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시대

Choijy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4월 25일 (목) 03:13 판 (새 문서: {{원고국의 역사}} {{목차}} == 개요 == 만목이 객진수문의 난으로 멸망한 이후 북연이 남위를 정복하고 원고 반도를 재통일하기까지 진행된 원고 반도의 212년간의 혼란기이다. == 상세 == === 만목 멸망 ~ 남당 멸망 === 시작부터 선양으로 포장된 쿠데타로 인해 세워진 북진과 지방 곳곳을 나눠 통치하던 호족들을 어설프게 통합시킨 남당이 오래 지속될 리 만무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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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국의 역사
元高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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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만목이 객진수문의 난으로 멸망한 이후 북연이 남위를 정복하고 원고 반도를 재통일하기까지 진행된 원고 반도의 212년간의 혼란기이다.

상세

만목 멸망 ~ 남당 멸망

시작부터 선양으로 포장된 쿠데타로 인해 세워진 북진과 지방 곳곳을 나눠 통치하던 호족들을 어설프게 통합시킨 남당이 오래 지속될 리 만무했다. 남당의 초대 황제인 이경해는 그나마 호족을 적절히 견제하는 정책을 펴며 지방을 안정시켰으나, 북진을 세운 객진수문은 초장부터 철권통치를 휘둘러 나라를 세운 지 3년만에 조카의 반란으로 인해 최후를 맞이하고 마는 등 산북은 산남에 비해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결국 북진은 세워진 지 30여년만에 효별개무의 난으로 멸망하고, 남당의 2대 황제 이경상대 또한 호족 통합정책을 보기 좋게 말아먹고 수도까지 쳐들어온 호족들의 강요로 그들의 지방권력 행사를 공인하는 등 만목의 멸망 이후 원고 반도에는 멀쩡한 부분이 없었다.

반란에 성공해 북진을 멸망시킨 효별개무는 곧 지방을 통제하고 북제를 세웠다. 효별개무는 감부를 설치하여 북진 시대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권력을 정점에 올리는 한편 황족과 일반 귀족의 관직 진출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는 등 귀족에 대한 권리도 어느 정도 인정해줌으로써 황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북제는 북진에 비해 더 안정된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렇게 국가 내부의 혼란한 상황이 해결되자 북제의 지략가들 사이에서는 산남을 정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오가기 시작했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산북 정통론이 대두하게 된다. 북제가 남당을 침공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자 남당의 지배 세력이던 호족들 사이에서는 북제의 통일을 지원한 뒤 그 댓가로 북제의 보호 하에 권력을 누리자는 환침론과 남당 조정에 비해 북제는 믿을 게 못되니 차라리 지금 북제를 물리쳐 당분간 산남은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자는 항전론이 충돌하였다. 항전파는 일찍이 만목 후기부터 성장한 호족의 일파로서 중앙정권을 장악하고 기득권으로 자리매김했으나, 남당의 지방분권화 이후 뒤늦게 성장한 신흥 호족들은 북제를 도구 삼아 현재의 기득권 세력인 주전파를 제거하고 공신으로써 중앙 정계에 진출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환침파는 곁다리 세력으로써 목소리가 매우 작았고, 논리 자체도 박약하여 항전파에 비해 그리 큰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결국 논쟁을 통해서는 힘을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한 환침파는 황백산을 내세워 조정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항전파 인사인 사유혼이 반란을 진압하고 정계를 장악하면서 항전론이 환침론을 완전히 짓누르게 되었다.

남당 정국을 장악한 사유혼은 개령산성을 짓고 환침론파 호족들이 소유했던 사병을 혁파하여 모두 정규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북제의 침략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한편, 북제는 상황이 달랐다. 한창 산남 침공을 준비하던 효별개무가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승하하고 그의 어린 아들 헌종(효별상지)이 즉위하자, 산남 정벌에 반대하던 주화파는 효별개무를 이은 주전파의 대표주자인 감부장 연무위를 견제하기 위해 헌종을 등에 업고 조정을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효별개무 즉위 시절에도 산남 정복에 대한 반대가 많았다가 막강한 왕권을 지녔던 효별개무의 사후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이다. 이처럼 주화파가 기어오르려는 시도를 하자 연무위는 결국 밤새 군대를 파견하여 주요 주화파 인사들을 암살하고 헌종을 납치하여 감부에 머물게 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연무위의 쿠데타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마침내 북제는 남당을 침공했으며 명분 부족으로 처리하지 못한 남은 주화파 세력들을 전장에 내보내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켜 오히려 사기가 저하되는 현상이 나타났고 결국 북제군은 남당군의 철저한 방어에 막혀 개령산성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때를 틈타 개령산성에 파견되지 않은 남당군은 개령산 저지대를 통해 방어태세가 갖춰지지 않은 북제군의 옆구리를 노렸고 작전은 대성공, 결국 북제군 대부분이 포위섬멸당하고 잔여 병력은 패퇴하고 말았다. 남은 병력의 지휘관이자 주화파 세력이었던 이연국은 남은 병력들을 이끌고 현재 원주 남부의 숲으로 숨어들었는데, 부하 장수들과의 논의 끝에 승산 없는 전쟁을 계속하지 말고 아예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였으며 결국 그들은 연산으로 진격하였다.

북제의 수도 연산에서 전황도 잘 모른 채로 방탕한 생활을 누리고 있던 연무위는 이연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허둥지둥 사병들을 모아 반란에 대응하였으나 실전 경험을 쌓은 장수들에 비하면 오합지졸일 뿐이었고, 결국 연무위는 패퇴하여 헌종을 놔두고 옛 광양 땅으로 도망쳤으며 연산은 이연국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후 이연국이 효별상지를 폐위하고 북하를 세웠으며, 연무위는 녹주에서 북송을 세우며 산북은 둘로 분열되었다. 같은 시각 개령산성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사유혼은 수도인 산구로 돌아와 영웅으로 대접받았으며 이미 그의 영향력은 평범한 호족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어버린 지 오래였다. 결국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남당의 4대 황제 목종(이경운강)이 사유혼에게 선양하면서 남당이 멸망하고 남주가 건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