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장:커피와 사탕

커피와 사탕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월 7일 (일) 08:5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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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이태리

한국이 임진왜란의 피해를 매우 적게 받아 국가적 역량이 잘 보존되었고, 그 이후 근대화가 되어 열강의 반열에 오르나 파시즘의 등장, 그로 인한 시베리아 출병등으로 폭주하는 내용의 대체역사다. 다만 이 세계의 한국은 제목답게 가끔 이탈리아급의 졸전능력을 보여주는것이 특징이다. 전반적인 추축국으로서의 대한제국의 분위기는, 독일제국과 무솔리니가 집권한 이탈리아를 합친듯한 모습을 지양한다.

  • 대한제국: 문정왕후의 천연두로 인한 죽음으로 인해 인종의 치세가 20년간 계속된 뒤, 명종 대신 인성왕후 소생의 세자가 제위를 잇게 되어 역사의 분기점이 발생하였으며, 곧이어 원균이 1555년에 변소에 빠져 죽으면서 최종적으로 역사가 뒤바뀌게 되었다. 10만 양병설로 인해 명나라의 도움 없이 조기에 왜란을 격파한 조선은 이후 역량이 유지된 상태로 1630년대에 명과 연합하여 후금을 처리하였으나, 얼마 안가서 명나라가 붕괴되어 가장 강한 순나라와 명의 후속국가들이 다투는 중국의 분열기가 시작되게 된다. 이 상황에서 내전으로 치솟는 중국과의 교역이 불가능해지자, 손해를 매꾸기 위해 1641년 경 네덜란드 상인들이 일본 말고도 조선에 접근을 하게 된다. 중국과의 교역이 곤란해지고, 명의 원수로 지목된 순과의 교역은 꺼려했던 조선은 급한대로 재물포에 '화란관'을 개방해주고 교역을 허락하였다. 시간이 흘러,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유입된 서양 학문들은 기존 유교와 결합되어 알게 모르게 조선에 퍼져나갔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스스로를 명국의 후계자이며 중국의 국과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주장에 기반한 사상 또한 등장하게 됩낟.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안동 김씨의 집권 또한 원래대로 발생하였으나 이들이 자신들에 대한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만주 등지에서 세력권을 확장시켜나가고, 순나라와 적대하는 중국 국가들에게 무기를 파는 식으로 나름 호황기를 누렸다. 그러다 1866년,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어도 여전히 기독교에 대해서는 적대감이 존재하던 조선 조성의 기해박해로 인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인물들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조선에 파병을 명령하였다. 청나라가 없던지라 베트남을 손쉽게 장악했던 프랑스 해군들은 패권이 청나라보다 미약하여 조선에게 일방적 통지를 해줄 여력은 되지 못했던 순나라를 통하는 대신, 직접 팔미도 앞바다에 나타나 조선 수군을 완파시킨 뒤 외방전교회 인원들의 죽음에 대해서 조사를 하는 것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고, 원 역사보다 일본의 소식을 좀더 접하고 있던 조선은 세력이 흔들리던 안동김씨의 논의끝에, 흑선으로 인한 피를 보는건 우선 방지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로즈 제독과의 협상끝에 '병인년 화친조약'이 체결된다. 안동김씨는 프랑스를 끌어들여 흔들리던 권력을 어떻게든 유지해보고자 하였으나, 1870년 보불전쟁으로 프랑스는 조선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결국 지지기반이 극도로 약해진 안동 김씨는, 영미의 지원을 받은 근왕파에게 밀려나 권력다툼에서 패배하게 되었다. 이후 1871년 경 근왕파 정부는 서양 제국들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보빙사를 파견하였으며, 1874년경 이들의 귀국 이후 전격적인 서구화 정책이 시행되고, 1875년에 천조질서에서 명의 뒤를 이어 천명을 이어받은 '대한'을 환구단에서 선포하였다. 그해 9월 20일, 공식적으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수교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이 둘은 1894년 각각 서만주와 대만 인근에서 순나라와 전쟁을 벌인 뒤 일본 몫으로 푸젠과 대만, 한국의 몫으로 순의 동맹국이었던 금나라의 영토인 간도를 비롯한 중부 남만주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러한 협상의 결과는 원 역사의 청국보다 더 떨어지던 순나라의 국력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가 남만주를 제외한 나머지 만주 지역(소위 금나라)을 삼켜버리자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일본 또한 만주에서 설 곳이 없어진 육군이 사할린 및 연해주에 더욱 집착하게 되면서 러시아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결국 후일 발발한 러한일전쟁의 결과로 한국은 금나라를 러시아로부터 도로 빼았고, 일본은 사할린과 알류샨 열도를 가져간 뒤 '연해주 공동자치령'이 한국과 일본의 협의 후 수립되게 된다. 이후 1905년 융희 시대에 한국은 '을사년 협약'으로 금나라를 완전히 합병하였으며, 이후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함께 전쟁특수를 통한 만주 식민지 통치 및 여유돈 확보에 성공했으며,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협상국 측 일부와 함께 시베리아로 파병을 실행하는 동시에, 극비리 사항이었던'금관 작전'으로 니콜라 2세에게 망명을 통한 자식들의 안전을 보증하여 로마노프 황손 5명의 확보에 성공하였다. 이후 연해주 자치령과 시베리아 영토 일부에 '백러시아 시베리아정부'를 세웠으며, 황손을 우대하는 형식의 공화국으로 처음엔 운영하였다. 하지만 대공황과 만주 일대에서 여진족들의 3.1 운동, 공산당의 활동등으로 정국이 불안정해지다가, 공산주의 타파를 주 슬로건으로 내세운 김창암의 '대한백의단'이 부상하였고 이들은 1930년 11월 27일에서 11월 31일의 기간동안 한성에서 진군하여 당시 황제인 성덕제 이인황에게서 '구국자들'로서 인정받은 뒤, 다음 해 총선에서 '대한호국회'로 이름을 바꾸고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왕화의 덕으로서 시베리아, 몽골과 중국 북부의 국가들이 각자의 왕을 모시며 한국과 공영하는 '해동성맹'을 기획하였고, 이 사업의 첫 시작으로 만주 일대에서 출병하여, 1935년 몽골 인근에 '예케 몽골 울루스'를 설립하고 괴뢰국으로 삼았다.
  • 대일본제국: 임진왜란의 조기 종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은 극도로 불안정해졌고, 결국 휘하 다이묘들이 그의 자택을 야밤에 습격하면서 변을 당해 운명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구심점이 없던 다이묘 반란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주군으로 내세운 이에야스의 세력에 밀려 결국 몰락하였고, 최종적으로 이에야스가 오사카 전투로 히데요리를 팽하면서 원래의 권력 구도가 자리잡았다. 이후 네덜란드 상인을 통한 난학 숙지로 조선과의 연관점이 어느 정도는 생겨서 조선 통신사 말고도 일본에 유학이 전파되는 길이 마련되었으며, 한편 조선은 부산 일대에서 활력이 더 강해진 왜관을 운영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대정봉환 이후 일본은 만주 일대를 이익선으로 보는 조선의 존재로 인해 사쓰마 파벌의 발언권이 더 커졌고, 순나라와의 전쟁 당시 공식적으로 만주를 대한제국의 이권선으로 인정하면서 일본의 확장 전략은 남방, 그리고 북중국을 제외한 남중국 일대로 바뀌게 된다. 이후 포츠머스 조약으로 사할린과 알류샨 열도를 할양받았다. 그러나 1923년의 관동대지진과 대공황의 여파로 이미 진출이 준비중이던 남중국 일대를 식민화시키자는 여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푸젠 조차지 인근에서의 병사 실종을 빌미로 대만군이 그 일대를 점령한 뒤, 괴뢰국인 '대명국'을 걸립하고 정식 국가로 승인하였다. 해당 국가 수립에 대한 비밀협의로 일본은 시베리아에서 영향권을 철수하는 대신 북경 아래의 영토들을 전부 차지하기로, 한국은 대명국을 정식 명나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협약을 맺게 된다.
  • 대순→중화제국: 이자겸의 반란으로 인해 건국된 순나라는 초기에 명나라를 쓰러트리고 가장 강력한 중원국가로 군림하였으나, 경쟁자들의 존재로 인하여 청나라급의 위상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이를 메꾸기 위하여 대만 섬, 북만수 일대즈음으로 진출했던 순나라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어가며, 중화대륙을 전부 다 통일하지 못한데다가 명나라를 붕괴시키기까지 했다는 정통성 문제 때문에 조선을 무시하는 선에서 나름의 번영기를 누렸었다. 그러나 중화사상으로 영국 사절단에게 오베삼고두지례를 강요했다가 2번의 아편전쟁으로 인해서 국력이 심각하게 흔들리게 된 상태에서,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도 성과가 그닥 좋지 못하자 결국 열강의 간섭을 피해 대만과 만주 일대로 세력을 확대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후 변법유신으로 나름 개혁의 성과를 내는 듯 하였으나 함대의 수준은 북양함대의 그것보다 질적으로 훨씬 부족하였고, 결국 한국, 일본과의 전쟁으로 이마저도 유명무실해지며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종국에는 1911년에 시작된 신해혁명으로 민심이 완전히 사그라들었고, 이윽고 1912년 2월 12일에 황제가 옥좌에서 끌어내려지면서 멸망하였고, 이후 대순의 영토는 원새개가 다스리는 중화제국으로 바뀌었으나, 수많은 반발을 산 원새개가 퇴위하면서 제국 체제가 해제되고 이후 각 성들의 독립, 혹은 중화민국으로의 합류로 공중분해되는 결말을 맞게 된다.
  • 대명: 1932년에 푸젠사변으로 건국된 일본제국의 괴뢰국으로, 명나라 황실의 직계 후손인 주욱훈을 황제로 모시는 통치형태였다. 당시 일본이 주장한 '참중화'사상의 실험장으로서 5개년 경제개발 계획등이 실행되었으며,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을 비롯한 다른 중국 정부들의 정통성을 부인하였다.
  • 백러시아 시베리아정부:연해주 일대에 일본과 한국의 승인 아래 건국된 정부로, 1933년 이전까지는 공화국의 형태로 운영되다가 왕화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의 '해동성맹'에 가입하면서 로마노프 왕가의 후손들이 지배하는 군주국으로 거듭났다.
  • 후송→중화민국

벛나무 위의 독수리

동명의 소설인 높은 성의 사나이 세계관의 설정들을 각색,확대 및 세세하게 정리해보는 문서이다. 배경은 루즈벨트와 처칠의 이른 암살로 인해 연합국이 추축국에게 패배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며, 이 세계에서 각각 나치와 일본제국이 독일령 아메리카와 태평양 합중국 외 지역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지, 그리고 이 두 아메리카 점령지가 정확히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세력

  • 아인하이츠팍트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에 가맹국들을 두고 있는 아인하이츠팍트는 대게르만국과 그 동맹, 혹은 괴뢰국들이 가입되어있는 국제기구이다. 다만 점거한 영토가 지나치게 광범위한 관계로 보통 '아메리카 팍트'와'유로피아 팍트'로 지부들을 나누어서 부르기도 한다. 대전 이후 원활한 지배를 위해 아메리카의 유대인을 제외한 백인 인구를 모두 아리아인으로 편입시킨 결과, 현재 아인하이츠팍트는 북미 경쟁과, 나아가서 태양계까지 넘나드는 세계 패권 경쟁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는 세력이라 볼 수 있다. 아인하이츠팍트의 우주 기술은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정점에 있다고도 볼 수 있으며, 이들의 우주기지는 현재 달 그리고 화성에 설치되어있는 상태다. 공용화폐는 라이히스마르크화다.
  • 지중해 연맹3대 국제기구중 가장 약하다고 평가받는 기구로, 이탈리아 왕국과 스페인 왕국, 그리고 그들의 동맹들이 가입되어 있는 집단이다. 주로 지중해권 국가들과 아프리카 국가 일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의 빈약한 기본국력탓에 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과도 격차가 심각할 수준으로 나는, 사실상 아인하이츠팍트의 하청집단 수준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이들의 민주주의 및 자유도 수치는 현재 지구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하며 독일과 일본에서 밥먹듯이 일어나는 전화기 도청도 꽤나 드문 편으로 이루어진다. 공용화폐는 지중해 페소화다.
  • 공영권두번째로 강대한 세력인 공영권은 일본제국이 지도하는 기구다. 본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으나, 호주와 아메리카 서부를 정복한 뒤 점령지에 있는 백인들의 모순성을 고려하여 일시적으로 '공영권'으로 부르는것을 권장하는 중이다. 다만, 1980년부터는 정식으로 서부 아메리카지역을 동아시아권으로 편입시키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공영권은 나치에 이어 가장 강대한 세력들 중 하나이나, 지도국 일본의 고질적인 문제 육해군 대립이 괴뢰국들과 식민지에도 반영되어, 내부의 분열이 생각외로 심각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디 우주기술은 없었으나, 1980년대에 우주선 '이나자미'를 달로 발사하면서 우주 진출을 시작하였다. 공용화폐는 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