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신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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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의 국호로서 "대한"은 1897년 [[광무 황제 (신한국)|광무 황제]]가 [[대한제국 (1897-1910)(신한국)|대한제국 (1897-1910)]]을 선포하면서 다시 선택한 것으로 새 국호를 정한 이유를 "조선이라는 이름은 기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은데, 한(韓)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이름이며 삼국시대의 세 국가를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므로 "큰 한"이라는 이름이 적당하다"고 밝혔다.
근대 국가의 국호로서 "대한"은 1897년 [[광무 황제 (신한국)|광무 황제]]가 [[대한제국 (1897-1910)(신한국)|대한제국 (1897-1910)]]을 선포하면서 다시 선택한 것으로 새 국호를 정한 이유를 "조선이라는 이름은 기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은데, 한(韓)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이름이며 삼국시대의 세 국가를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므로 "큰 한"이라는 이름이 적당하다"고 밝혔다.


대한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대한제국 (1897-1910)(신한국)|구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바뀌면서 [[일본령 조선 (신한국)|일본령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바뀜과 동시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1928년]], 해방으로 인해 [[대한국 (신한국)|대한국]]이 선포되면서 다시 사용되었다. 이후 [[1929년]] [[한성 쿠데타 (신한국)|한성 쿠데타]] 이후 왕정복고되면서 "신대한제국", "대한제국", "신한국"이 선포된다.
대한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대한제국 (1897-1910)(신한국)|구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바뀌면서 [[일본령 조선 (신한국)|일본령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바뀜과 동시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1928년]], 해방으로 인해 [[대한국 (신한국)|대한국]]이 선포되면서 다시 사용되었다. 이후 [[1929년]] [[한성 진군]] 이후 왕정복고되면서 "신대한제국", "대한제국", "신한국"이 선포된다.


[[일본 (신한국)|일본]], [[중화민국 (신한국)|중화민국]], [[베트남 (신한국)|베트남]] 등 주로 동아시아에 있는 [[한자 문화권]] 국가들에서도 일상에서 대한제국을 간단히 한국({{Zh|s=韓國|한궈}}, <small>[[주음 부호]]:</small>ㄏㄚㄋㄍㄨㄛ<small>한궈</small>, {{llang|Ja|韓国|간코쿠}}, {{Vie|v=Hàn Quốc|pr=한 꾸옥}})이라 부른다.
[[일본 (신한국)|일본]], [[중화민국 (신한국)|중화민국]], [[베트남 (신한국)|베트남]] 등 주로 동아시아에 있는 [[한자 문화권]] 국가들에서도 일상에서 대한제국을 간단히 한국({{Zh|s=韓國|한궈}}, <small>[[주음 부호]]:</small>ㄏㄚㄋㄍㄨㄛ<small>한궈</small>, {{llang|Ja|韓国|간코쿠}}, {{Vie|v=Hàn Quốc|pr=한 꾸옥}})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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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신한국)}}
{{한국사 (신한국)}}
{{본문|대한제국의 역사 (신한국)}}
{{본문|대한제국의 역사 (신한국)}}
=== 조선 독립 전쟁 ===
{{본문|조선 독립 전쟁 (신한국)}}
[[1928년]] [[6월 16일]], [[일본 제국 (신한국)|일본 제국]]에서 내전이 발발한다. [[일본 제국 (신한국)|일본 제국]]에서 내전이 발발함에 따라 식민지와 중국에 대한 감시가 약해짐에 따라 [[난징 국민정부 (신한국)|난징 국민정부]]와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의 지원을 받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신한국)|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한국 광복군 (신한국)|한국 광복군]]이 독립 전쟁을 일으킨다. [[심양 전투 (신한국)|심양 전투]]와 [[대련 전투 (신한국)|대련 전투]]에서 [[관동군 (신한국)|관동군]]을 궤멸시킨 후, [[1928년]] [[8월 16일]], [[서울 진공 작전 (신한국)|서울 진공 작전]]을 개시한다. [[8월 31일]]에 [[경성부 (신한국)|경성부]]가 함략당했으며, [[9월 1일]]에 [[대한국 (신한국)|대한국]]의 독립이 선포된다. [[9월 3일]], [[부산부 (신한국)|부산부]]에서 [[부산 조약 (신한국)|부산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독립이 성취되었다.
=== 대한국 ===
{{참고|대한국 (신한국)|제1회 대한국 총선 (신한국)|한성 쿠데타 (신한국)}}
[[부산 조약 (신한국)|부산 조약]]으로 [[일본 제국 (신한국)|일본 제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결집되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신한국)|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부의 여러 사상에 의해 [[대한국 (신한국)|대한국]] 정부는 분열된다. [[1928년]] [[10월 1일]], [[제1회 대한국 총선 (신한국)|제1회 대한국 총선]]이 치뤄졌으나, 헌법 제정은 국회 내 대립으로 인해 1달 동안 지지부진 되었다. [[11월 1일]]이 되어서 드디어 [[대한국 헌법 (신한국)|대한국 헌법]]이 선포되었으나, 국회 내 좌우 대립은 여전했다. 국회 내 좌우 대립으로 인해 문제들이 계속 발생했으며, 국민 또한 분열되었다.
[[9월 3일]] 창설된 [[대한군 (신한국)|대한군]] 군부는 우파의 비중이 압도적이였으며, [[조선 공산당 (신한국)|조선 공산당]]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이 다수였다. 이에 [[1929년]] [[1월 16일]], [[경성부 (신한국)|경성부]]에서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한다. [[한성 쿠데타 (신한국)|경성 쿠데타]]는 성공적이였으며, 국회는 폐회되고 정부는 군부에 의해 점거된다. 쿠데타 성공 이후 군부 내에서는 [[독재파 (신한국)|독재파]]와 [[왕정복고파 (신한국)|왕정복고파]] 간의 의견 대립이 있었으나, [[왕정복고파 (신한국)|왕정복고파]]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1월 18일]], "신대한제국"이 선포된다. 군부는 [[신주 황제 (신한국)|의친왕]]을 왕으로 옹립하였으며, [[신주 황제 (신한국)|의친왕]]은 [[신주 (연호)(신한국)|신주]] 원년 [[1월 21일]] 즉위한다.
=== 개혁과 봉천과의 갈등 ===
{{참고|무진 개혁 (신한국)|양무 계획 (신한국)|제1차 신주 계획 (신한국)}}
[[1929년]] [[1월 23일]], 정치, 행정, 제도, 군대, 교육 등 여러 방면의 근현대적 개혁을 목표로 하는 [[무진 개혁 (신한국)|무진 개혁]]안이 발표된다. 대부분의 부분이 [[독일 제국]]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으며, 일부분에서 독자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1월 28일]]에는 과거 [[십삼도제]]에서 [[여순도 (신한국)|여순도]]를 추가한 [[십사도제 (신한국)|십사도제]]가 발표되었다. [[4월 15일]]에는 [[대한제국 (1897-1910)(신한국)|구대한제국]]의 최초의 근대적 군함인 [[KIS 양무 (신한국)|KIS 양무]]의 이름 딴 해군 증강 계획인 [[양무 계획 (신한국)|양무 계획]]이 발표된다.
대한제국은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과 건국 이전부터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 붕굉 이후까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조선 독립 전쟁 (신한국)|조선 독립 전쟁]]에서 [[동북역치]]로 인한 여러 도움을 받았으나, [[황고둔 사건 (신한국)|황고둔 사건]] 이전까지 [[일본 제국 (신한국)|일본 제국]]과 친선을 유지하며 [[간도 (신한국)|간도]] 내 한국인을 박해했던 것과 대한제국의 [[간도 (신한국)|간도]]의 영유권 주장, [[여순항 (신한국)|여순항]] 소유 등이 그 이유였다.
[[1929년]] [[4월 26일]], [[경흥군 (신한국)|경흥군]]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신한국)|소련]]의 지원을 받을 [[조선 공산당 (신한국)|조선 공산당]]이 봉기를 일으킨다. 봉기는 하루만에 진압되었으나, 다음날인 [[4월 28일]], [[조선 공산당 (신한국)|조선 공산당]]을 금지함과 동시에 [[공산주의]] 정당 자체를 금지한다. 이후 [[1929년]] [[5월 1일]], [[제1회 대한 제국의회 선거]]가 치뤄졌으며, [[5월 4일]] [[제1회 대한 제국의회]]의 개회가 선포된다.
[[1929년]] [[3월 23일]],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여순항 (신한국)|여순항]]에서 [[동북군 (신한국)|봉군]]과 [[대한제국군 (신한국)|대한제국군]] 간의 교전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 대한제국은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에 이를 항의하였으나,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은 [[여순 (신한국)|여순]]에 대한 대한제국의 불법 점거를 규탄하였다.
=== 제1차 한봉 전쟁 ===
{{본문|제1차 한봉 전쟁 (신한국)}}
{{참고|봉소 전쟁|제1차 황초평 전투 (신한국)|대련 국경 전투 (신한국)}}
[[1929년]] [[5월 19일]],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의 수장인 [[장쭤린 (신한국)|장쭤린]]이 사망한다. [[장쭤린 (신한국)|장쭤린]] 사망 후 [[장쉐량 (신한국)|장쉐량]]이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의 수장이 되었다.
[[1929년]] [[7월 10일]], [[장쉐량 (신한국)|장쉐량]]의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신한국)|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소유하던 [[동청 철도 (신한국)|동청 철도]](중동철도)를 회수한다.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이 [[동청 철도 (신한국)|동청 철도]]를 회수한 다음날, [[중화민국 (신한국)|중화민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신한국)|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단교를 취한다. 단교 이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신한국)|소련]]은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에 대한 군사적 활동을 개시하였고, 두 국가 사이의 무력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과 건국 이후부터 마찰을 빚고 있던 [[대한제국 (신한국)|대한제국]]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신한국)|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에 대한 군사적 행동이 진행되고 두 국가 사이의 갈등이 발생할 것으로 보이자, 두 강대국에게서 국가를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총동원령을 선포해 언제든지 전쟁에 끼어들 수 있게 준비하였다. 이에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은 규탄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신한국)|소련]]은 어떠한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1929년]] [[9월 19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신한국)|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게 된다. [[9월 26일]], [[대한제국군 (신한국)|대한제국군]]의 선공으로 [[대련부 (신한국)|대련]]에서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군]]과 [[대한제국군 (신한국)|대한제국군]]의 국경전투가 발생한다. 대한제국은 이를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의 선제 공격으로 인한 전투라 주장했다.
[[대련 국경 전투 (신한국)|대련 국경 전투]]가 [[대한제국 (신한국)|대한제국]]의 승리로 돌아가자,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에 대한 승리를 확신한 대한제국은 [[9월 30일]], [[간도 (신한국)|간도]] 내 한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의 국경을 침범, 이에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은 대한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10월 4일]],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의 선공으로 [[압록강 전투 (신한국)|압록강 전투]]가 발생한다. 전투는 숫적으로 우세한 [[대한제국군 (신한국)|대한제국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으며, 점차 방어전에서 공격전으로 바뀌었다. 대한제국은 [[단둥부 (신한국)|단둥]]을 [[10월 8일]]에 점령함으로써 전투는 대한제국의 승리로 끝난다. [[압록강 전투 (신한국)|압록강 전투]] 이후 대한제국은 서부에서 발생한 여러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여 점차 진격하였다. [[10월 12일]], 대한제국은 [[연변부 (신한국)|연변]]으로 진격을 개시한다. 산악병과 경보병을 이용하여 산악을 통해 [[연변부 (신한국)|연변]]으로 침투하였고, 이후 본대를 통해 [[연변부 (신한국)|연변]]을 점령해 나간다. 이미 침투한 부대들은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군]]의 후방을 교란했으며, 본대는 그 틈에 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1929년]] [[11월 4일]], 양면 전선에 부담을 느낀 [[봉천 군벌 (신한국)|봉천 군벌]]은 대한제국과 [[단동 (신한국)|단동]]에서 의정서를 체결한다. [[단동 의정서 (신한국)|단동 의정서]]에 의해 대한제국은 [[대한제국 (1897-1910)(신한국)|구대한제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던 [[간도 (신한국)|간도]] 일대와 [[대련만 (신한국)|대련만]] 이남의 [[대련부 (신한국)|대련]]를 획득하게 된다.
=== 남방 식민지 ===
{{참고|오사카-교토 봉기 (신한국)|유구 독립 전쟁 (신한국)|대한령 대만 (신한국)|유구국 (신한국)|대한-유구 조약 (신한국)|남양 군도 (신한국)|대마시 (신한국)}}
[[1930년]], [[일본 (신한국)|일본민주국]]의 정치는 점차 불안정해져갔다. 내부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증가하고 있었으며, 외부에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1930년]] [[4월 1일]], [[오사카부 (신한국)|오사카]]와 [[교토부 (신한국)|교토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봉기가 발생한다. 봉기는 점차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이에 [[일본 (신한국)|일본]]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면서 강경하게 진압을 해나갔다. 그러나 봉기는 쉽사리 진압되지 못하고 장기전으로 지속되었다.
[[오사카-교토 봉기 (신한국)|일본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봉기]]가 발생하자, [[4월 18일]]에 [[오키나와현 (신한국)|오키나와현]]에서 급진 독립 단체에 의해 [[유구 독립 전쟁 (신한국)|유구 독립 전쟁]]이 발생한다. 이에 [[일본 (신한국)|일본]] 정부는 [[4월 21일]]에 [[유구국 (신한국)|유구국]]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유구국 (신한국)|유구국]]은 쉽게 독립을 쟁취한다. [[1931년]] [[6월 13일]], [[유구국 (신한국)|유구국]]은 [[오사카-교토 봉기 (신한국)|오사카-교토 봉기]]가 종결된다면 [[일본 (신한국)|일본]]이 다시 유구를 재침공할 것이라 생각하여 대한제국과 보호 조약을 체결한다. 이로 인해 [[유구국 (신한국)|유구국]]은 대한제국의 보호국이 되었으며, [[대한제국군 (신한국)|대한제국의 군대]]가 유구 내에 진주하게 된다.
[[오사카-교토 봉기 (신한국)|오사카-교토 봉기]]로 인해 [[일본 (신한국)|일본민주국]]은 [[일본령 대만 (신한국)|일본령 대만]]을 해체시켰고, [[대만 공화국 (신한국)|대만]]은 갑작스럽게 독립을 얻게된다. 그러나 독립 이후 [[대만 공화국 (신한국)|대만 공화국]]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불안정해 점차 민심을 잃어갔다. [[제1차 한봉 전쟁]]의 승리로 팽창주의적 정책을 펼치던 대한제국은 [[1930년]] [[9월 23일]], 대만을 침공한다. 대한제국은 [[타이베이시 (신한국)|타이베이시]]에 무혈입성하였으며, 다음날인 [[9월 25일]], [[대만 공화국 (신한국)|대만 공화국]]은 대한제국에 항복한다. [[대만 공화국 (신한국)|대만 공화국]]의 항복 이후 대만 내에서는 어떠한 저항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대만인들은 순순히 [[대한령 대만 (신한국)|대한령 대만]] 정부를 인정한다.
[[1931년]] [[8월 4일]], [[국제연맹 (신한국)|국제연맹]]은 [[남양 군도 (신한국)|남양 군도]]의 수임국인 [[일본 (신한국)|일본]]의 국내가 혼란스러워 통치가 제대로 되지 않음을 확인하여 [[일본 (신한국)|일본]]에게서 [[남양 군도 (신한국)|남양 군도]]의 수임국의 지위를 빼앗고 대한제국을 수임국으로 지정한다.
[[1933년]] [[10월 3일]], [[일본 (신한국)|일본]]의 [[나고야부 (신한국)|나고야]]에서 [[나고야 봉기 (신한국)|봉기]]가 발생한다. 봉기는 순식간에 [[제2차 일본 내전 (신한국)|내전]]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대한제국은 [[대마도 (신한국)|대마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며 대마도를 침공한다. 이에 [[일본 (신한국)|일본]] 정부는 항의를 했으나, 군사적으로 항의하지는 못했다. [[10월 16일]], [[대마도 (신한국)|대마도]]에 대해 대한제국과 [[일본 (신한국)|일본민주국]]이 조약을 체결한다. [[대한-일본 협정 (신한국)|대한-일본 협정]]으로 [[대마도 (신한국)|대마도]]는 대한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그 대가로 [[일본 (신한국)|일본민주국]] 정부를 일본의 정부로 인정,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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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가 (신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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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7일 (토) 18:35 판


대한
大韓
대한제국
大韓帝國
1929년-현재
국가 애국가
愛國歌
국목 오얏나무
국화 오얏꽃
국조
100%
수도 한성 (북위 37° 35′ 00″ 동경 127° 00′ 00″ / 북위 37.58333° 동경 127.00000° / 37.58333; 127.00000)
최대 도시
면적 1,546,109 km²
(아시아 8위, 세계 20위, 아시아의 3.47%)
대한 황제
1929년 - 1955년 신주 황제
1955년 - 1993년 정안 황제
1993년 - 현재 청천 황제
의정대신
부의정대신
독립 선언 1928년 9월 1일
부산 조약 1928년 9월 3일
한성 쿠데타 1929년 1월 16일
신대한제국 선포 1929년 1월 18일
신주 선포 1929년 1월 21일
정안 선포 1955년 8월 19일
청천 선포 1993년 6월 18일
인문 환경
인구 전체 인구 487,265,530명(2020년)
민족 구성 한국계 68.3%
만주계 11.5%
우크라이나계 6.6%
중국계 3.9%
러시아계 3.2%
기타 6.5%
인구 밀도 315.16명/km2(2020년)
출산률 ()
출생 인구 ()
사망률 ()
사망 인구 ()
기대 수명 ()
성비
GDI
HDI
공용어 한국어
지역어 만주어 화어 유구어 일본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공용 문자 한글
문해율 99.2%(2020년)
종교 무교 57.5%
개신교 21.4%
불교 9.6%
천주교 3.4%
동방정교 2.9%
기타 5.2%
군대 대한군
세부 군대 육군 대한 육군
해군 대한 해군
공군 대한 공군
기타군 대한 시위대
행정구역
행정
구역
34개의 도
--개의 부
---개의 시
----개의 군
정치
경제
경제 체제 혼합경제
명목
GDP
전체 GDP
1인당 GDP
GDP
(PPP)
전체 GDP
1인당 GDP
수출
입액
수출
수입
화폐 공식 화폐 대한제국 원
국가
예산
1년 세입
1년 세출
통계
자료
경제성장률
고용률
실업률
지니계수
코드와 단위
ccTLD .kr
국가 코드 410, KR, KOR
국제 전화 코드 +82
단위 법정연호 서력기원, 정안
시간대 KST (UTC+9)
도량형 SI 단위
날짜형식 YYYY-MM-DD
운전석
(통행방향)
왼쪽
(우측 통행)
외교
UN UN 가입 1945년 10월 24일
UN 회원국
승인 여부
창립국
수교국
무비자
입국
180일
90일
60일
30일
15일
여행 경보
이전 국가
다음 국가
대한국
봉천 군벌
대만 공화국
남양 군도
일본
소련
유구국

대한제국(大韓帝國, 영어: Empire of Korea 엠파이어 오브 코리아[*], 일본어: 大韓帝国 (だいかんていこく) 다이칸데이코쿠[*], 중국어: 大韓帝國 다한디궈[*]) 혹은 대한(大韓, 영어: Korea 코리아[*], 일본어: 大韓 (だいかん) 다이칸[*], 중국어: 大韓 다한[*])는 동아시아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로써, 서쪽으로는 중화민국이, 동쪽으로는 일본, 북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필리핀 등과 접하고 있다. 수도는 한성부이며, 부산, 평양, 대련, 선양, 장춘, 합이빈, 금각, 대북 등의 주요 도시가 있다. 한국어가 공용어이며, 북부에서는 만주어중국어가 북동쪽에서는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 남쪽에서는 유구어 등이 지역어로써 사용된다. 서력기원을 사용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 공식적인 국명은 대한제국대한이나, 국내에서는 한국(韓國), (韓) 등으로도 사용되며, 일본령 조선 이전 존속하였던 대한제국 (1897-1910)과 구별하기 위해 신대한제국(新大韓帝國) 혹은 신한국(新韓國)이라 불리기도 한다.

약 3만에서 4만년전, 한반도에 고대 인류가 출현한 뒤로, 기원전 24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건국한 조선을 시작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삼국시대남북국 시대, 고려를 거치며, 1392년, 태조에 의해 대조선국이 건국된다. 대조선국은 약 500년 동안 단일의 왕조이 존속해왔으며, 17세기에 들어 열강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1897년에는 27대 국왕이던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로 바꾸며 대한제국 (1897년-1910년)이 선포되었다. 광무개혁과 같이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음에도, 청일 전쟁러일 전쟁을 거치며 한반도에 대한 다른 열강들의 영향력을 걷어낸 일본 제국에 의해 합병당하였다. 1929년, 관동군의 독단적 행위로 인해 봉천 군벌과의 사이가 파탄에 이른 일본 제국 내부에서는 관동군에 대한 처벌을 두고 분열되었고, 이는 내전으로 치닫는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 정부난징 국민정부봉천 군벌과 손을 잡고 조선 독립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여 독립을 이룬다. 그러나 독립 이후 건국된 대한국은 국내의 분열으로 인해 '국가 안정'을 명분으로 한 한성 진군에 의해 문민 정부는 붕괴된다. 한성 진군 이후 군부는 황정복고를 선언하고 의친왕대한 황제로 옹립한다. 건국 이후 신주개혁을 선포하며 광무개혁의 후신 개혁을 진행하였고, 봉천 군벌과의 전쟁을 통해 개혁의 필요를 증명하였다. 신주 개혁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신주 북벌이나 신주남정 등의 팽창 정책을 채택하며, 주변국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로 인해 서양 세력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아왔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참전함으로써 동맹을 체결하였고, 이후에는 팽창 정책을 폐기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대한제국은 대한제국 국제에 의해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양원제 국가이다. 대한제국의 국가원수는 대한 황제으로 국가를 대표하며, 대한제국군을 통솔한다. 전주 이씨가의 청천 황제가 즉위 중에 있으며, 가 법적 계승자로 있다. 대한제국 의정대신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한제국의회에 의해 선출되어 궁내부원수부를 제외한 내각을 이끈다. 대한제국의회는 대한제국의 입법부로써 대한제국 중추원대한제국 추민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한제국 중추원은 도 단위의 대선거구제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6년의 임기를 지니며, 대한제국 추민원소선구제 선거를 통해 4년의 임기를 지닌다. 추민원에서 가결된 법안은 중추원에서 다시 논의되어 법안을 부결시킨후 추민원으로 되돌려보네거나 통과시킨후 대한 황제의 승인을 받아 공표된다. 대한제국 대법원은 대한제국의 최고 사법부로 1명의 대법원 대법관과 --명의 대법원 법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3심제에 의해 항소상고를 거친 사건을 판결하거나, 대한제국 국제에 반하는 법안을 판단하고 법안을 무효화시킨다.

국명

"대한제국"이라는 국호 중 대한(大韓)의 어원은 고대 한반도 남부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인 한(韓)에서 유래한다. 마한, 진한, 변한을 합쳐 삼한이라고 불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쳐 삼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韓)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고대부터 내려오던 말로서, "하나", "하늘", "크다", '칸(汗) 등 여러 해석이 있다.

근대 국가의 국호로서 "대한"은 1897년 광무 황제대한제국 (1897-1910)을 선포하면서 다시 선택한 것으로 새 국호를 정한 이유를 "조선이라는 이름은 기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은데, 한(韓)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이름이며 삼국시대의 세 국가를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므로 "큰 한"이라는 이름이 적당하다"고 밝혔다.

대한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구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바뀌면서 일본령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바뀜과 동시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1928년, 해방으로 인해 대한국이 선포되면서 다시 사용되었다. 이후 1929년 한성 진군 이후 왕정복고되면서 "신대한제국", "대한제국", "신한국"이 선포된다.

일본, 중화민국, 베트남 등 주로 동아시아에 있는 한자 문화권 국가들에서도 일상에서 대한제국을 간단히 한국(중국어 간체: 韓國, 주음 부호:ㄏㄚㄋㄍㄨㄛ한궈, 일본어: 韓国 간코쿠, 베트남어: Hàn Quốc한 꾸옥)이라 부른다.

현재 영어권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Korea로 불리는데, 이 명칭의 시초는 중세 왕국인 '고려'라는 국명이 수도인 개성으로 통하는 벽란도를 출입하던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전해지면서 Corea로 음역 되어 전 세계에 전해진 것이다. 그 후 서방에 전해져 프랑스어로 Corée, 스페인어로 Corea, 영어로 Korea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대한제국의 공식 영어 명칭은 Korean Emprie로서, 약칭 'K.E.'로도 사용된다.

구대한제국 시절 공식 문서에는 Corea 또는 Korea가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1900년대 초기부터 영어권에서는 Korea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1892년 외국인이 자주 보는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5월호에는 “미국 국무부와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 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일본의 한 지방이 된 것으로부터 Chosen이라는 일본식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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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