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문서: '''봉성 사건'''({{llang|ja|鳳城事件, 보죠지켄}})은 1896년, 야에야마에서 일부 근위사단 참모와 육군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쿠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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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성 사건'''({{llang|ja|鳳城事件, 보죠지켄}})은 1896년, [[야에야마]]에서 일부 근위사단 참모와 육군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쿠데타|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 {{야에야마 타이틀}} | ||
{{전쟁 정보 | |||
|분쟁 = 봉성 사건<br><small>鳳城事件</small> | |||
|그림 = | |||
|그림크기 = | |||
|설명 = | |||
|날짜 = [[1896년]] [[2월 16일]] | |||
|장소 = {{국기나라|야에야마}} [[타이쿄]] 전역 | |||
|결과 = *[[청년파]] 장교들의 사조직 궤멸 | |||
*[[입헌군주정|입헌정치]] 공고화 | |||
|교전국1 = [[청년파]] 및 동조 세력 | |||
|교전국2 = 군 내 [[통제파]] 및 진압군 | |||
|지휘관1 = {{국기그림|야에야마 제국군}}[[니시와타 사부타]]<br>{{국기그림|야에야마 제국군}}[[아타고 이사오]] | |||
|지휘관2 = {{국기그림|야에야마}}[[오카시타 하루스케]]<br>{{국기그림|야에야마}} [[아타리 마사유키]]<ref>中政文, 성씨인 '中'의 경우에는 야에야마 서부 지방에서 '아타리'로 읽는 경우가 잦다. 일반적으로는 '나카'(なか)로 읽기에 '나카 마사유키'라고도 불린다.</ref> | |||
|병력1 = {{국기그림|야에야마 제국군}}[[청년파]], [[황국의용군]] | |||
*약 1,400여 명 | |||
|병력2 = {{국기그림|야에야마}} [[통제파]], [[야에야마 경찰청|연방경찰]] | |||
*약 2,500여 명 | |||
|사상자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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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성 사건'''({{llang|ja|鳳城事件, 보죠지켄}})은 1896년, [[야에야마]](八重山)에서 일부 근위사단 참모와 육군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쿠데타|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니시와타 사부타]](西綿左部太) 중교(中校)<ref>[[야에야마 연방군]]의 교관급 장교, 영관급 장교의 '중령'이나 좌관급 장교의 '중좌'와 계급이 동일함.</ref>를 주도로 [[제1군]] 내 다수의 병력들이 [[덴테]](天帝)가 거주하는 [[타이쿄]](台京)를 일시적으로 점거하면서 '유신'(維新)을 주장했으나, [[오카시타 하루스케]](岡下晴典) [[야에야마 육군|육군]] 대장을 주축으로 한 [[통제파]]의 진압 시도 및 [[덴테]](天帝)의 원대 복귀 명령으로 명분을 잃게 되면서 실패하였다. 이 사건은 [[어전회의]](御前會議)를 기점으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던 군 수뇌부 내 [[청년파]](靑年派)를 비롯한 일부 현역 무관들이 [[아가리에 테루야]] 내각 이후로 '군부대신 문관제'(軍部大臣 文官制) 법안이 통과되어 내각 구성의 참여할 수 없게되자 [[내각]]과 [[황국의회|의회]]가 민생 해결의 중심점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자신들의 의견을 대변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천제친정]](天帝親政)을 내세워 정권 탈취를 기도했으며, 결과적으로 봉성 사건 이후로 민중들의 군부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됨에따라 [[일본제국|군부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 |||
==각주== | |||
{{각주}} | |||
[[분류:야에야마]] |
2018년 7월 13일 (금) 12:29 기준 최신판
봉성 사건 鳳城事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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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청년파 및 동조 세력 | 군 내 통제파 및 진압군 | ||||||
지휘관 | |||||||
니시와타 사부타 아타고 이사오 |
오카시타 하루스케 아타리 마사유키[1] | ||||||
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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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성 사건(일본어: 鳳城事件, 보죠지켄)은 1896년, 야에야마(八重山)에서 일부 근위사단 참모와 육군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니시와타 사부타(西綿左部太) 중교(中校)[2]를 주도로 제1군 내 다수의 병력들이 덴테(天帝)가 거주하는 타이쿄(台京)를 일시적으로 점거하면서 '유신'(維新)을 주장했으나, 오카시타 하루스케(岡下晴典) 육군 대장을 주축으로 한 통제파의 진압 시도 및 덴테(天帝)의 원대 복귀 명령으로 명분을 잃게 되면서 실패하였다. 이 사건은 어전회의(御前會議)를 기점으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던 군 수뇌부 내 청년파(靑年派)를 비롯한 일부 현역 무관들이 아가리에 테루야 내각 이후로 '군부대신 문관제'(軍部大臣 文官制) 법안이 통과되어 내각 구성의 참여할 수 없게되자 내각과 의회가 민생 해결의 중심점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자신들의 의견을 대변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천제친정(天帝親政)을 내세워 정권 탈취를 기도했으며, 결과적으로 봉성 사건 이후로 민중들의 군부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됨에따라 군부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