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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昨日は極東の中心だった日本が、今は世界の心臓である大東亜帝国に生まれ変わる。<br>어제는 극동의 중심이었던 일본이, 이제는 세계의 심장인 대동아제국으로 거듭난다.'''<ref>번역기를 돌린 것이기 때문에 더 나은 번역이 있다면 관련 전공자들이 추천 바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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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창제|{{글씨 색|#AF3140|성종 융창제}}]], 1945년 9월 2일 [[대동아 전쟁|{{글씨 색|#AF3140|대동아 전쟁}}]] 승전 연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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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오세아니아 및 남북아메리카에 위치한 황제국이다.
동아시아, 오세아니아 및 남북아메리카에 위치한 황제국이다.



2021년 12월 23일 (목) 02:41 판


욱일승천
大東亜帝国
대동아제국
대일본제국 (大日本帝国)
大東亞帝國 | ᠪᡝᠮᡠᠰᡝᡳ ᠮᡠᠰᡝᠪᡝᠮᡠᠰᡝᠴ ᡳᠮᡠᠰᡝᡩᡝ
Greater Oriental Empire | Greater East Asian Empire
천황기
국기 국장
八紘一宇 (はっこういちう)
팔굉일우 (온 천하가 하나의 집안이다)
국가 海行かば
황실 찬가 君が代
국화 벚꽃
국조 일본 꿩
지도
역사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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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33,152,954km2
수도 우츠노미야 (1857~1860)
교토 (1860~1945)
도쿄 (1945~현재)
최대 도시 도쿄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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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3,033,762,000명
인구 밀도 91.51명/km2
계급 구성 1등 신민 [본토계] 8.45%
2등 신민 [화계] 40.71%
3등 신민 [남방계] 38.58%
4등 신민 [서양계] 10.72%
비신민 1.53%
공용어 일본어
공용 문자 한자, 가나
종교 국교 없음 (명목상)
국가신토 (실질적)
분포 불교 35.3%
이슬람교 5.7%
기독교 2.5%
기타 2.7%
무종교 53.8%[1]
군대 대동아제국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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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전제군주제(명목상), 입헌군주제(실질적), 군사독재정, 황정제 파시즘, 제국주의, 군국주의, 국수주의
국성 야마시타 (山下)
입법부 대동아제국 귀족원 (상원)
대동아제국 중의원 (하원)
대동아 황제 선치제
정부
요인
내각총리대신 야마모토 도모유키
귀족원장 도이하라 아키라
참의원장 오카다 타다미치
집권 여당 제국안정회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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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시장 경제
GDP
(PPP)
円154,721,862,000,000 | 세계 1위
1인당 円51,000
GDP
(명목)
円136,519,290,000,000 | 세계 1위
1인당 円45,000
통화 대동아 엔 (円)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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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형 SI 단위
법정 연호 대동아제국 황력
ccTLD
.東亜
국가 코드
大東亜, 245

개요


昨日は極東の中心だった日本が、今は世界の心臓である大東亜帝国に生まれ変わる。
어제는 극동의 중심이었던 일본이, 이제는 세계의 심장인 대동아제국으로 거듭난다.
[2]
성종 융창제, 1945년 9월 2일 대동아 전쟁 승전 연설 中

동아시아, 오세아니아 및 남북아메리카에 위치한 황제국이다.

상세

공식 국명은 대동아제국(大東亜帝国, 구자체로 大東亞帝國)이며, 약칭은 대동아(大東亜) 혹은 동아제국(東亜帝国)이다. 수도와 최대 도시는 대동아제국 황제의 어소가 위치한 제도(帝都) 도쿄이다. 인구는 30억 3,376만명이고 공용어는 일본어, 공용 문자는 가나한자, 국교는 국가신토이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오랜 쇄국을 끝냈다. 이후 1857년, 급진 개화 정책을 지지하던 군인 야마시타 쿠로가네가 일으킨 정변을 통해 천황제가 폐지되고 황제 제도 하에서의 대일본제국이 건국되었다. 이후 일본은 급격한 서구화 및 근대화의 과정을 밟았다. 대일본제국군이 창설되어 동아시아 최초의 서양식 군대로 거듭났고 경제도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임에 따라 눈에 띄게 발전했다. 또한 정이대장군 제도를 폐지하고 천황 중심의 전제군주제적 정치 개혁을 이루어냈다. 이후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통해 대만, 조선 등 주변 국가들을 합병하였고, 1912년에는 청나라의 붕괴를 틈타 만주를 자국의 영향권 아래에 두었다. 1920년부터 1933년까지 13년간 중국과 전쟁을 치뤄 중국을 자국의 식민지로 합병하였다. 현재와 같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판도가 구성된 것은, 미국 및 영국과의 대동아 전쟁으로 아메리카 대륙 서부, 동남아시아 및 오세아니아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받고, 1950년대 극동전쟁을 통한 소련과의 강화 조약으로 시베리아 지역을 손에 넣으면서이다.

대동아제국은 전제군주제 국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군부의 힘이 매우 강력하므로 황제의 권한은 제한적이다. 명목상으로 의원내각제가 추구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부가 이끄는 제국안정회의 초우위 체제가 2019년 순치 반정 이후 지속되고 있다. 사회 분위기는 제국주의, 국수주의, 전체주의적인 정치 상황으로 인해 매우 경직되어있다. 그러나 매우 강력한 군사력 때문에 식민지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 등은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치안과 대내적 상황이 안정되어있다. 이와 별개로 문민통제파와 군 내 개혁파, 군 내 보수파의 갈등으로 인해 내부 정치 상황은 혼란스럽다.

경제적으로는 전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제 대국이다. 국제통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대동아 엔의 발행국이기도 하다.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 군사적으로 모두 다른 나라에 비해 우위에 있는 극초강대국이다. 인도, 미국, 캐나다 등 수많은 국가들이 현재 대동아제국으로부터 직간접적인 내정개입을 받고 있는 속국이기에 대동아제국은 단순한 자국의 국력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외교 및 군사력을 행사하고 있다.

상징

국호

대동아제국의 언어별 국호
일본어 大東亜帝国 (구자체 大東亞帝國)
조선어 대동아제국
중국어 大東亞帝國
만주어 ᠪᡝᠮᡠᠰᡝᡳ ᠮᡠᠰᡝᠪᡝᠮᡠᠰᡝᠴ ᡳᠮᡠᠰᡝᡩᡝ
몽골어 ᠡᠢᠣᠭᠤᠥᠦ ᠳᠶᠬᠷᠵᠬ ᡀᠯᠹᠴᠴ
영어 Greater Oriental Empire, Greater East Asian Empire
프랑스어 Grand Empire d'Orient
러시아어 Великая Восточная Империя
스페인어 Gran Imperio Oriental
인도네시아어 Kekaisaran Oriental Raya
네덜란드어 Groter Oosters Rijk
독일어 Großorientalisches Kaiserreich
인도어 ग्रेटर ओरिएंटल एम्पायर
아랍어 الإمبراطورية الشرقية الكبرى

대동아제국의 본 국호는 대일본제국(신자체 大日本帝国 / 구자체 大日本帝國)으로, 1945년 9월 2일 융창제의 대동아제국 선포와 함께 국호가 바뀌었으나 여전히 비공식적으로 일본제국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인다. 그러나 대동아 정부와 황실에서는 모든 동아시아 민족들이 함께 발전하는 국가를 모토로 내세우고 있으므로, 일본보다는 대동아제국이 더 대동아의 핵심적인 가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어 원어로는 다이토우아테이고쿠(Daitōateikoku)라고 하며, 중국어로는 大東亞帝國(따똥야띠구어, Dà dōngyà dìguó), 영어로는 Greater Oriental Empire(그레이터 오리엔털 엠파이어), 프랑스어로는 Grand Empire d'Orient(그렁 뎀피에르 도리엉), 독일어로는 Großorientalisches Kaiserreich(그로쓰오리엔탈리셰스 카이저라이히)라고 한다.

약칭으로는 보통 대동아(大東亜, 다이토우아) 혹은 동아(東亜, 토우아)라고 하며 혹은 옛 국호인 일본(日本, 니혼)이라고 쓰기도 한다. 서구권에서 보통 Oriental Empire 또는 Japan이라고 하면 대동아제국을 가리킨다.

한편 중화민국 지하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본공산당 등 대동아제국의 전복을 목표로 활동하는 반정부 조직들은 대동아제국에 대한 멸칭 표현으로 동귀(東鬼), 동제(東帝)라는 표현을 즐겨쓰며 가장 대중화된 멸칭은 일제(日帝)이다.

국기

대동아제국의 국기는 욱일기이다. 욱일승천기로 잘못 알려져있기도 하나 공식 명칭은 욱일기로, 7세기부터 사용되어온 유서깊은 문양인 욱일 문양을 깃발로 만든 것이다. 욱일 문양이 깃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로, 20세기에 들어서는 대일본제국군의 상징으로서 쓰이며 대내적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일본의 상징으로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1945년 대동아제국이 선포된 이후, 군대의 상징이었던 욱일기는 국기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기존의 국기로 취급되었던 일장기는 황실기로 급이 한단계 더 격상되었다. 공식 석상에서는 일장기와 욱일기를 둘 다 사용하며 정부 청사, 총독부와 같은 공공 기관에도 두개의 깃발이 나란히 걸려있다. 한편 군대에서는 욱일기만을 사용하며, 황실에서는 일장기만을 사용한다.

국가



대동아제국의 국가는 법적으로 바다에 가면(海行かば)으로 정해져있다. 흔히 국가로 알려진 기미가요(君が代)는 황실 찬가로, 제2 국가의 지위를 가진다. 정부와 군대 등 황제가 아닌 국가를 상징하는 노래는 "바다에 가면"이고, 황제 개인의 찬가는 "기미가요"인 것이다.

그러나 대동아제국의 헌법상 황제는 국체(國體)이자 제국 그 자체이기 때문에, 황제 개인의 찬양이 제국 전체에 대한 찬양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로도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국가를 부를때에는 "바다에 가면"과 "기미가요"를 동시에 부른다.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을때는, 황제의 직접 발표나 황제 즉위식과 같은 황제와 관련된 일에는 기미가요를 앞에 틀고, 황제와 관련이 없는 일반 전쟁 소식이나 정부 공고 등과 같은 것에는 바다에 가면을 튼다.

황실 행사에서는 기미가요만을 부르며, 나머지 행사에서는 바다에 가면을 먼저 부르고 기미가요를 나중에 부른다. 약식으로 기미가요만을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국가는 "바다에 가면"이지만, 실질적 지위는 "기미가요"가 더 높다.

역사

천무 시대 (1857~1905)

일본이 본격적인 강대국의 길로 걸어선 순간으로, 이 시기에는 에도 막부가 정리되고 서양식으로 제도가 개편되었다. 내각제도가 시행되었으며 군대의 신식화가 이루어졌다. 또한 조선과 대만을 합병하여,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중 최초로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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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선포와 황권 강화

쿠로후네 사건이 발생한 이후, 일본 내에서는 미국과의 개항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 시기로, 천황을 대신해 정이대장군, 즉 쇼군이 정치를 장악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한데 문제는 쇼군이 그다지 정치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제12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미국이 떠난지 2주만에 급사하자,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제13대 쇼군의 직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병약하고 발달 장애가 있었으므로 정상적인 쇼군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쇼군의 권력은 저하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개혁을 추구하는 여러 목소리가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아시카가(足利) 번 출신의 젊은 무사인 야마시타 쿠로가네는 군대를 일으켜 간토 지역의 번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 이후 천무 유신이라 불리는 군사정변을 일으켜, 에도와 교토를 점령하고 도쿠가와 이에사다 쇼군을 시해하고 고메이 천황을 폐하였다. 천황제도를 폐한 이후 그는 직접 대일본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대일본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연호를 천무로 하였으며, 여러 중국식 제도를 받아들여 일본 개혁에 나섰다. 그의 천황제 폐지와 칭제는 당대 일본 열도의 주요 정치 세력에게 매우 충격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곧바로 유신 전쟁이 발발했다. 총 3년간 치뤄진 유신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천무 황제를 따르는 신 일본제국군이 승리하였으므로, 일본 전역의 패권을 천무 황제가 장악하게 되었다.

천무 황제는 급진적인 개혁을 통하여 민중들의 인기를 얻는 한편 자신들의 정적을 대숙청했다. 번을 모두 폐지하고 현을 두어 중앙 집권제의 기틀을 다졌고,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였다. 서양의 여러 선진 문물들이 일본으로 수입되었으며, 천무 황제는 이를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하게하여 일본 내에서도 서양에 못지 않은 신식 무기와 제품의 생산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1868년 내각제도를 시행하여 귀족들에 한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선거를 실시하여, 의회인 중의원을 구성하고 내각총리대신을 선출했다. 또한 국가신토를 공식적인 국가의 사상으로 선포하여 황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대외 팽창 정책 : 대만과 조선의 합병

조선총독부 (1900~1945)

천무 황제 시대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 정책이 추구되었다. 홋카이도와 류큐를 복속 시킨 것이 이때이며, 조선과 대만과 같이 발전에서 도태되어있던 국가들을 식민지화시키는 것 역시 시행되었다. 이는 당시 대영제국, 미국, 프랑스 등 여러 열강들이 추구한 제국주의적인 대외 정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대만의 식민지화는 1892년부터 진행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과 대만에 양쪽 모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대일본제국에게 있어서 청나라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1892년부터 일본은 조선과 대만 인근에 군대를 배치하여 조선 및 대만의 합병 야욕을 드러냈다. 1894년 조선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일본은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고종의 허가를 받고 조선에 군사를 배치하였다. 이에 반발한 청나라는 일본을 상대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이유로 전쟁을 선포했으나 도리어 일본에게 패하였으니 이를 제1차 일중전쟁이라고 부른다. 1차 일중전쟁의 결과,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 신세에서 벗어나 일본의 반 식민지가 되었고 대만은 일본에 합병되었다.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내정 간섭은 더더욱 심화되었다. 1897년, 일본은 조선이 자국과의 무역 조약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의 주요 군사 및 관공서를 점거하고 고종으로부터 사실상 조선의 경제를 일본에게 예속시키는 정유각서를 받아내었다. 이후 눈치도 볼게 없게 된 일본은 미국과 프랑스, 영국으로부터 군사적 동맹을 맺는 것과, 인도차이나와 필리핀의 통치권을 영구히 인정하는 조건 하에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1900년 조선을 완전히 일본에 복속시켰다. 이로서 단숨에 일본의 영역은 일본 열도에서 류큐, 대만, 조선으로 넓혀졌다.

의성 시대 (1905~1930)

선황제와 마찬가지로 대외 팽창 정책이 주를 이뤘으며,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일중전쟁을 통해 영토를 비약적으로 넓혔다. 특히나 일본 최대의 식민지인 중국이 일본으로 귀속된 것이 이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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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 팽창과 대내 정책 수정

1905년, 천무제는 79세의 고령의 나이였기에 이를 이유로 자신의 장남인 야마시타 히로유키에게 황위를 물려줬으니, 그가 바로 대일본제국 제2대 황제인 신종 의성제이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자 중화 대륙은 혼란에 휩쌓였다. 이 혼란의 틈을 타 대일본제국은 군대 15만명을 만주에 급파하여 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점거하고, 만주를 자국의 영향력 하에 두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군벌들과의 산발적인 교전이 지속되고 있었으므로 만주 지역을 완전히 점거한건 아니었다. 이 당시에는 단지 만주를 자국의 영토라고 선포만 한 상태였고 실질적으로 만주가 일본의 영토가 된 것은 1917~1918년 경이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여기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대일본제국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독일을 공격하였다. 당시 독일의 식민지였던 태평양 열도의 섬들을 공격했다. 동시에 칭다오, 산둥반도 등에서도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는데 이는 현지인들과의 갈등을 초래하여 후대의 제2차 일중전쟁에 영향을 주었다. 1918년 독일이 항복한 이후, 일본은 베르사유 강화 회의에 참석하여 독일령 태평양 및 중국 식민지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하였다.

1919년에는 기미년 만세 사태가 있었다. 1900년 멸망한 조선의 군주였던 고종이 1919년 사망했는데, 이에 관해 일본이 고종을 독살한 것이라는 음모론이 돌았다. 이에 분노한 조선의 민중들이 1919년 3월 1일 조선 내 최대 도시인 경성 및 주요 도시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친 것이다. 시위는 1달만에 진압되었으나 조선인 수백만이 참여한 시위는 일본 정부에 충격을 주어, 일본 정부가 각 식민지에서 무력이 아닌 점진적인 동화 통치로 노선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일중전쟁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1920년에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산둥반도가 일본에게 넘어간 것에 관련해 현지인과 일본 정부의 갈등이 있었다. 중국인들은 산둥반도를 일본의 땅으로 인정하지 않고 일본의 관청을 습격하고 일본군에 돌은 던지는 등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였다. 이것이 외교적 문제로 번져, 일본은 산둥반도의 일본인들과 일본군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중화민국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제2차 일중전쟁이다.

초반에는 중화민국이 각종 군벌들의 분열로 인해 오합지졸인 상태였기에, 중화민국의 명목상 수도였던 베이징이 단 5개월만에 일본군의 손에 들어오고 남경, 상해 등 대부분의 도시들이 일본군에 함락되는 등 승리가 눈 앞에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절대로 중국을 일본에게 넘길 수 없다는 구호 아래에 주요 군벌들이 단합해 일본에 맞섰고, 이에 따라 일본은 상대적으로 초기의 기세에 비해 분전하였다.

그러나 전선이 밀고 밀리는 고착 상태로 된 것을 제외한다면 이미 주요 도시들은 일본의 손에 넘어가있던 상태였으므로, 점차적으로 중화민국군은 일본군에 밀리는 상태였다. 신종의 퇴위 이전에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신종의 퇴위 당시에는 대부분의 중화민국군이 일본에게 정리된 상태였고 전쟁이 5년 안에는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1930년 신종은 고령을 이유로 황위에서 물러났다. 신종의 슬하에 딸밖에 없었던 관계로, 황위는 그의 동생이자 황태제였던 야마시타 요시노부에게 넘어갔다.

장의 시대 (1930~1934)

장의제는 단 4년밖에 즉위하지 않은 관계로, 많은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으나, 제2차 일중전쟁을 적절하게 마무리하면서 대동아 전쟁으로 가는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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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전쟁의 마무리

태종 장의제는 1930년 즉위해 1934년 승하할때까지 단 4년밖에 즉위하지 않았으므로, 치적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1933년 제2차 일중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일중전쟁의 막바지 과정을 처리하고 전후 중국을 정리하는데에 큰 업적을 남겼다.

1933년 중국 국민당군은 대일본제국군에 항복하였다. 중화민국과 대일본제국은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북경에서 조약을 맺었다. 중화민국은 대영제국과 인도제국의 관계에서 본따 국체만이라도 남겨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태종과 군부 관계자, 내각은 이를 거부하고 중국을 일본에 합병시켰다. 몽골과 티베트는 독립국으로서 자치권을 보장받았지만 일본의 총독이 파견되고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일본에 종속되어있었으므로 식민지나 다름이 없었다.

중국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동을 일으키는 일부 중국인들이 있었으나, 일본군의 발빠른 대처 속에서 이들의 반란은 쉽사리 진압되었다. 또한 중국에 기반을 두고 있던 조선 독립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주요 조선 독립 조직들도 인도차이나 반도로 이주하게 되어, 식민지 조선 내의 치안은 안정될 수 있었다.

1934년, 태종은 간암으로 인하여 6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태종의 장남이었던 야마시타 고리유키가 대일본제국의 제4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융창 시대 (1934~1987)

보통 대부분의 대동아제국 신민들이 융창 시대를 최고의 성군 시대로 여긴다. 청나라의 강건성세나 당나라의 정관지치, 한나라의 문경지치에 비견된다. 일본의 4대 대외 팽창 전쟁중 3개인 대동아 전쟁, 극동 전쟁, 아프리카 해방 전쟁이 모두 융창제의 치세에 일어났고 이 전쟁들을 통해 대동아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일본은 극초강대국으로 거듭났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대동아 사회투쟁을 통해 군정이 종식되고 민정이 자리잡았으며 1980년대에는 이러한 번영이 꽃을 피워, 대동아제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 성대가 개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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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 전쟁

일본은 제2차 일중전쟁의 수혜를 입어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을 빗겨나갈 수 있었지만, 1933년 전쟁이 끝난 이후 전시경제 체제가 해체됨에 따라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새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터진 공황은 일본의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였으며 이는 내부 정치적으로 내각의 힘이 약화되고 군부가 압도적인 힘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미국은 일본의 영토 팽창과 군비 확충을 경계하여 대일본 석유 수출 제한령을 선포했다. 일본은 중국 유전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1934년 당시 중국산 석유가 일본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16%에 불과했고, 나머지 84%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중 75%가 미국산 석유였다. 당연히 이는 일본에게 있어서 반미 감정을 증폭시켰고, 군부가 민중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대미 전쟁을 준비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일본 내에서는 미국, 프랑스, 영국과 전쟁을 한다면 이길 수 있을리가 없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인구 8억에 달하는 중국이라는 강력한 식민지를 확보한 일본은 몇년간 열심히 준비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주장이 여론의 주류를 차지했다. 이에 따라 융창제와 군부, 내각의 강력한 주장 하에, 중국조선, 만주, 대만 식민지에서 철광, 은광, 유전이 대대적으로 개발되고, 수많은 군함들과 전차가 생산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석유 수출 제한령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대공황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할 수 있었으며, 미국 및 영국, 프랑스와 대적할만한 충분한 전력을 갖추는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긴장된 상태로 지속되던 1938년 7월 30일, 필리핀의 미국 주둔군이 훈련중이던 일본 전투기를 오인 격추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은 이를 미국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필리핀과 하와이, 알래스카 전역에서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시작했다. 3일 이후, 프랑스와 영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했고 이에 따라 대동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호주 전역의 사진 (1942년 1월)

대동아 전쟁 초기에 일본은 홍콩을 6일만에, 인도차이나를 단 26일만에 점령하고, 태국을 동맹국으로 삼아 버마와 말레이시아,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대공세를 전개했다. 동시에 필리핀 상륙 작전이 이뤄져 1938년 10월 1일 필리핀을 점령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포로로 잡았다. 싱가포르는 1938년 10월 12일에, 양곤은 1938년 12월 7일에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일본군의 파죽지세 진격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주요 정부 요인들이 네덜란드 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정부 자체는 1939년 1월 3일 일본제국군에게 항복했다.

태평양에서는 일본이 막강한 해군력을 토대로 미군의 패권 하에 있던 주요 섬들을 함락시켰으나, 미국 본국의 막강한 생산력으로 인하여 의미 있는 진격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본래 붙들고 있던 중국과, 새로 복속시킨 필리핀 식민지는 미국과의 전력 차이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39년 5월 3일 레이테 만 해전에서 필리핀 상륙을 시도한 미국이 일본군에 의해 분쇄되었고 1939년 10월 1일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이 항공모함 5척이 침몰하는 대패를 입었다. 이후 해상 재해권은 일본제국 해군에게 떨어져, 1940년 2월 18일 하와이에 일본군이 상륙하였다.

1940년 5월 태평양 전역의 해상 패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이후,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두고 미국과 일본의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미국 내에서는 강화를 맺어야한다는 여론도 거셌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강화 제안을 거부하고 일류샨 열도를 통해 1941년 6월 12일 알래스카에 상륙하면서 아메리카 본토 상륙 작전을 진행하였다. 비슷한 시기 일본 해군에 의해 1941년 7월 30일, 캘리포니아 및 브리티시 컬럼비아에서도 상륙작전이 진행됨에 따라, 1941년 연말과 1942년 연초에 미국군과 캐나다군은 아메리카 대륙 서부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다.

미군과 캐나다군은 아메리카 반도 본토에서 항전을 계속했으며 남아메리카 국가들 역시 미국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1943년 남아메리카 전체가 브라질을 마지막으로 일본에 의해 함락된 이후, 1943년 7월에는 미니애폴리스가 일본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1944년 2월에는 에드먼턴과 댈러스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미군은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결사항전을 계속하였지만 이 역시 얼마 가지 못했다. 일본제국은 1940년부터 중화 본토에서 진행된 핵 무기 실험을 통해 원자 폭탄 개발에 성공한 상태였으며, 1945년 8월 6일 실제로 원자 폭탄이 미국 동부의 대도시인 보스턴에 투하되었고 8월 9일에는 시카고에 투하되었다. 미국 국민들은 절대로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미국 정부는 8월 15일, 일본군에 대한 절대 항복을 선언했고, 9월 2일에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 해상의 야마토 함에서 일본의 융창제에게 항복 문서에 조인함에 따라 미국과 그 동맹국은 일본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대동아제국의 선포

1945년 9월 2일 야마토함에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항복을 받아낸 융창제는 뒤이어 대동아제국을 선포하였다. 대동아제국은 일본이 본래 내세우던 "대동아 공영권"에서 따온 이름으로, 동아시아 민족이 일본의 주도 하에 서양의 세력을 몰아내고 함께 발전한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최대의 서양 세력인 미국과 프랑스, 영국을 모두 몰아내고 동아시아 전역을 재패했으며, 더 나아가 태평양 일대의 패권을 확보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완벽하게 이뤄냈다는 의미에서 자국의 이름을 대일본에서 대동아로 고쳤다.

대동아제국이 건국됨에 따라 대동아제국의 황제로는 자동으로 융창제가 즉위하게 되었고, 제국 수도는 교토에서 제국 최대의 도시였던 도쿄로 옮겨졌다. 또한 중의원과 귀족원에서 새로운 제국 헌법이 제정되어 총 5개의 등급으로 나뉘어진 신민 제도 등이 시행되게 되었다. 대동아제국은 중화 황제국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헌법에 추가되어, 제국의 정통성을 새로이 확립했다.

극동 전쟁

1945년 9월 미국을 굴복시킨 일본이었지만, 북쪽에서는 여전히 국제 사회주의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이 버티고 있었으며, 소련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지하정부 및 일본공산당 등의 세력은 신생 대동아제국에게 있어 판도 유지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에 따라 대동아 정부는 단순히 공산당과 같은 불순 세력을 잡는 것을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본진인 소련을 공격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 몰아내어야 일본과 동아시아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소련 공격을 준비하였다.

소련과 대동아 제국의 국경 분쟁 역시 전쟁을 유발한 요소중 하나였다. 대동아제국은 중화민국을 멸망시킨 이후 중국의 영토 대부분을 영향력 하에 두었지만, 본래 중화민국의 영토였던 몽골과 신장 일대에서는 영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 지역은 제2차 일중전쟁 당시 중화민국의 혼란을 틈타 독립한 지역들로 모두 소련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대동아제국은 일본과 중화민국의 조약을 토대로 몽골과 신장 지역에서의 통치권을 요구했으나 소련은 이를 간단히 무시하고 몽골과 신장에서 독립적인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설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는 1950년대까지 이어지며 대동아와 소련의 전쟁을 야기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대동아 전쟁 종전 7년 이후인 1952년, 대동아제국은 소련의 극동 관구 지역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단 2주만에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등 소련의 극동 지역에 위치한 주요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대동아의 영토로 삼았다. 소련군은 즉각적인 반격 공세에 나섰지만 이미 한번 잃은 파워 밸런스를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으므로, 개전 6개월 이후인 1952년 10월까지 끝을 모르고 계속 일본에게 밀려 결국 바이칼 호수와 투바까지 대동아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소련의 막대한 생산량은 1952년 11월 8일에 있었던 크라스노야르크스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또한 소련의 추운 겨울도 일본을 주춤하게 하여, 1953년 연초에는 다시 몽골과 투바 지역을 소련이 탈환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전열을 다시 갖추고 1953년 봄부터 대공세에 나서 예니세이 강을 넘고, 1953년 가을에 우랄 산맥에 도달했다. 대동아 본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던데다가, 1953년 10월부터 찾아온 추위로 인해 대동아군은 주춤하였으나, 소련은 대동아제국과의 평화 협상에 나설 수 밖에 없을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어있었다.

1953년 11월 2일부터 소련과 대동아제국의 강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협상은 1월 말까지 진행되었으며, 강화협정에 따라 우랄산맥을 경계로 우랄 산맥의 서쪽은 소련의 영토로, 동쪽은 대동아제국 및 대동아의 위성국인 극동 시베리아 공화국티무르 연방 공화국의 영토로 하기로 하였다. 또한 소련은 일본 공산당 및 식민지 독립 운동 단체와의 교류와 지원을 중단하는 대신, 독립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보장받으며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해 일본의 지원을 받기로 하였다.

1954년 2월 1일 최종적으로 강화 회의의 결정안이 공개됨에 따라, 약 1년 반에 걸친 극동 전쟁은 종료되었고 대동아제국이 동아시아 내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해방 전쟁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미국과 같이 완전히 공중분해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영향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인도제국이 일본령으로 떨어졌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인도차이나를 일본에게 내어주어야했다. 따라서 프랑스와 영국은 남은 식민지를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식민지 중심 경제가 한계에 이르며 1960년대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되었다.

프랑스, 영국 정부는 식민지들의 독립을 일부 허가하기도 하였으나 대다수의 식민지가 독립하는 것을 막았으며 이는 포르투갈 등 여타 식민 열강국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동아제국은 이러한 식민지 주민들이 독립하는 것을 돕는다는 명목 하에, 아프리카의 식민지 독립군을 돕는 것으로 시작하였지만, 196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식민지 독립 운동이 활발해지자 군대를 직접 동원하여 아프리카 식민지의 무력 해방을 도왔다. 물론 이는 철저히 서방 제국주의 열강들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려는 야욕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일본이 주력으로 해방시킨 식민지들은 일본이 태평양에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긴 인도양 패권에 맞닿아있는 동아프리카 지역에 집중되어있었다. 1964년 12월 2일 군부대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모잠비크에 투입되어, 모잠비크 해방군과 연합하여 포르투갈군을 몰아내었으며, 이후 1966년 4월 3일 로디지아와 남아프리카 연방의 해방이 마무리될때까지 산발적인 프랑스-포르투갈-영국 당국군과 대동아군의 교전이 있었다. 이러한 교전들을 묶어 아프리카 해방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순한 식민지 해방 운동 뿐만 아니라, 흑인 해방 운동 역시 지원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정책을 타도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를 침공한 것이 있다. 에티오피아 역시 독재 정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목 하에 대동아제국군의 침공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점을 들어, 아프리카 해방 전쟁이 식민지 주민들을 해방시키려는 전쟁이 아니라 단지 서구권에서 식민지를 빼앗기 위해 치룬 또다른 제국주의적 전쟁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전쟁 이후, 마다가스카르를 제외한 모든 구 식민지들은 일정한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물론 이 식민지들은 대동아제국에 귀속된 사실상의 속국이자 제2의 식민지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눈가리고 아웅이자 위선질이라는 서구권의 비판이 거셌다.

비슷한 논리로 일부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성향의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은 대동아제국의 해방 전쟁은 식민지 뺏기 싸움에 불과하다며 대동아제국군에 협조하지 않았으며 1960년대 후반 대동아제국에 의해 구성된 새로운 자치 정부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대동아 사회투쟁

사회투쟁 당시 대동아 국회의사당 앞의 모습

본래 일본과 대동아는 군국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한 나라였다. 초대 황제인 천무제는 하급 사무라이 출신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천황을 폐위시킨 후 스스로 황제에 오른 것이며, 따라서 대동아제국은 그 근본부터 군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천무제 시대에 차등 투표에 따른 대동아제국 중의원과 중의원에서 선출되는 대동아제국 내각이 존재했음에도, 군인의 힘이 더욱 강력하여 내각 총리대신으로 군인이 선출되는 일이 잦았다. 특히나 이런 양상은 대동아제국의 4대 팽창 전쟁인 제2차 일중전쟁, 대동아 전쟁, 극동 전쟁, 아프리카 해방 전쟁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대동아제국군의 거듭되는 승전보는 민중으로 하여금 군부의 지지율을 높였지만, 동시에 숨막히는 군국주의 체제는 제국 신민들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1960년대 후반 아프리카 해방 전쟁이 종료된 시점에서 대동아가 더이상 패권을 확보할만한 영토는 없어보였고, 따라서 대동아제국 민중 사이에서는 군부가 알아서 스스로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민정 내각으로 점진적인 정권 이양을 이루어야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이미 황제의 권력을 넘어섰다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권력이 비대해져있던 군부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1970년 2월 16일, 점진적인 군부의 영향력 축소와 민정 이양을 촉구하는 평화로운 집회가 제도 도쿄에서 열렸는데, 군부는 이를 기마 경찰부대를 투입하여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32명의 사망자와 12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군부의 지지율은 대폭락했고 일본 본토 뿐만 아니라 중국, 아메리카, 호주 등 각지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그 틈을 타 4등 신민으로 추락하여 온갖 사회적 멸시를 받던 백인들이 독립 운동을 일으키며 사회적인 혼란이 극대화되었다.

군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더욱 적극적인 사회 통제 정책을 펼 것을 주장하였지만 융창제는 이를 거부하고, 내각총리대신 다나카 요시이를 해임하고 중의원의 제1야당이자, 온건파 자유주의 정당인 대동아 민주당의 당수 오쿠보 타다미치를 임시 총리로 임명하였다. 또한 차등 투표제를 없애고, 제1신민과 제2신민, 제3신민 그리고 제4신민에 따른 차등만이 존재할 뿐 귀족과 평민, 빈자와 부자 사이에 그어떠한 차등도 없는 보통 선거를 실시하도록 명령하였다. 황제의 이러한 파격적인 개혁에 군부는 결사 반대하였지만 법적으로 황제의 어명은 의회나 군부의 결정보다 위에 있었으므로, 위로부터의 개혁이 즉각적으로 실시되었다.

황제가 이례적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것인 자신의 황권을 위협할정도로 성장한 군부를 숙청하고 비교적 온건한 근황파 민정 내각을 두어 자신의 황권을 복구시키려는 의도였다는 설이다. 어찌되었간데 결과적으로 군정의 민정 이양을 촉구한 민중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셈이었으므로 집회는 대부분 정리되었고 급진적인 식민지 독립 운동은 절대 다수 신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체 진압되었다.

1970년 8월 20일, 첫 총선에서 중도 좌파 성향의 대동아 민주당이 263석을, 중도 우파 성향의 대동아 자유당이 206석을 얻음에 따라 대동아제국 역사상 최초의 민정 내각이 수립되었으며, 군부의 지지를 받던 보수파 황국안민회는 43석을, 진보파 화평정우회는 12석을 얻는데 그쳤다. 선거 결과에 따라 군부는 지지를 잃었고 황제와 민중의 지지를 받은 중도파 양대 민정 정당이 거국내각을 구성했다.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에도 대동아제국 내에서는 사회 운동이 지속되었다. 계급제적인 요소가 대부분 철폐되어, 출신 지역과 신분에 따라 결정되던 온갖 복잡한 신분제는 혈통에 따른 귀족-평민의 2계급, 그리고 출신지에 따른 1신민-2신민-3신민-4신민으로 정리되었다. 또한 권위주의적인 군부 문화를 청산하자는 가치 아래에 학교에서의 체벌 지양 풍조도 등장했다. 이러한 운동은 1971년 1월까지 이어졌으며, 71년 1월 이후에도 이런 개방적 사회 풍조가 이어져 대동아제국의 사회가 크게 변모하는데 일조하였다.

4대 전쟁과 뒤따른 사회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대동아제국은 1980년대 후반까지 최대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를 통틀어 "융창성세"라고 한다. 청나라의 강건성세에 못지 않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안정기로, 대동아제국은 신분과 출신지에 따른 일부의 차이가 있긴 하지였지만 전반적으로 크게 발전하여 새로운 극초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1987년, 총 40년간 재위했던 융창제는 지병으로 쓰러져 붕어하였다. 황위는 그의 첫번째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야마시타 류타로가 이었다.

성건 시대 (1987~1994)

고착화된 내각제

거듭되는 경제 위기

지순 시대 (1994~1996)

지순 헌정 위기

태정 시대 (1996~2016)

내각의 권한 축소와 군국주의화

태정 비신민 정리 사업

강화된 사회 통제 정책

태의 시대 (2016~2019)

선치 반정

선치 시대 (2019~ )

개혁파 군부의 집권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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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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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가신토는 명목상으로 종교가 아닌 사상이기 때문에 종교로 집계되지 않는다. 국가신토와 불교를 둘 다 믿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2. 번역기를 돌린 것이기 때문에 더 나은 번역이 있다면 관련 전공자들이 추천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