 국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 1857년:연해주 강탈등의 문제로 강경해진 금나라의 본격적인 쇄국 정책이 시작되었다.
  • 1860년:프랑스가 베트남으로의 원정을 가속화하였고, 불과 2년만에 베트남을 정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정보까지 받고 난 조선 내부에서 문호를 열어야 한다는 개화파가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 1866년:파리 외방정교회를 자신들의 권위에 위협이 될것이라고 판단한 안동 김씨 일가가 국왕의 동의 아래 천주교 신도들을 탄압하고 이 소식이 프랑스 본국에 전해지자, 나폴레옹 3세는 조선에 파병을 실행할것을 지시하였다. 베트남에서의 경험으로 조선을 압도적으로 격파한 프랑스는 조선에게 통상조약을 요구하였고, 이도저도 할 수 없었던 안동김씨는 우선 프랑스라도 끌어들여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약을 수용하였다.
  • 1868년:개항을 통한 서구 문물이 조선에 서서히 유입되었고, 이 때 조선 최초의 증기기관차, 공장 등의 인프라들도 유입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안동김씨의 세력이 더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 1869년:보신전쟁이 종결되었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다.
  • 1871년:프랑스가 보불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관심이 끊어지자, 안동김씨를 몰아내자는 의견이 개화파와 근왕파로부터 대두되었다. 그러는 한편 실학자이자 조선 최초의 제국주의자라고도 평가받는 최익현이 왕의 친정을 부탁하는 지부상소를 올렸다가, 당시 안동김씨 집안의 자제 중 하나에게 처형당했고, 이로 인해 안동김씨 세력은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결국 근왕파 세력의 손을 훗날의 고조인 이인수가 들어주면서 신미사화가 발생하였다. 동시에 70년 가까이 권력을 유지한 안동김씨의 권세가 사그라드는 순간이었다. 이후 새롭게 들어선 근왕정부가 차후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한다며 보빙사를 파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흥선군 이하응의 주변 인물을 위시한 전통적인 사대부 세력과 개화파 세력이 각각 선발되어 파견됬다.
  • 1873년:전통적 세력인 사대부들이 서양 문물에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고조도 이에 동의하면서 조선 내 모든 계층들에게 서양에 대한 정보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이 정보와 신문물들의 의미를 알게 된 조선 내부에서 일본과 같은 문명개화론이 비상하였다. 동시에 이때부터 헌법 초안 작성을 시작으로'임신개혁'이라 불리는 서구화 정책이 서서히 시행되기 시작되었으며, 농민들이 이미 진출해있던 남만주 지역 일부가 2개의 도로 완전히 합병되었다. 한편, 이 소식이 전해진 일본에서 사카모토 료마가 '조일동포론'을 집필하던 도중 신센구미에게 암살당하였다.
  • 1874년:헌법 제정, 학제 개편 등의 근대화 과정 중 일본 메이지정부의 칙서가 도착하였다. 논란 끝에 우선 분쟁방지를 위해서 수락하기로 결정한 정부였으나, 이로 인해 조선 내부에서 일본에 뒤쳐졌다는 열등감, 명색이 황제국인 순나라와 송나라의 실정에 대한 정보가 전해지면서 황제국을 향한 열망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1875년:칭제 요구가 빗발쳤으나 회의적인 여론도 많던 상황에서, 우선 조선은 외왕내제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러는 한편, 이 때 일본제국과의 국교가 수립되었으며,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 및 조선의 생존을 위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 1877년:순나라의 재상 이홍장이 금나라와 밀착관계를 시작하며 조선을 압박하는 정책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조선에서는 총리제도가 도입되었으며, 김홍집이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집권하였다. 이 시기 조선이라는 국호가 자주성을 나타내기 위해 대한국으로 개명되었다.
  • 1880년:태극기의 디자인이 최종적으로 완경군 이재황의 디자인으로 발탁되었다.
  • 1885년:한국의 통상 요구가 거절당하자, 한국은 남만주 일대에 군을 파병하여 사격하는것으로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후금은 저항을 더 할 수 없었고, 결국 간도 조약으로 후금은 한국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 1889년:대한국 헌법이 반포되었으며, 한국의 정체성을 입헌군주국이라고 정의하는 동시에, 국교는 아니지만 국가의 주요 이념 중 하나를 유교라고 명시하였다.
  • 1893년:일본의 순나라 남양함대 선제공격을 시작으로 제 1차 동아시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의 결과는 조일동맹의 승리로, 조선은 간도를 비롯한 추가적인 남만주 지역을, 일본은 대만과 푸젠성 일대의 영토를 얻어냈다. 한편, 대련은 조선이 차지하는 대신 일본에게 대마도를 다시 반환하기로 전후에 합의가 체결되었다.
  • 1894년:환구단에서 칭제건원 의식이 진행되었다. 이 직후부터 국호는 대한제국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연호는 광무로 정해졌다. 한편, 제 5대 총리대신으로 부임한 김옥균은 그동안의 개혁에 쐐기를 박는 갑신경장을 진행, 이 과정에서 선거제도의 일부 개편과 노비의 해방, 사족제도 확립과 한국어 사전 편찬 등이 이루어졌다.
  • 1895년:러시아를 계속 끌어들이던 예허나라 힝전을 경계한 한국이 야밤에 기습을 감행, 후금 일대를 점거하고 심양궁에 불을 질렀다. 혼란을 틈타 덕종 아이신기오로 자이탼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 예허나라 힝전은 심양궁 깊숙한곳에 한국에 의해 유폐되었다가,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이 당시 만주에서는 변발에 대한 제한령이나 신분제 폐지 등 한국이 주도하는 개혁이 이루어졌다.
  • 1896년:만주로 다시 돌아온 아이신기오로 자이탼이 칭제건원을 감행, 국호를 대청제국(다이칭 구룬)으로 바꾸고 근대적 개혁인 '광서개혁'을 감행하였으나 기존 만주 내 귀족들의 반발에 격렬히 부딛혔다. 한편, 태자의 비가 적장자인 이인황을 출산하였다.
  • 1899년:창덕궁에서 이인수가 붕어하였다. 묘호는 고조(高祖)로 정해졌고, 이후 태자 이훈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연호는 융희(隆熙). 또한, 의화단의 난에 10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참전하였다.

20세기

  • 1901년: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푸젠성과 중국 해안의 추가적 영토를 할양 및 조차받았고 내몽골 일부는 한국에게 할양되었으며, 득의양양해진 일본 해군을 시기한 일본 육군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동시기, 한국 또한 북만주의 패권을 언젠가는 독점해야 한다는 인식이 발생하였다.
  • 1902년: 제 7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집권했다. 동시에,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여 각각 육지와 해양을 담당해줄 한국, 일본과 한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 1903년:시베리아 철도의 건설이 본격화되자, 비밀리에 러시아와의 전쟁을 각오한 한국과 일본의 합동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 1904년:한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결과 러시아가 남만주에서 육전을 대패, 사할린에서 해전을 대패하자 3국의 제정적 파탄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이 '블라디보스토크 조약'을 중재하였다. 전쟁 결과로 한국은 북만주에 대한 영향권을 확보하였으며, 일본은 사할린과 할양받았다. 한일 2개국이 모두 점령한 연해주는 '연해주 공동자치령'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이 통치하는 형태로 결정되었다.
  • 1905년:제 2차 한만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으로 대청제국의 외교권과 주권 대부분이 박탈되었으며, 사실상 대한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 1906년: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었다. 이 밀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였으며, 동시에 의화단 전쟁 당시와 같이 조계지 내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명분을 들이세워 일본측의 중국 조계지에 대한 무간섭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이 요구에 대해, 장시성의 지역 일부는 추후 중국에 반환한다는 조건 아래 나머지 조계지의 보존을 묵인하기로 합의했다.
  • 1907년:제 2대 청국통감 이완용이 하얼빈에서 저격당해 큰 부상을 입었다. 이 일로 이완용이 중태에 빠지자 박영효 총리는 강경파의 손을 들었고, 결국 1909년 한만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대청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 1910년:전봉준의 주도로 농민계층들의 민권운동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박영효 내각이 강경진압을 체택하였다.
  • 1911년:일시적으로 집권에 성공한 일본 육군 파벌의 강력한 주장으로 대만 근방의 중국 조계지들이 완전히 합병되었다.
  • 1912년:일본에서 다이쇼(大正) 시대가 시작되었다.
  • 1913년:박영효의 대처로 한국 내에서 호헌운동이 대두되자 결국 반발을 이기지 못한 박영효 내각은 책임을 지고 사퇴, 본격적인 대한제국 민주주의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암살됬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가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시작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의 막이 열렸다.
  • 1915년: 영한일동맹의 의무를 명분으로 대한제국, 일본제국이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였다. 이들은 각각 육상과 해상에서 독일을 점령하였으며, 키아우초우와 독일령 뉴기니 일대를 점령하였다.
  • 1918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내전이 시작되었고, 한국은 로마노프 황가에게 황실 명의로 밀서를 전달, 로마노프 황가의 자손들을 구조하는 '금관작전'을 실행했다.
  • 1918년:동맹국의 해산으로 제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 1919년: 전후, 미국의 제안으로 국제 연맹이 결성되었다. 같은해 6월 연해주 공동자치령에 백러시아 망명정부가 들어섰고, 로마노프 가의 황손들을 우대하는 공화국임을 명시하였다.
  • 1920년:적백내전이 적군의 승리로 종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건국되었다. 동시에 백러시아 망명정부는 극동 공화국으로 국호를 교체했다.
  • 1921년: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연말에 정식으로 건국되었다.
  • 1922년:일본이 장시성 문제로 영일동맹을 종료하였다.한편, 만주인들의 보통선거권이 명목상 통과되었다.
  • 1923년:한국이 청도 문제로 영한동맹을 종료하였다. 대한백의당이 한국 정치계의 음지에서 창당되었다.
  • 1924년:상하이에서 연설하던 대한제국 대신들이 조선공산당이 일으킨 폭탄 사태로 죽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을 갈구한다는 명분으로 제국 치안법이 새로 개정되었다.
  • 1925년:일본령 후켄쇼(푸젠)에서 명목상 중국인들의 보통선거권이 통과되었다.
  • 1926년:대중국 동맹에 의거한 한일동맹이 새로이 체결되었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정부청사 앞에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공산당 인원들과 부딛히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 1928년:검은 목요일로 인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으며, 한강 집단 투신사건이 발생하였다.
  • 1929년:융희제 이훈이 붕어하였다. 한편, 태자 이인황이 새로히 즉위하였으며 연호는 성덕(聖悳)으로 정해졌다.
  • 1930년:한성 진군이 발생하여 주도자인 김창암이 성덕제로부터 '구국자'자리를 인정받았으며, 정식으로 대한백의단이 정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21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