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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연의 재통일 ===
=== 북연의 재통일 ===
A.D.755~A.D.1126(371년)
A.D.755~A.D.1126(371년) 연나라에 의해 원고 반도는 200여년만에 통일되었으나, 그동안 벌어진 남북의 문화적 차이를 메꾸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연 태조 죽문신양은 산북과 산남 권역을 나누어 다른 방식으로 통치했다. 먼저, 산북 지방은 이미 중앙통치체제가 완성되었기에 기득권 무신들을 제거하고 역성혁명에 참가한 청년 무인,몰락 문신,중인을 곧바로 등용하여 중앙정부의 변혁을 시행했고, 남당 시대의 호족 정치에서부터 파생된 지방분권적 성향이 강한 산남은 바로 중앙에서 통제하기엔 무리가 있었으므로 기존의 산남을 다스리던 무신들에게 적당한 권력을 하사하고 적침의 위험이 높은 국경 지대에 일명 '10계'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해 그곳을 다스리도록 했다.
 
실제로 이 정책으로 인해 북부 또한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산남 무신들 또한 간접 통치에 만족하며 점점 산북 정부와 동화되어 갔고, 이로써 2대 정종 때는 사실상 정치적으로는 산북과 산남이 재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직 원고 반도는 문화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정종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인 연산에서부터 중원(현재의 키비코바)를 거쳐 산남의 중심지인 산구까지 이어지는 국도를 건설하여 산남과 산북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도록 유도했고, 실제로 연산에서 산구로 가는 시간이 대폭 단축되면서 각 지방의 특산품 거래가 활발해졌고, 이에 따라 국도의 거점 거점마다 시장이 형성되고 이 시장은 문화 교류의 허브로 성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원고 반도의 문화적 정체성 회복은 대성공으로 끝나게 되었다.
 
한편 시장의 형성은 중인들에게도 큰 이득을 주었다. 중인들은 기본적으로 북하 시절부터 쌓아놓은 부가 있어 상당한 자본을 가지고 있었고, 이 자본을 통해 상인을 매수하고 시장 거래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풍조가 지속되면서 점점 여러 시장을 장악한 대부호들이 나타났고, 이들을 마치 기업과 같이 몇몇 제품군에서 엄청난 경쟁력을 지니고 다른 경쟁 업체들을 하나하나 제거해가기 시작했다. 이는 추후 평범하게 장사하려는 평민들이 위축되고 중인들만이 시장을 독과점하여 행패를 부리거나, 그 와중에 중인들이 판매하는 물건들의 품질은 안 좋지만 그들 말고 다른 상인들은 거의 다 장사를 접어 결국 중인의 것을 살 수밖에 없는, 크나큰 문제를 불러오게 된다. 이렇게 지방에서 중인들의 폐단이 커지는 동시에, 중앙정부에서는 청년 무인들이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면서 개국공신들의 폐단은 커져만 갔다.
 
결국 3대 성종은 남주 고조가 시행했던 정훈 정책을 단행하여 개국공신들의 부풀려진 공들을 축소시키고 그들의 권리를 대폭 제한했다. 이 중심에는 성종 뿐만 아니라 태조와 함께 연나라를 건국하고 정종을 보좌했던 정대석의 제자이자 문신 세력의 대표, 주경인이 있었다. 무신들과 중인들이 당연하게도 정훈 정책에 반발하자, 주경인은 살생부라는 상당히 잔인한 방식을 사용했다. 펑원전 2292년 5월 31일 밤, 주경인은 정훈 정책에 대해 토론의 장을 연다며 성종의 지원을 받아 연산궁에 연회를 개최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무신들과 중인들은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술이 들어가면서 긴장을 풀기 시작했고, 미리 명령을 받은 문신들은 일부러 술을 안 마시면서 때를 기다렸다가 무신들과 중인들이 술에 취한 틈을 타 가져온 단도로 학살을 시작했다. 이를 경신정난이라 하며, 이 사건으로 인해 중인 세력과 청년 무신 세력은 몰락하고 시장의 빈자리는 일반 상인들이, 중앙 정부의 빈 자리는 개국공신임에도 불구하고 뒤로 치우쳐져 있었던 문신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 샤우카이와 남연 ===
=== 샤우카이와 남연 ===
A.D.1126~A.D.1421(295년)
A.D.1126~A.D.1421(295년)

2024년 2월 16일 (금) 14:16 판


원고국의 역사
元高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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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원고국의 역사 전반을 다룬 문서이다.

선조시대

B.C.120000?~B.C.361

인류의 도래와 올데루인의 대이동

구석기 시대 칠서를 넘어 본격적으로 천호 대륙으로 확장하기 시작한 인류는 빙하기의 영향으로 육지 상태였던 근천해를 가로질러 세화, 다이토와 등 현재는 섬나라인 지역뿐만 아니라 더 멀리 원고 지역까지 발을 들였다. 이들이 바로 현생 원고인의 조상중 하나인 선주인으로, 선주인은 훗날 이주한 올데루인과 피가 섞인 끝에 현재의 원고인으로 변화했다. 선주인들 중 일부는 해수면 상승 이전에 다이토와로 이주하여 동부 다이토와 민족의 조상이 되기도 했다.

선주인의 정착 이후 빙하기가 끝나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원고 반도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원고 반도에서 구석기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보통 지각활동이 드문 중·동부에 대규모 군락이 형성되었다. 이시기의 유명한 화석·유적으로는 닌신사미인과 쿠루베마 유적이 있다.

선주인의 전성시대는 구석기 시대를 지난 신석기 시대까지 지속되었으나, 청동기 시대 초반 남쪽의 랴오 고원에 서 올데루인이 이주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올데루인은 랴오의 여러 민족끼리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와 북쪽의 원고 반도로 대이동을 거쳤으며, 그와 함께 당시 선주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체계적으로 발전한 농경문화와 선주인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청동기 제련 기술이 함께 도입되었다. 그렇게 신문물을 가지고 들어온 올데루인과 선주인의 사회가 융합되면서 원고국의 사회는 커다란 변혁을 맞이했다. 현재 올데루인 혈통의 원고인이 전체 인구의 87%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이주한 올데루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할 수 있다.

구원고 연맹의 형성

청동기와 함께 랴오 고원에서 원고 반도로 이주한 올데루인은 선진 기술을 통해 원고인의 지배 계층으로 군림하였으며, 반도의 중심 지역인 키비오시 지역에는 고도로 발전한 청동게 문화를 지닌 여러 부족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이렇게 여러 세력이 난립하며 혼란했던 시대를 끝낸 주역이 바로 페노만 일족이 다스리는 '태양 부족'으로, 그들은 현재 우리가 원고 신화라 부르는 태양 신앙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 및 회유하며 세력을 넓힌 끝에 결국 그들의 본거지인 현재의 세논루메 지역뿐만 아니라 키비오시 전체를 지배하는 구원고 연맹을 형성하고 연맹의 맹주로 군림하였다.

그렇게 형성된 구원고 연맹은 청동기 시대에서 벗어나 칠서와 다이토와로부터 여러 신진 문물을 도입하여 점점 철기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태양국 제 8대 왕인 의강왕의 치세에 구원고 연맹은 랴오족의 침입을 격퇴한 뒤 그들을 쫓아 끝내 항복시키고 옆나라 바이당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키비오시 지역이 워낙 넓고 각 연맹국들의 규모도 맹주인 태양국에 절대 꿇리지 않아 구원고 연맹은 연맹국들을 완전히 통합한 고대국가로 나아가지 못했으며, 또한 맹주인 태양국이 남방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연맹국들이 이에 반감을 표하며 연맹의 결속력도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진국의 왕인 진성대수가 태양국을 공격하여 태양국 마지막 왕인 평문도민을 죽이고 페노만 일가를 몰살하며 구원고 연맹은 붕괴했다.

오조시대

B.C.361~A.D.189

연맹의 분열과 사제십칠후시대

현재의 울주 동남부에서 형성된 진국은 점차 성장하며 태양국에 버금가는 구원고 연맹 서부의 패자로 자리매김했고, 끝내 진성대수가 태양국을 멸하며 진은 원고 반도 서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한편 태양국이라는 연맹의 구심점이 사라지자 지방의 연맹국들이 독립하여 서로 전쟁을 치루고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으며, 그 와중에 남방 건조지대에서 랴오인들과 원고인들에 끼여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호시타인들도 세력을 갖춰 남진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원고 반도의 대혼란기가 시작되고, 반도 중북부에 한정되었던 원고인들의 민족성이 반도 전체로 확대되는 순간이었다.

연맹이 분열되면서 난립하던 170여개의 소국들은 점차 진국 등 주변의 영향력이 큰 국가들에게 흡수되기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중원을 진이 평정하고 주변에서도 남한이나 전제 등 괄목할 만한 규모를 지닌 국가들이 출몰하면서 중원의 패권에 대해 도전하는 십칠후와 중원을 지배하면서 십칠후를 막아내려는 사제의 대결구도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원고 반도의 패권을 두고 여러 나라들이 수백년간 맞붙으면서 원고 반도는 그야말로 살육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으로 전락했고, 그러한 혼란을 어떻게 멈춰야 하느냐에 대한 사상은 훗날 제자백가를 거쳐 양치 사상으로 발전했다.

동오와 남명이 세문산을 기준으로 남부를 잠시 평정한 이후로는 십칠후 국가들 사이에서 통일을 위한 시도가 여러 차례 지속되었으며, 끝내 백화를 멸한 휼평이 서남부를 통합하며 십칠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같은 시기 당나라가 멸망한 후 중원에 세워진 만목이 반도 동부 전체를 평정하고, 울주 서북부에서 구원고 연맹의 부활을 외치던 광량이 발흥하여 녹주와 명주를 정복하며 400여년 동안 지속되었던 사제십칠후시대는 끝이 났다.

천하삼분

사제십칠후시대 때 나타난 여러 군주들의 온갖 인간군상은 후대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국가 운영에 대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깨닫게 하는 교과서가 되어주었고, 그 깨달음은 곧 제자백가와 결합하여 양치 사상으로 발전했다. 사제처럼 100년간 국가를 보존하는 것도 힘겨워하다가 끝내 다른 왕조에 의해 멸망하지 않으려면 내부 민심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십칠후처럼 북부에서 도망쳐온 사제의 후계국들이나 더 나은 환경을 위해 남부에서 치고 올라온 이방인 등 외적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국제 정세를 어떻게 판단하고 군사 편제를 어떻게 정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제 막 새 국가를 세워 천하를 삼분한 젊은 군주들은 알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동안 재야에 묻혀있던 수많은 능력있는 사상가들이 등용되었고 뛰어난 정치가와 뛰어난 명장들이 대거 등장했다.

사제십칠후시대가 끝나고 삼국시대가 시작될 무렵 수백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인해 반도는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고, 이는 기반을 잃은 지방 세력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삼국에는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중앙 정치기구와 행정체계는 여러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렇듯 대대적 재정비 기간을 거치던 삼국은 아직 국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멋대로 서로를 침공하지 않았고, 이 기류는 약 40년간 지속되어 구원고 연맹의 붕괴 이후 원고 반도는 오랜만에 달콤한 평화를 누렸다.

40년 후 삼국시대 후반, 만목은 삼국 중 가장 넓은 영토, 많은 인구, 그리고 사의비류로 대표되는 황제 주변의 훌륭한 재상들과 그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황제의 능력 덕분에 국력을 비교적 빠르게 회복했다. 반면 휼평은 랴오 고원을 통일한 토로체마인들에게 지속적인 침공을 받으면서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고, 오진명을 이은 광량의 다음 황제 오진서중은 선대 황제가 쌓아올린 업적을 다 무너트리고 내놓는 정책마다 실패하며 국력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기회로 여긴 고종은 광량이 내부 사정으로 어지러울 때 잽싸게 녹주로 군대를 끌고 가 승리하였으며, 곧 오진서중의 항복을 받아내 광량을 멸망시켰다. 이후 토로체마인들과 동맹을 맺어 휼평을 공격하고, 휼평이 만목에게 항복한 후 동맹을 깨고 만목을 침공한 토로체마 군대마저 물리치는데 성공하면서 만목은 구원고 연맹의 멸망 이후 약 450년만에 원고 반도를 통일했다.

목연시대

A.D.189~A.D.1421

통일 만목

A.D.189~A.D.543(354년) 만목이 휼평을 흡수하고 토로체마족을 몰아내면서 수백년간 분열되었던 원고 반도는 다시 통합되었다. 이로 인해 그전까지 지역마다 달랐던 화폐, 단위, 문자, 제도 등이 모두 일체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통일 전까지 남남이었던 원고인들의 통일된 민족성과 문화도 생겨났다. 또한 원고 반도의 전통 신앙인 태양교를 국가적 종교인 양교로 개편하여 황제의 통치를 정당화하였고, 사제십칠후시대에 들어온 군현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전국을 24개 군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등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를 완성하였다. 한편 만목 초기 예종의 주도 하에 여러가지 사상이 섞여 있어 완벽하지 않았던 양치 사상이 획일화되고, 양치 사상에 양교를 융합시켜 정치와 종교를 일체화하고, 양치 사상의 법령인 율령이 정비되는 등 사제십칠후시대에 나타난 양치 사상이 본격적인 원고 철학의 기반으로 성장했다.

만목의 주요 집권층은 바로 산족으로, 이들은 사제십칠후시대 때 전란을 피해 주로 산간지대에서 생활하며 여러 독자적인 사상, 즉 제자백가를 발전시켜 나간 주역이었다. 이후 삼국시대 때 본격적으로 양치 이념이 중앙정치에 도입되며 산족 또한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만목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고종이 자국뿐 아니라 휼평과 광양에서 활약했던 산족 또한 적극 등용하면서 산족의 몸집은 급격히 불어났다. 한편 산족 중 세력을 키워 가문 단위로 성장한 자들은 황족과의 결혼을 통해 외척이 되었고, 외척들은 권력 보호를 위해 골품제를 도입하여 세력이 약한 인물들의 정계 진출에 제약을 두었다. 결국 이는 추후 만목 지도부의 폐단이 쌓여 끝내 만목이 멸망하고 남북조시대가 시작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구원고 연맹 시대에 바이당과 원고 반도에만 국한되었던 원고 중심의 중화사상은 그마저도 연맹이 분열하면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만목이 반도를 통일하고 주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원고인이 주도하는 동천호의 외교 체제가 다시금 형성되었다. 만목은 역사적으로 매우 가까웠던 바이당과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야만족 취급했던 랴오인과도 교류하기 시작하며 랴오 고원의 몇몇 부족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때로는 그들을 도와 적대적인 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정종의 치세부터 만목은 칠서와 다이토와 등으로부터 신문물을 도입하며 율령을 재정비하고 서천호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큰 발전을 이룩했는데, 이때 해로 무역뿐만 아니라 육로, 즉 실크로드 무역도 활발해지면서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던 바이당이 중요해졌고, 이것은 만목이 유독 바이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헌종의 치세 때 양치 사상이 여러 산족 관료들에 의해 체계화되고, 신문물이 적극 도입되면서 전성기의 기반이 다져졌다. 이후 헌종의 아들인 무종이 활발한 정복활동을 통해 주변국을 복속시키면서 만목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되었고 그 전성기는 태종 때 절정에 잘했다. 태종은 랴오의 왕과 만목의 공주를 결혼시켜 친선관계를 도모했고, 무종이 복속시킨 북바이당에 교지를 설치하여 효율적인 통치를 꾀했다. 또한 수도 및 주요 도시에 경원을 설치하여 경찰 업무와 소방 업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이시기 만목의 문화 또한 신문물의 영향을 받아 금속공예가 발전하는 등 화려하게 빛났다. 그러나 이미 태종의 선대 황제인 정종부터 시행된 골품제의 폐단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자 관직 진출의 한계에 대한 4두품 귀족들의 반발은 곧 산발적인 반란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의 3두품 가문들은 그들이 다스리는 지역에 성을 쌓고 스스로 지방 치안을 도맡으며 서서히 호족으로 성장했다. 결국 4두품 장수인 객진수문이 난을 일으켜 성공한 뒤 만목 마지막 황제인 애종에게 선양을 받는 식으로 만목을 멸망시키고 북진을 세웠으며, 그틈을 타 남부에서 할거하기 시작한 호족들을 남당이 통합하면서 만목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다.

남북조시대

543~755(212년)

만목 멸망 ~ 남당 멸망

시작부터 선양으로 포장된 쿠데타로 인해 세워진 북진과 지방 곳곳을 나눠 통치하던 호족들을 어설프게 통합시킨 남당이 오래 지속될 리 만무했다. 남당의 초대 황제인 이경해는 그나마 호족을 적절히 견제하는 정책을 펴며 지방을 안정시켰으나, 북진을 세운 객진수문은 초장부터 철권통치를 휘둘러 나라를 세운 지 3년만에 조카의 반란으로 인해 최후를 맞이하고 마는 등 산북은 산남에 비해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결국 북진은 세워진 지 30여년만에 효별개무의 난으로 멸망하고, 남당의 2대 황제 이경상대 또한 호족 통합정책을 보기 좋게 말아먹고 수도까지 쳐들어온 호족들의 강요로 그들의 지방권력 행사를 공인하는 등 만목의 멸망 이후 원고 반도에는 멀쩡한 부분이 없었다.

반란에 성공해 북진을 멸망시킨 효별개무는 곧 지방을 통제하고 북제를 세웠다. 효별개무는 감부를 설치하여 북진 시대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권력을 정점에 올리는 한편 황족과 일반 귀족의 관직 진출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는 등 귀족에 대한 권리도 어느 정도 인정해줌으로써 황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북제는 북진에 비해 더 안정된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렇게 국가 내부의 혼란한 상황이 해결되자 북제의 지략가들 사이에서는 산남을 정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오가기 시작했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산북 정통론이 대두하게 된다. 북제가 남당을 침공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자 남당의 지배 세력이던 호족들 사이에서는 북제의 통일을 지원한 뒤 그 댓가로 북제의 보호 하에 권력을 누리자는 환침론과 남당 조정에 비해 북제는 믿을 게 못되니 차라리 지금 북제를 물리쳐 당분간 산남은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자는 항전론이 충돌하였다. 항전파는 일찍이 만목 후기부터 성장한 호족의 일파로서 중앙정권을 장악하고 기득권으로 자리매김했으나, 남당의 지방분권화 이후 뒤늦게 성장한 신흥 호족들은 북제를 도구 삼아 현재의 기득권 세력인 주전파를 제거하고 공신으로써 중앙 정계에 진출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환침파는 곁다리 세력으로써 목소리가 매우 작았고, 논리 자체도 박약하여 항전파에 비해 그리 큰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결국 논쟁을 통해서는 힘을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한 환침파는 황백산을 내세워 조정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항전파 인사인 사유혼이 반란을 진압하고 정계를 장악하면서 항전론이 환침론을 완전히 짓누르게 되었다.

남당 정국을 장악한 사유혼은 개령산성을 짓고 환침론파 호족들이 소유했던 사병을 혁파하여 모두 정규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북제의 침략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한편, 북제는 상황이 달랐다. 한창 산남 침공을 준비하던 효별개무가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승하하고 그의 어린 아들 헌종(효별상지)이 즉위하자, 산남 정벌에 반대하던 주화파는 효별개무를 이은 주전파의 대표주자인 감부장 연무위를 견제하기 위해 헌종을 등에 업고 조정을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효별개무 즉위 시절에도 산남 정복에 대한 반대가 많았다가 막강한 왕권을 지녔던 효별개무의 사후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이다. 이처럼 주화파가 기어오르려는 시도를 하자 연무위는 결국 밤새 군대를 파견하여 주요 주화파 인사들을 암살하고 헌종을 납치하여 감부에 머물게 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연무위의 쿠데타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마침내 북제는 남당을 침공했으며 명분 부족으로 처리하지 못한 남은 주화파 세력들을 전장에 내보내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켜 오히려 사기가 저하되는 현상이 나타났고 결국 북제군은 남당군의 철저한 방어에 막혀 개령산성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때를 틈타 개령산성에 파견되지 않은 남당군은 개령산 저지대를 통해 방어태세가 갖춰지지 않은 북제군의 옆구리를 노렸고 작전은 대성공, 결국 북제군 대부분이 포위섬멸당하고 잔여 병력은 패퇴하고 말았다. 남은 병력의 지휘관이자 주화파 세력이었던 이연국은 남은 병력들을 이끌고 현재 원주 남부의 숲으로 숨어들었는데, 부하 장수들과의 논의 끝에 승산 없는 전쟁을 계속하지 말고 아예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였으며 결국 그들은 연산으로 진격하였다.

북제의 수도 연산에서 전황도 잘 모른 채로 방탕한 생활을 누리고 있던 연무위는 이연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허둥지둥 사병들을 모아 반란에 대응하였으나 실전 경험을 쌓은 장수들에 비하면 오합지졸일 뿐이었고, 결국 연무위는 패퇴하여 헌종을 놔두고 옛 광양 땅으로 도망쳤으며 연산은 이연국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후 이연국이 효별상지를 폐위하고 북하를 세웠으며, 연무위는 녹주에서 북송을 세우며 산북은 둘로 분열되었다. 같은 시각 개령산성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사유혼은 수도인 산구로 돌아와 영웅으로 대접받았으며 이미 그의 영향력은 평범한 호족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어버린 지 오래였다. 결국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남당의 4대 황제 목종(이경운강)이 사유혼에게 선양하면서 남당이 멸망하고 남주가 건국되었다.

남주 건국 ~ 북연의 통일

남주의 역사는 크게 두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호족 세력 약화와 중앙집권화에 성공하여 태평성대를 이룬 고조(사유혼)의 치세와, 아버지가 일궈놓은 국력을 보기좋게 탕진하고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데다 숙청과 살인까지 즐겼던 천하의 폭군 말제(사유곽)의 치세가 그것이다.

우선 고조는 자신 스스로도 호족 출신이였기에 현재 남주 정계를 장악한 호족들이 얼마나 무서운 세력인지 알고 있었고, 자신의 아들인 사유곽에게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앙집권화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계획을 함께할 수 있는 지지기반이 필요했고, 마침내 만목의 멸망 이후 오랫동안 세력을 잃었던 산족을 다시 등용하기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대단한 충신이었던 가정부직은 고조가 직접 하기 곤란한 여러 개혁정책들을 대신 시행했으며, 그 중 정훈 정책은 당말주초에 집권한 호족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정훈 정책으로 인해 자신들의 공훈이 축소되고 권력에 피해를 입은 호족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반역을 꾀했으나, 미리 젊은 호족들을 스파이로 심어둔 고조는 역모 현장을 샅샅이 포착해내 모두 형장으로 보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절대권력을 얻은 고조는 권력의 빈자리를 청사(기득권 호족 제거에 기여한 젊은 호족)과 신산(고조 치세 초기 새로 집권한 산족)으로 메꾸었으며 숙청당한 호족들이 비정상적으로 늘린 사유지의 절반은 신산과 청사들에게, 나머지는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눠주면서 백성들도 만족하고 포상을 확실하게 받은 공신들도 만족하는 평화로운 결과를 이뤄냈다.

반면 그의 아들 말제는 태자 시절부터 인격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고, 특히 그는 태자의 스승이기도 했던 가정부직이 한낱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르치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결국 폐제는 즉위하자마자 가정부직에게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씌워 처형하고, 나머지 신산 소속 대신들도 모조리 참하였다. 남은 청사 세력은 황제가 무서워 감히 저항하려 들지 못했고 결국 그들은 16년간 이어진 황제의 방탕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중 일부는 황제에게 아부를 떨고 그의 묵인 하에 백성들의 땅을 빼앗아 재산을 축재하기도 했다. 고조대에 번영하였던 남주는 이제는 백성의 고통밖에 남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한편 충신들에 대한 숙청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말제가 신임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유헌공이었다. 유헌공은 고조 치세 말기에 국경의 병사들을 통솔하는 장군직에 올랐는데, 말제의 즉위 이후 잦아진 두 북조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면서 말제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 길로 유헌공은 수도육군통제사의 자리까지 오르며 말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는 속으로 말제를 폭군이라 여기며 말제의 의심을 피해 정변을 계획하고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말제는 677년 유헌공이 일으킨 정변으로 인해 폐위당했으며, 남주를 멸망시킨 유헌공은 남위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한편 북하를 세운 태조 이연국은 연무위의 북송을 멸하기 위해 끊임없는 공세를 이어갔으나 태조대에는 모두 실패하였고, 차기 황제인 영종에 이르러서는 군사적 활동보다는 인구 및 생산력 증가와 지방 통제에 중점을 두었다. 북하가 다시 활발한 공격을 시작한 것은 3대 황제 무종대의 일로, 그가 즉위할 때는 한창 남주 말제가 국가를 파탄 직전까지 몰고 갈 때라 이를 기회로 여긴 무종은 풍주 동북부를 거의 휩쓸고 다니며 유헌공과도 여러 번 대치했다. 이는 남위 건국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나 성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난 뒤로는 다시 북송과의 경쟁에 집중했다. 결국 691년 5대 황제 성종이 화곡을 점령하고 북송 4대 황제 연무경이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나서야 산북은 통일되었다.

북하가 산북을 통일하고, 자연스럽게 중앙권력은 문신들이 아닌 직접 북송 멸망에 기여한 무신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성종 또한 남위를 멸하기 위해서는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중앙정부에 3보(정보, 진보, 국보)를 세워 국방, 대외 정사, 회계를 군인들이 의논토록 하였다. 그러나 성종 승하 이후로는 3보를 통해 권력의 정점에 오른 무신들이 백성들의 땅을 빼앗고 대지주로 군림하는 등 그 폐해가 심해졌고, 덩달아 6대 원종은 땅을 뺏긴 소작농들을 강제로 무신 집 노비로 넣거나 대규모 노역에 징용, 또는 군에 입대시키는 등 가혹하게 수탈했다. 이런 상황에서 평민 지주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무인들에게 뇌물을 대었고 그 댓가로 노역과 군역을 면제받고 땅의 소유를 보장받는 지정첩을 받아 가까스로 땅을 보전하였다. 이들은 평민과 무인 사이의 사회적 신분에 위치해있다고 인식되어 중인으로 불렸으며 후일 북연의 건국에 기여하여 주요 권력집단으로 성장했다.

북하가 이렇게 무신과 3보를 기점으로 국정을 운영할 무렵 남위 또한 호족을 이어 지방의 유력한 세력이 되었던 청사를 내치고 그 자리에 시무들을 앉혀 강력한 군사력 기반의 국가를 만들었다. 시무는 과거 남당 시기 호족가문 저택의 호위를 담당하던 무인 계층이었는데, 남주의 호족 숙청에 기여하고 중앙군에 등용되며 점차 힘을 키웠고, 최종적으로 시무 집안 출신인 성조 유헌공이 남위를 세우며 지배 계층으로 군림하였다. 성조는 국내에서 반란이 터지거나 외적이 침입해오면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지방을 시무들이 직접 다스리도록 하고 군사력까지 분할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무 출신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았던 시무들은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지방을 충실하게 다스렸다. 그러나 3대 황제인 혜종이 24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외척인 선진빈무가 아기인 4대 의종을 꼭두각시로 전락시키고 권력의 정점에 서자, 시무들은 선진씨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위권파와 나라에 반기를 들 수 없다는 주화파로 나뉘었고 이는 결국 거대한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내전은 다름아닌 북하를 멸하고 세워진 연나라에 의해 종결됐다. 북하 9대 황제 목종 대에 이르러서는 조정을 장악한 무신들 내에서도 원로 무신들에 비해 젊은 무신들이 차별받는 등 신분적 폐해가 심해지고 있었고, 몰락한 문신들은 경제력이 있으나 신분은 낮은 중인들과 연대하여 사회적 지위 상승을 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무인들 중 하나인 죽문신양은 목종 재위 초기에 일어난 농민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정부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고, 대표적 몰락 문신이었던 정대석은 죽문신양과 연합하여 청년 무인-몰락 문신-중인에 이르는 거대한 사회적 동맹을 형성하고자 했다. 결국 서로의 사람됨을 알아본 죽문신양과 정대석은 국신사를 설립하여 하나의 큰 세력으로 성장했고, 그 위세는 정부마저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10대 민종은 국신사를 반란 세력으로 규정하고 진압을 명령했으나 국신사 또한 청년 무인들로 인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정부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국신사는 역으로 황궁을 점령하고 민종에게 항복을 받아내어 북하를 멸망시키고 연을 세웠다. 연의 황제로 추대받은 죽문신양은 산북이 비로소 안정되자 한창 내전중인 남위에 눈을 돌렸고 결국 군대를 일으켜 산남으로 쳐들어가 내전의 양대 세력에게 모두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산남을 정복하고 만목 멸망 이후 212년만에 원고 반도를 통일했다.

북연의 재통일

A.D.755~A.D.1126(371년) 연나라에 의해 원고 반도는 200여년만에 통일되었으나, 그동안 벌어진 남북의 문화적 차이를 메꾸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연 태조 죽문신양은 산북과 산남 권역을 나누어 다른 방식으로 통치했다. 먼저, 산북 지방은 이미 중앙통치체제가 완성되었기에 기득권 무신들을 제거하고 역성혁명에 참가한 청년 무인,몰락 문신,중인을 곧바로 등용하여 중앙정부의 변혁을 시행했고, 남당 시대의 호족 정치에서부터 파생된 지방분권적 성향이 강한 산남은 바로 중앙에서 통제하기엔 무리가 있었으므로 기존의 산남을 다스리던 무신들에게 적당한 권력을 하사하고 적침의 위험이 높은 국경 지대에 일명 '10계'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해 그곳을 다스리도록 했다.

실제로 이 정책으로 인해 북부 또한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산남 무신들 또한 간접 통치에 만족하며 점점 산북 정부와 동화되어 갔고, 이로써 2대 정종 때는 사실상 정치적으로는 산북과 산남이 재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직 원고 반도는 문화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정종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인 연산에서부터 중원(현재의 키비코바)를 거쳐 산남의 중심지인 산구까지 이어지는 국도를 건설하여 산남과 산북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도록 유도했고, 실제로 연산에서 산구로 가는 시간이 대폭 단축되면서 각 지방의 특산품 거래가 활발해졌고, 이에 따라 국도의 거점 거점마다 시장이 형성되고 이 시장은 문화 교류의 허브로 성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원고 반도의 문화적 정체성 회복은 대성공으로 끝나게 되었다.

한편 시장의 형성은 중인들에게도 큰 이득을 주었다. 중인들은 기본적으로 북하 시절부터 쌓아놓은 부가 있어 상당한 자본을 가지고 있었고, 이 자본을 통해 상인을 매수하고 시장 거래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풍조가 지속되면서 점점 여러 시장을 장악한 대부호들이 나타났고, 이들을 마치 기업과 같이 몇몇 제품군에서 엄청난 경쟁력을 지니고 다른 경쟁 업체들을 하나하나 제거해가기 시작했다. 이는 추후 평범하게 장사하려는 평민들이 위축되고 중인들만이 시장을 독과점하여 행패를 부리거나, 그 와중에 중인들이 판매하는 물건들의 품질은 안 좋지만 그들 말고 다른 상인들은 거의 다 장사를 접어 결국 중인의 것을 살 수밖에 없는, 크나큰 문제를 불러오게 된다. 이렇게 지방에서 중인들의 폐단이 커지는 동시에, 중앙정부에서는 청년 무인들이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면서 개국공신들의 폐단은 커져만 갔다.

결국 3대 성종은 남주 고조가 시행했던 정훈 정책을 단행하여 개국공신들의 부풀려진 공들을 축소시키고 그들의 권리를 대폭 제한했다. 이 중심에는 성종 뿐만 아니라 태조와 함께 연나라를 건국하고 정종을 보좌했던 정대석의 제자이자 문신 세력의 대표, 주경인이 있었다. 무신들과 중인들이 당연하게도 정훈 정책에 반발하자, 주경인은 살생부라는 상당히 잔인한 방식을 사용했다. 펑원전 2292년 5월 31일 밤, 주경인은 정훈 정책에 대해 토론의 장을 연다며 성종의 지원을 받아 연산궁에 연회를 개최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무신들과 중인들은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술이 들어가면서 긴장을 풀기 시작했고, 미리 명령을 받은 문신들은 일부러 술을 안 마시면서 때를 기다렸다가 무신들과 중인들이 술에 취한 틈을 타 가져온 단도로 학살을 시작했다. 이를 경신정난이라 하며, 이 사건으로 인해 중인 세력과 청년 무신 세력은 몰락하고 시장의 빈자리는 일반 상인들이, 중앙 정부의 빈 자리는 개국공신임에도 불구하고 뒤로 치우쳐져 있었던 문신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샤우카이와 남연

A.D.1126~A.D.1421(295년)

근세

A.D.1421~A.D.1874(453년)

연의 멸망, 그리고 테지니 시대

선원고국 초기 전성기와 신원로파 정권

선원고국 후기 전성기와 신관파 정권

근대

A.D.1874~A.D.1945(72년)

원고제국의 수립

동천호 전쟁, 제국의 몰락

현대

A.D.1945~

위로부터의 개혁과 경제호황

화무십일홍

잃어버린 10년

경제 회복, 그리고 이제는 미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