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군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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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군주당
Liberty Monarchist Party
약칭 PLM
표어 모든 자본가, 귀족, 성직자들에게 자유를!
당가
"March of Party"
당의 행진
상징색 핑크
이념
스펙트럼 우익 ~ 극우
종교 이세계 가톨릭교회
당원  (IY 179년) 750,000,000
당직자
최고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저 6세
부지도자 율리우스 도미니크
원내지도자 카를 율리우스
역사
창당 IY 117년 4월
해산 IY 200년 3월
병합한 정당 파시오당
분당된
정당
공화군주당 (우익 세력)

황군당 (초국가주의 세력)
임페로이 사클레치아 (친엠페로우 일부 세력)

선행조직 군주당

자유시민단

후계정당 통합군주당
예하 부문
중앙당사 사클레치아 왕국 일리오스
기관지 자유지 자유군주
준군사조직 자유십자단
선거연합 친군주파
국제 부문
국제조직 국제이세계자유군주연합
자매정당 미래군주연합
의석
이세계 의회
396 / 2,200
사클레치아 지방의회
1,100 / 2,600
사클레치아 국민의회
70 / 100

자유군주당 (영어: Liberty Monarchist Party of Saculechia, 自由君主黨, LMP)은 사클레치아 왕국의 집권여당이자 자유군주주의, 강성 국민주의 성향의 정당이다. 상징색은 핑크, 정식으로는 자유군주 핑크이다.

중앙이세계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되어 있으며 선관위에서는 이 당을 보수 5, 즉 우익, 극우로 분류된다. IY 200년 8월에 친귀족 성향의 자유귀족당, 전체주의, 제국주의 성향이 강한 제국당, 대안 우파 성향인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와 통합하여 통합군주당이 되면서 소멸되었다.

IY 116년 2월 사클레치아 왕국을 지도하던 헨리 4세가 끝내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2월 혁명으로 폐위되고, 이를 주도한 세력들이 군주당에 대거 들어오게 되었다. 이 중 전제군주제를 주장하는 율리우스가 세력과 국가주의 성향의 친엠페로우 세력으로 분열되었으나 당대회를 통해 율리우스 카이저 1세가 당선됨에 따라, 117년 4월 자유군주당을 출범시킨다.

120년 4월 제12대 의회선거에서 35석으로 선전했으나 124년 5월 율리우스 카이저 1세 사후 카이저 2세가 취임하였으나 일명 필리노이의 난이라는 반군주당 운동이 터지면서 미흡한 대처로 인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잃었고 농노들과 일부 평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당에 밀려 2위로 추락하면서 130년 7월 제13대 의회선거에서는 자유당에 의해 13석으로 추락하였다. 그러나 140년 12월 제14대 의회선거를 계기로 율리우스가 세력들이 당권을 잡기 시작했고, 141년 6월 카이저 4세가 사클레치아의 황제로 즉위하여 독재 정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제15대 의회선거부터 다수당이 되었으며 제19대 의회선거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195년 5월 초대 사클레치아 지방선거에서 1,100석을 흭득하면서 승승장구하였고, 198년에는 자유귀족당, 제국당과 선거연합인 미래군주연합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결국 200년 3월 자유귀족당과 제국당 뿐만 아니라 일부 엠페로우파가 탈당하여 결성한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와 통합하게 된다.

제18대 의회선거에서는 자유군주당이 89석을 흭득하여 제1당이 되었는데, 그 중 35명의 엠페로우파 의원들이 율리우스파의 독자 행보에 반발하여 탈당을 결심하여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를 조직했으며 제19대 의회선거에서는 이 당이 15석을 흭득하게 된다. 제1대 지방선거에서도 출마한 후보 500명 중 312명을 당선시키기도 했다.

역사

사클레치아 2월 혁명

앵글로색슨계와 사클레치아계 사이에서 태어난 사클레치아 왕국의 왕인 헨리 2세는 IY 100년 3월 간접선거를 통해 38세의 나이로 취임하면서 그 동안의 국정 운영 방식이 아닌 자본가, 평민, 여성, 외국인, 노예, 군사지도자 등 각 대표를 통한 국정 운영으로 나라에 대한 기틀을 다졌고, IY(이세계년) 109년 11월에는 신생 정당인 자유당과 손잡고 함께 연립 정부를 차리게 된다. 하지만 귀족들과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사클레치아의 전통적인 분위기를 헨리 2세가 망쳤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어 110년 3월 두 번째 간접선거에서 헨리 2세가 재선을 하게 되었으나 곧바로 경제 침체가 일어났다. 그래서 헨리 2세는 새로운 경제 계획인 헨리 계획을 발표하는데, 이는 미국의 뉴딜 정책과 유사하다. 당연히 대부분의 대표는 찬성표를 던졌고 이에 대한 경제 안정화를 시작하게 된다. 한편, 평범한 그리스계 농민이었던 율리우스 이메타리우스가 살고 있는 북부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흉년이 일어났는데, 율리우스가 가지고 있던 가축이 모두 굶어죽자 농민으로서의 삶을 그만두고 자신이 그동안 모은 여행 자금으로 수도인 일리오스로 떠난다. 그 후 율리우스는 일리오스에 와서 그의 형제였던 올리베르를 만났고, 올리베르는 자본가, 농노, 평민 등을 대변할 수 있는 조직을 결성해보자는 제의를 한다. 율리우스는 이에 수락하였고 이렇게 해서 신흥 조직인 을 만들게 된다. 율리우스는 이 때부터 어느 자유주의 학자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유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올리베르는 헨리 2세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해갔다. 115년 3월 다시 만난 두 형제는,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우리는 전통을 파괴시키는 헨리 2세로부터 사클레치아의 전통을 지키고 자본가들과 함께 자유주의를 퍼뜨릴 것이다!"라는 공보를 써 일리오스 전역에 퍼뜨렸다. 그러나 헌병군에게 걸려 반역죄로 체포되는 일도 빈번했었다. 그러던 115년 5월 자본가들이 두 형제의 집에 찾아와 함께 헨리 2세를 몰아내자는 동맹을 제안했고 그 결과 의 회원 수는 300명으로 늘어나 여기에 군주주의자, 중도주의자, 보수주의자, 전통주의자, 일부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자유시민단을 조직한다. 한편 농노들은 영주들의 가혹한 행위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 틈을 타서 자유시민단은 더 많은 자본가는 물론, 국수주의자, 국민주의자, 귀족들과 합류하여 헨리 2세의 폐위를 요구했다. 115년 11월 헌병군의 대대적인 시위 진압으로 회원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본 이메타리우스 형제는 원래 목적이 헨리 2세의 폐위가 아닌 사클레치아 왕국의 체제를 바꾸자는 것으로 태세전환했으며, 116년 2월, 마침내 300만명이 무기를 들고 일리오스 궁전에서 혁명을 일으켰으니, 바로 사클레치아 2월 혁명이다. 이로 인하여 헨리 2세는 참수형으로 처형당했고, 각 국정 대표들도 세르도피아 왕국, 엘레프 공국 등으로 탈출했다.

자유군주당의 탄생

이메타리우스 형제는 향후 국정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대해 율리우스는 "자유군주제"를 주장했고, 올리베르는 "절대왕정"을 주장했다. 이 두 사람의 의견 때문에 자유시민단은 결국 분열될 가능성이 높아졌으나 이 둘이 일반 군주제를 지향하는 군주당이라는 정당에 들어가자 대부분의 자유시민단 회원들도 형제들의 말에 따르겠다며 군주당에 가입하게 된다. 117년 3월 군주당의 지도자인 밀로스 욜라키치는 저 불순세력들에 의해 군주당이 큰 위기에 빠졌다며 두 형제와 그 지지자들을 내쫒으라고 했으나 상황은 이미 늦은 상태였다. 밀로스와 그 간부들은 쫒겨났고, 끝내 당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둘은 자유시민단을 흡수하면서 곧바로 자유군주당을 탄생시킨다. 올리베르는 "황제"라는 뜻의 엠페로우라는 이름으로 개명했고, 율리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저 1세라는 이름으로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117년 5월 율리우스가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올리베르는 지지자들과 이를 옹호하는 세력들을 모아 엠페로우 이클립스를 조직하게 된다. 120년 3월

성향

자유군주당은 전제군주제와 자유국가주의를 지향하며, 율리우스파는 자유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를, 율리우스파보다 파시오 성향이 강한 엠페로우파는 국가주의, 신자유주의를 지향한다. 다만 양측 모두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스탠스를 취하지만 율리우스파는 유럽식 경제 철학을 혼합한 시장 경제를 국가의 경제 체제로 내세우자는 반면 엠페로우파는 사클레치아만의 시장 경제를 주장한다. 그 중 극소수는 시장 경제가 아닌 계획 경제를 주장하는 중도-중도진보 세력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자본가, 성직자, 귀족, 영주들의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일부 길드도 이에 대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세계 가톨릭교회를 내세우는 당이기 때문에 이를 믿는 지지 세력도 대부분 존재한다. 농촌, 중소 도시, 공업 도시를 중심으로 지지하는 자유당과는 달리, 자유군주당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지한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강경 스탠스를 취하며 동성애를 추방시키거나 동성애 시민은 아예 백성이 아닌 반역세력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율리우스 카이저 4세가 "동성애는 우리나라를 망치는 반역자들일 뿐"이라는 주장을 한 후 실제로 사클레치아의 동성애 비율은 4%에서 0.1%로 줄어드는 결과를 보이게 되었다.

이들은 사클레치아의 주변국에 많이 분포하는 엘프인들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 경멸하며 이들마저도 반역자들이라고 주장한다. 엠페로우파의 경우 오크족들은 소수의 인간보다 우월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오크 우월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나, 율리우스파는 오크족과 인간들의 평등을 추구한다며 오크와 인간간의 평등주의를 주장한다.

공화주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다. 율리우스파는 자국의 소수 공화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나 다름이 없다며 소수 공화주의자들의 척결을 주장하지만 엠페로우파는 공화주의를 아예 사회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율리우스 카이저 3세가 사회주의를 "사회에 적응적이지 못한 인간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철학은 다 거짓이다. 오히려 자신들 목적을 위해 테러를 일으킬 뿐"이라며 증오했는데, 양측 모두 사회주의 척결을 주장한다. 자유주의 색채도 강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실상은 모든 평민에게만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그 중 자본가경제협의회, 사클레치아 경제인연합, 캐피탈리스트 유니온 등의 친자본가 길드 단체들과 기독교신앙회, 신성자유단, 하나님의 축복단 등 이세계 가톨릭교회에서 파생된 신흥 종교 교단들도 이 당을 지지하고 있다.

과거에는 율리우스파가 급진파, 중도파, 온건파, 중진파 등 다양했으나 중도세력은 인도네시아 출신 중도파 정치인인 필리노이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벌인 필리노이의 난으로 인해 중도파가 쪼그라들었고 온건세력도 대부분 당 내에서 탄압당하여 이 역시 다수가 사라졌다. 충성파는 초기에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충성파, 급진파가 다수 들어오면서 주류 세력이 되었다.

각주


사클레치아 국민의회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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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국민의회 220.02 ~ 221.10
호르스트 엘벤 내각
221.09 ~ 221.10
여당

통합군주당
56석

공명연단
3석

미래신화당
1석
야당

민주당
26석

자유당
10석

무소속
3+1석
재적 100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