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황립해군 정보부는 지크프리트급 전함의 건조에 맞서 예상 적국들이 16인치 함포로 무장한 1선급 전함들과 18인치를 채택한 함선을 연구하고 있다는 의심을 했다. 이러한 의심은 1922년 6월에 확실히 되었는데, 영국 왕립해군은 이미 N3급 전함으로 잘 알려진 넬슨급 전함에 16인치 함포를, 라이온급 전함에 18인치 함포를 장착하기 위해 설계 연구에 착수했었다. 따라서 제국 해군 또한 구경 우위를 지키기위해 46cm (18.1인치) 함포로 무장한 선박을 설계부에 건의했다. 기본적으로 이전 함급인 노이기니아급 전함을 확장한 형태에서 장갑 배치와 선박 구획을 재구성하여 더욱 경제적인 군함을 요구받았다. 이듬해 독일 제국의회(라이히스타그)에 46cm 함포를 운영하기 위한 선박에 대해 기금을 요청했고, 일부는 새로운 형식의 민간 기금을 이용했다. 실제로 함포 연구 개발비의 상당한 부분의 황실 사비에서 지불되었다. 이는 독일의 건함 경쟁에서 막대한 부채를 얻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1923년 5월 설계부에서는 노이기니아급 전함 설계에서 파생되었던 46cm 함포로 무장한 선박 설계를 참고하여 신속한 개발에 착수했다. 7월에 열린 설계 회의에서는 46cm 함포를 3연장 포탑 3기에 9문 탑재하거나 2연장 포탑 4기에 8문 배치하는 안이 제출되었다. 독일 해군은 이미 중·소구경 (10.5 - 40.5 cm) 의 주포를 3연장으로 배치할 수 있었지만, 대구경 (42cm 이상) 에서는 2연장을 선호했다. 이는 전적으로 경제적인 문제였고 공격력 손실에 대한 지나치게 큰 염려 때문이었다.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대제독은 3연장 함포에 대한 주문을 요구했지만, 끝내 11월에 열린 최종 회의에서 기각되었다. 따라서 포탑 4기에 8문의 함포를 운영하는 것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설계부는 기존의 노이기니아급 전함 설계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대신 디젤 기관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짐에 따라 디젤 기관을 위한 기관실 설계가 가능해졌다. 진동이나 소음 문제부터 마모, 연료 불순물 제거, 관리 유지 면에서 이전 함급에서 사용된 기관부와 비교해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더 거대해진 선박을 30노트의 획기적인 속도로 운영할 수 있었다. 기관부 뿐만 아니라 장갑 부문에서도 변화를 주었다. 이는 이전 함급에서 했던 고민이 그대로 내려왔다. 먼저 갑판 아래에 공간을 내는 것에서 주 갑판 위에 상부 갑판을 만들었고 주 갑판 장갑이 현측 장갑과 이어져 내려갈 수 있도록 장갑배치를 고안했다. 전체적으로 주장갑의 형태가 현측에서 약소하게 위로 (갑판 쪽)으로 이동했다. 그럼에도 기존의 터틀백 장갑를 중점에 두고 설계되어 있었고 경사장갑 또한,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제대로 설계되지 못했다. 새로운 장갑 구조는 과도기적인 산물이었지만, 집중 방호 구역을 잘 조성한 덕분에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었다.
이 최신예 선박들에 대한 예산은 1922년에 결의된 제7차 함대법의 지원을 받았지만, 제국의 재정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충분한 재정을 배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1925년까지 민간 제국해군 기금에서 모금된 금액과 독일계 오스트리아 왕국의 합병과 함께 확보한 재정까지 동원하여 SMS 로이스그라이츠과 SMS 샤움부르크의 건조가 1925년 중반에 예산을 받아 승인되었다. SMS 로이스게라과 SMS 슈바르츠부르크는 다음 해, SMS 러시아 내전과 SMS 제4차 발칸 전쟁의 심화로 군수 수출이 호황을 이루면서 재정 확보가 그나마 용이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6년 예산과 함께 당해 중반에 예산이 모두 배정되어 건조를 시작했다. 로이스그라이츠와 샤움부르크, 로이스게라는 이후에 각각 SMS 헤센, SMS 프로이센, SMS 로트링겐을 대체하면서 브라운슈바이츠급 전함을 모두 퇴역시켰고, 슈바르츠부르크는 SMS 도이칠란트를 대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