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대한민국, 어나더어스)

WARSAW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6월 13일 (토) 23:24 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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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참·민의원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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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참의원 219.03 ~
제26대 민의원 220.05 ~
정수민 정부
221.07 ~ 225.07
여당

49석·158석
야당

114석·432석

28석·52석

16석·34석

11석·16석

10석·17석

9석·13석

3석·6석

4석·2석
무소속 6석·20석
재적 250석·750석
원내 · 원외 · 금지
극좌 · 진보 · 민주당계 · 제3지대 · 단일쟁점 · 보수 · 극우 · 종교
민주당
The Democratic Party of Korea
약칭 DP, 민주
표어 국민 속으로
당원 1,693,059
창당 IY (이세계년, 2016년) 216년 2월
선행조직 191년 민주당
시민민주당
국민의당
병합한 정당 216년 민주당 (216년 6월)
소나무 (220년 1월)
상징색 파랑색 (DPK Blue, #3771C8)
역사
정계 개편 IY (이세계년, 2016년) 216년 1월
창당 IY (이세계년, 2016년) 216년 2월
민주당으로 개칭 IY (이세계년, 2015년) 216년 8월
당직자
당수 김국재
원내대표 이해진
소속 대통령 권남국 (제22대)
이념
스펙트럼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중도주의
진보주의
경제 혼합 경제
케인스주의
시장 경제(부분적)
외교·국방 다문화주의
평화주의
아스피아 질서주의
사회 사회자유주의
민주사회주의(일부 계파)
진보주의
조직 및 기관
중앙 당사 대한민국 한경특별시 중앙구
당 내 조직
국제조직 이세계 민주주의 인터내셔널
싱크탱크 민주연구원
의석
이세계 의회
156 / 2,200 (7%)
민의원
434 / 750 (58%)
참의원
116 / 250 (46%)
도·광역지사
13 / 16 (81%)
광역단체장
469 / 510 (92%)
기초의원
6,700 / 9,200 (73%)
유로아스피아 의회
20 / 250 (8%)
democrat.kr

민주당(民主黨, Democratic Party of Korea)는 대한민국의 여당이며 사회자유주의와 진보주의 등을 표방하는 정당이다. 216년 1월 야당의 정계개편을 계기로 중도주의를 표방하는 민주당, 진보주의, 친노 성향의 시민민주당, 중도보수 성향의 국민의당이 통합하면서 통합민주당이란 명칭으로 탄생하였으며 자유당에 이은 제1야당(298석)으로 시작하였다. 이후 37대 민의원 선거에서 389석을 흭득하면서 제1당이 되었고, 216년 8월 명칭을 민주당으로 변경하였다. 217년 7월 유영호 대통령의 정계 은퇴를 계기로 21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권남국이 당선되면서 여당이 되었다. 218년 민주당은 대한공산당의 좌경화에서 탈당한 온건 PR계열과 그 노선을 따르는 노동자 세력을 대부분 흡수하면서 전보다 약간 좌경화되었으나, 218년 전당대회에서 친권 중립파와 민주평화모임 세력이 강성 친권을 꺾고 당권을 잡으면서 사실상 중도화되었다. 38대 민의원에서는 434석을 흭득하면서 제1당이 되면서 여당 자리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현실 한국의 더불어민주당, 민생당과 유사하다.

역사

통합민주당의 뿌리가 되는 민주당 (191년)은 191년 창당한 민주당계 정당으로, 그 이전에는 대한민주당 등 여러 민주당계 정당들이 존재했기에, 민주당계 정당의 시초는 보수성향이 강했던 민주당 (145년)을 그 근본으로 본다.

187년 7월 김영후 대통령의 6월 학살을 계기로 발생한 7월 민주화 항쟁을 계기로 여당인 정의개발당과 자유당 연립내각이 붕괴하였으며, 자유당의 이구총 총리가 8월 선언을 발표하며 개헌과 동시에 대선 직선제, 국회 해산 및 양원제 실시, 정당 설립의 자유, 대통령 4년 연임제 등의 내용이 담겨 있는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259:41로 통과하자 민주화 운동 세력들은 각자의 정당을 만들기 시작했다. 소위 민주 4인방인 김용수자유민주당을, 황대진은 스스로 주장했던 평화민주주의에 입각한 평화민주당을 먼저 창당했고, 노유천은 188년에 민주당 (188년)을 창당했다. 하지만 홍윤표는 민주화 세력에서 이탈하여 스스로 민주당계와 자유당에 반감을 가지고 반권위주의 우파를 택했으며, 후에 국민당을 창당한다.

이후 187년 9월 초대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황대진이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평민당의 지지율이 상승했으며, 정권 연장, 국정 안정을 외치던 자유당과 반권위 체제 수립과 경제 안정, 권위주의 타파를 주장했던 자민당의 지지율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한다. 특히 자유당은 국민들의 반감을 사 11%까지 곤두박질치며 참의원 선거 패배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예상대로 평민당이 제1당이 되고, 자유당과 자민당은 각각 제2당, 제3당으로 추락한다. 하지만 신생 민주당은 오히려 8석을 얻어 승승장구했으며 국민당은 군소정당 중에서 가장 낮은 득표율(2.73%)를 얻어 원내 진입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자민당에서는 김용수를 따르는 청산동계와 이강택을 따르는 신수동계의 마찰이 계속되었고, 지지율도 하락세를 보이자 신생 민주당은 자민당과의 합당을 거절당하면서 자민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기미에 처했다. 이에 박유신 전 대통령 인사, 전 측근들과 지지자들이 주축이 된 민주공화당이 자민당, 자유당과 합당 러브콜을 보냈으며, 자민당은 찬성, 자유당은 좀 더 고민하다가 끝내 거절하고 만다. 여기에 진보그룹의 류일규가 속해있는 개혁주의 성향의 개혁민주당도 이에 찬성하자 류일규를 포함한 일부가 합당 반대를 외치면서 탈당했다.

189년 8월 15대 대선에서 평민당의 강규일, 통민당의 박상규, 신생 민주당의 노유천이 각각 후보로 나섰고, 대선 결과 강규일이 당선되었다. 190년 3월 개혁민주당, 민주공화당, 자유민주당은 합당을 선언하였고, 여기에 무소속 의원들까지 합류하면서 통일민주당을 출범시켰다. 또, 119석이 넘는 의석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제1당이 되었다. 통민당은 평민당을 4인방의 배신자, 변절자 정당이라고 공격하면서 지지율을 무려 7%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으며 여기에 무소속 강규일 대통령(대통령 취임 전에는 평민당 소속)의 부정부패 의혹이 통민당의 반사이익을 보게 되면서 평민당은 통민당에 대항하기 위해 신생 민주당과 합당을 시도한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6대 민의원 선거에선 평화당이 제2당으로 밀려났고, 신생 민주당은 상당히 약진한 반면 통민당은 157석을 흭득하면서 거대 정당으로 급부상한다.

이후 191년 6월 노유천과 황대진이 만나 합당 결의문을 발표하였으며, 이것이 구일민주당이라 부르는 민주당 (191년)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통민당의 의석에 못 미치는 111석에 불과하였고 제2당으로 남게 되었다. 193년 8월 17대 민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만 봐도 통민당과 민주당이 지지율 전쟁을 벌였으나 결과를 보니 통민당이 97석, 민주당이 118석으로 오히려 민주당에게 역전당했고, 통민당은 끝내 제2당이 되고 만다. 191년 11월 첫 지방선거에서도 민주당이 광역의원 39석, 기초의원 290석을 흭득한 반면 통민당은 고작 광역의원이 3석, 기초의원이 10석에 불과하면서 어마어마한 참패를 당했다.

193년 16대 대선에서는 통민당의 김유화 후보와 민주당의 노유천 후보가 맞붙었고, 자유당 김천식, 사회당 양일령 후보가 양 후보에 단일화를 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그러던 중 노유천 후보가 중앙구 유세 중 암으로 쓰러져 사실상 유세 활동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김유화 후보가 당선되면서 사실상 민주당의 패배로 이어졌다. 노유천은 약 5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노유천의 아들인 노친호가 임시대표를 맡았다.

195년 5월 통민당 내 민공당계가 김유화 대통령의 반감으로 인해 탈당을 선언했으며 신수동계 일부가 자유당으로 이동하는 등 정치적인 혼란이 벌어졌으며 민주당 역시 지지율 감소로 위기에 빠진 상태였다. 그러나 황대진이 다시 인기를 얻으면서 차기 대선에 도전할 가능성이 생겼고 황대진은 대선 도전을 선언하면서 정권교체에 기회를 잡기 시작했다. 이후 197년 17년 대선에서 자유당 이호순 후보와의 대결에서 163만표 차이로 당선되면서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198년 노유천이 5년간의 투병 생활을 끝내고 민주당에 화려하게 복귀하면서 여당 연장을 위해 2년동안 칼을 갈았다. 한편 자유당은 민주당에 크게 궤멸된 통민당과 병합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여당을 위협하기 시작했으며 민주당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자유당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은 통민당과 통합하자마자 일부 세력들이 탈당하여 공화당을 창당하였고, 보수 표심이 공화당으로 쏠릴 위기에 처하고 만다. 199년 6월 18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이 110석으로 지난 선거에 비해 어느 정도 선전했지만 172석이라는 제1당의 벽을 넘지 못했고, 199년 8월 4대 참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이 10석 정도밖에 건져 참패하고 만다. 또, 양 후보의 지지율의 격차가 전보다 더 벌어져 노유천의 승리로 확정된 상태였고 자유당 일부 의원들의 스캔들과 사건사고들로 인해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18대 대선에서는 노유천이 당선되면서 사실상 민주당이 압승하였고, 이른바 친노 세력이 당권을 휩쓸었다. 그러나 친노 세력의 등장으로 자유당과 공화당, 현대민주당, 대한인민당이 힘을 합쳐 노유천 탄핵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19대 민의원 선거에선 민주당이 99석으로 줄어 제1당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으나 국민들의 반감을 사면서 민주당과 사회당을 제외한 야권연대의 지지율은 추락하고 만다. 이를 토대로 203년 5대 참의원 선거에서는 야권연대 후보가 대부분 낙선하는 등 고비를 겪었으며, 민주당은 119석으로 늘어나 다시금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이 선거 이후부터 영향력이 조금씩 감소하기 시작했고 국정 운영에 차질이 생기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기 시작했다. 한편 일부 친노 계열은 시민민주당을 창당했고, 민주당 내 동구동계 일부 역시 탈당하면서 신생정당인 중도개혁당을 창당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19대 대선에서는 자유당+대한인민당+공화당 야권연대 후보인 이명재 후보가 당선되면서 야당 신세가 되었으나 제1당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21대 민의원 선거6대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하여 다시 야당이 되었고, 206년 지방선거에서는 자유당에 두 배 차이로 밀렸고, 민주당계 야당들도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207년에는 민주당이 선거법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이후 211년 안지수가 이끄는 새정치당이 혜성처럼 나타나 민주당과 연대를 제안했으며, 이후 새정치-민주당 연합을 주도하게 된다. 또, 정치 신인인 권남국이 문재윤에 이어 두 번째로 등장하면서 210년에는 자신의 세력인 친권을 이끌어낸다. 211년 1월 전당대회에서는 자신이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친노 신민주, 비주류 노영길, 진보그룹 이영순 후보를 누르고 당대표가 되면서 민주당에 변화를 주게 된다. 하지만 새정치당이 212년 민주당과의 연대에서 이탈했고, 여기에 동구동계와 일부 청산동계의 유입으로 국민의당이 창당하였다. 권 대표는 야권 분열을 예상하면서 민주진보 야권 통합을 주장했고, 시민민주당과의 통합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후 안지수와 정구영의 갈등으로 안지수와 그 세력들이 국민의당을 나가면서 국민정당을 창당하였고, 국민의당은 결국 사실상 현실 한국의 민생당과 다를 바 없는 정당이 되자 이 역시 야권 통합에 합류하였다. 215년 12월 민주당과 야권통합연대는 본격적으로 합당 준비를 시작했고, 한편 대한정의당도 다른 진보야당들과의 합당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진보 통합에도 힘을 싣기 시작했다. 216년이 되자, 야당의 정계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권남국과 김영민, 백혜림을 공동당수로, 이해진을 원내대표로 하는 "통합민주당"이 출범한다.

계파

height=20의 계파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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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친권 비권
변혁
심유박 정설희
유화룡 김인재
민주평화모임
정구영 박영준
박유한 노규인
김인수 유적
노태민 정미례
친권
신재수 양태자
김수명 이해진
양진화 유수진
김진혁 정세형
민주선진연합
이신규 정윤지
최서희 노태영
정현성 양현숙
동구동계
보수파
김영진
유근래
성연진
당 내 진보계
김광진 김대화
정석재 정의화
민주정의회
노일구
유수화
양세진
문재윤계
문재윤 송영훈
전병미 백두환
고윤정 유서진
추명태 유석연
정선주
민주혁명연합
이해수 이세훈
노세정 박영진
최정혜 노석준
이강재 설민지
순수 친권
정열수 김오적
(민주 · 자유 · 전진 · 진보 · 공화 · 사회 · 태양 · 개혁중도 · 공산 · 기타 정당)
(진보 · 민주 · 보수)

민주당은 총 네 개의 계파로 나뉜다.

권남국이 대통령이 되기 전으로는 제18대 대통령인 노유천을 따르는 친노가 최대 세력이었으며 권남국도 친노 출신으로 분류된다.

비권 세력은 93년 민주당 출신 인사 (동구동계)와 국민의당 출신 인사 (정구영계), 무소속 이신규 세력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스펙트럼도 다양한데 왼쪽으로는 민주평화모임, 오른쪽으로는 반권 성향까지 넓은 편이다. 민주평화모임은 현실 대한민국의 민생당과 유사한 성향으로 평화당계, 대안신당계에 가깝다. 평화주의, 중도개혁주의를 지향한다. 과거 대통합민주당 대표를 맡은 정구영, 국민의당 국회의원이자 정치 싱크탱크 민주평화그룹의 대표를 맡은 노규인, 음악가 출신 박수영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송유신은 과거 자유당에선 온건 친유였으며 36대 민의원 선거에서 공천 탈락으로 탈당하면서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기독교사제연대와는 달리 보수 성향이 짙다.

친권 세력은 비당권파지만 210년 친노에서 갈라져 나온 사회민주주의, 실용주의 성향의 계파로 213년부터 5년 동안 당권을 잡았으며, 전 중앙구 국회의원 겸 행정자치성 장관인 이연식, 전 국토산림부 장관이자 민주당 대변인인 정세진 등 과거 정치 거물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진보 성향인 달의 모임문재윤을 따르는 성향으로 과거 시민민주당 대표와 사람사는세상 노유천재단의 2대 이사장, 경산도 남부의 야구 구단 화성 드래곤즈의 34대 감독을 맡았다. 청와대의 전 대통령정무수석전병미, 국민소통위원장고윤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 열린진보당의 전신인 대한정의당의 일부 세력도 친권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있다. 노일구, 고국, 유수화 등이 소속되어 있으며 216년부터는 그 영향력이 점차 감소하고 있다. 민의원에서는 25명, 참의원에서는 3명이 정의당계이다.

38대 민의원 선거, 7대 참의원 선거에서는 대다수의 친권 후보들이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현재 민의원에는 217명의 의원, 참의원에는 60명의 의원이 친권 성향이다.

진보 계열 중에는 대한공산당에서 탈당한 PR파도 존재한다. 심유진의 아들 심유박 등이 이에 해당되며 동아스피아의 사회주의적 통일을 추구하는 NRA파보다 온건적인 성향을 띈다. 진보그룹은 구 공산당 계열보다 온건적인 진보주의를 표방한다.

보수 계열 중에서는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사제연대가 존재하며 신성교의 한국 지부인 신성교회 총회장인 박규한경제일교회 목사인 신유찬이 주축이 된 세력으로 204년부터 단체로 활동하다가 216년부터 민주당에 합류하였다. 기독교 민주주의를 지향하지만 권남국에는 호의적이며 극단적인 타 기독교와는 달리 매우 온건적인 보수를 표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