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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민국''', 통칭 '''금나라''' 혹은 '''금국'''은 북만주 지역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동쪽으로 러시아 차르국, 서쪽으로 중화민국과 접해있으며 남북으로 각각 대한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또한, 지역적인 역사 및 특징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다문화적인 지역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 '''대금민국''', 통칭 '''금나라''' 혹은 '''금국'''은 북만주 지역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동쪽으로 러시아 차르국, 서쪽으로 중화민국과 접해있으며 남북으로 각각 대한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또한, 지역적인 역사 및 특징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다문화적인 지역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 ||
중세에는 여러개의 부족들로 분열되어 있다가 1618년 후금을 건국, 중국침공을 시도하였으나 조명연합군에 의해 누르하치가 죽고 전세도 불리해지면서 결국 다시 내분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ref>이때 무주공산이 된 남만주에 한국의 영향력이 잔류하였고, 조선 후기쯤으로 가면 공식적으로 주변국들로부터 남만주 일대가 조선의 영토로 인정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ref>. 이후 1700년대에 다시 | 중세에는 여러개의 부족들로 분열되어 있다가 1618년 후금을 건국, 중국침공을 시도하였으나 조명연합군에 의해 누르하치가 죽고 전세도 불리해지면서 결국 다시 내분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ref>이때 무주공산이 된 남만주에 한국의 영향력이 잔류하였고, 조선 후기쯤으로 가면 공식적으로 주변국들로부터 남만주 일대가 조선의 영토로 인정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ref>. 이후 1700년대에 훙리 칸의 강력한 카리스마 아래에 다시 통합할 수 있었고, 남만주의 맹주로 떠오른 조선을 피해 연해주 및 몽골 일대로 원정과 정복전쟁을 펼쳐 중흥기를 이룩했었다. 그러나 1721년 러시아 탐험대를 겨우 격퇴한 이후 강경화되던 국가의 여론이 결정적으로 동방전교회를 믿게 된 만주인 기독교도들의 반역모의가 적발되고, 간신히 복속시킨 몽골에서 일어난 반란에서 패퇴당하면서 후금은 완전한 쇄국 정책으로 들어섰고, 이후 이 쇄국의 풍조는 금 문종의 병세가 약화된동안 왕비 예허나라 힝전이 실권을 장악, 조선과 중국으로부터의 관계까지 경직시키면서 절정에 달했다. 결국 1800년대 중반 한국의 국서를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한국군의 침공이 일어났고, 이 침공에서 패배해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후 정국을 역전시키기 위해 예허나라 힝전은 순나라와의 관계를 밀착시켜 일본과 한국을 모두 격퇴할 계획을 구상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제 1차 동아시아 전쟁에서 순금 연합의 패배를 기점으로 금나라 덕종의 아관파천 등이 일어나면서 예허나라 힝전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후일 러시아에서 돌아온 덕종은 국호를 대청제국으로 바꾸고, 근대화 계획인 광서개혁을 실시하였으나,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택한 친러 외교가 한러일 전쟁으로 무의미해지면서 1908년, 대청제국은 대한제국에 정식으로 병합되었고 만주라는, 한국의 일개 지역으로서 불리게 된다. | ||
이후 한국은 만주 영토의 관리를 위해 무단통치 등을 시행하였고 자국 내 빈민과 농촌 인구들을 만주로 보내는 정책을 실행하여 만주인들의 토지 대다수를 강탈하였다. 여기에 적백내전 이후 러시아인들도 들이닥치면서 국제사회의 눈치를 본 한국 정부의 정책으로 만주인의 사회적인 신분이 더 내려가자, 3월 1일에 만주의 중심부인 신징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대한 대처로 한국은 만주인에 대한 정책을 바꾸어 '교화통치'라는 이름의 동화작업을 실행하였으나 효과는 미미했었고, 오히려 당시 한국에 번지던 정치적 자유에 대한 인식이 만주에도 전파되던 중 스탈린에게 반대한 소련 인사 일부들이 몰래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졸지에 공산주의 세력들의 온상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김창암이 집권하면서 만주는 전쟁을 위한 발판으로 서서히 탈바꿈 되기 시작하였고, 동시베리아 전쟁 도중에는 작황이 최하치를 기록하거나 러시아인들에 대한 우대가 철폐되는 등 상태가 좋지 못했다. 결국 한성내전을 시작으로 북만주 지역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자 곧바로 만주 내 무장 공산주의 세력과 만주 독립운동 세력은 신징시를 접수하였고, 이후 소련군이 남하한 뒤 다급해진 한국이 해동성맹 해체와 더불어 해외 식민지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면서 독립을 맞게 되었다. | 이후 한국은 만주 영토의 관리를 위해 무단통치 등을 시행하였고 자국 내 빈민과 농촌 인구들을 만주로 보내는 정책을 실행하여 만주인들의 토지 대다수를 강탈하였다. 여기에 적백내전 이후 러시아인들도 들이닥치면서 국제사회의 눈치를 본 한국 정부의 정책으로 만주인의 사회적인 신분이 더 내려가자, 3월 1일에 만주의 중심부인 신징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대한 대처로 한국은 만주인에 대한 정책을 바꾸어 '교화통치'라는 이름의 동화작업을 실행하였으나 효과는 미미했었고, 오히려 당시 한국에 번지던 정치적 자유에 대한 인식이 만주에도 전파되던 중 스탈린에게 반대한 소련 인사 일부들이 몰래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졸지에 공산주의 세력들의 온상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김창암이 집권하면서 만주는 전쟁을 위한 발판으로 서서히 탈바꿈 되기 시작하였고, 동시베리아 전쟁 도중에는 작황이 최하치를 기록하거나 러시아인들에 대한 우대가 철폐되는 등 상태가 좋지 못했다. 결국 한성내전을 시작으로 북만주 지역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자 곧바로 만주 내 무장 공산주의 세력과 만주 독립운동 세력은 신징시를 접수하였고, 이후 소련군이 남하한 뒤 다급해진 한국이 해동성맹 해체와 더불어 해외 식민지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면서 독립을 맞게 되었다. |
2024년 4월 18일 (목) 00:3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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