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클레치아 국민의회
원내 구성
[ 펼치기 · 접기 ]
제24대 국민의회 220.02 ~ 221.10
호르스트 엘벤 내각
221.09 ~ 221.10
여당

통합군주당
56석

공명연단
3석

미래신화당
1석
야당

민주당
26석

자유당
10석

무소속
3+1석
재적 100석
사클레치아 왕국의 자유주의 정당
민주국민당 민주당 민주당 민주당
자유당
(개별 합류)
사회당
(개별 합류)
카네이션 연합 민주대안당
입헌민주당
사클레치아 민주당
Democratic Party of Saculechia
약칭
DPS
표어
다음 세대로의 민주주의
(Democracy To The Next Generation)
창당일
186년 6월(1986년 6월)
통합한 정당
민주대안당(214년 5월 흡수합당)
전신
자유당(개별 합류)
민주국민당
사회당(개별 합류)
입헌민주당
카네이션 연합
중앙 당사
사클레치아 일리오스
이념
사회민주주의
반군주주의
자유권 확대
평등주의

내부계파:
중도주의
사회자유주의
풀뿌리 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사회주의

스펙트럼
중도좌파 ~ 좌익
좌익 빅텐트
당수
루이스 반 루카스테른
부당수
알베르트 루터 폰 아인츠베른
원내대표
엘라스 라파엘
사무총장
오스카르 오클레나
국민의회
26석 / 100석 (26%)
지방의회
918석 / 2600석 (35.26%)
주지사
2석 / 15석 (13.36%)
이세계 의회
86석 / 2200석 (4.67%)
당색
파란색 (#005CA9)
국제 조직
국제이세계민주연합
(이세계 의회 소속 교섭단체)
당원 수
484,619명(220년 기준)
학생 조직
민주학생모임
청년 조직
청년민주단
당보
민주주의
홈페이지

사클레치아 민주당(Democratic Party of Saculechia, DPS)는 사클레치아 왕국의 제1야당이자 사회민주주의와 중도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다. 상징색은 파랑색이다. 현재 사클레치아 국민의회에서는 제2당이다.

IY 186년 6월 자유당, 사회당의 일부 당파 등 2개 정당과 카네이션 연합 등 시민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하였으며 처음에는 율리우스 5세가 이를 불법정당으로 인식하고 해산을 시도한 바가 있었으나, 일리오스 광장에서 제1차 당대회를 열어 무려 1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동시에 군주당 해산과 율리우스 5세의 퇴진, 정치 탄압 중단을 촉구하였고 이에 따라 민주당원의 수는 1만명에서 3만명으로 증가하였고, 거기에 자유당이 동참하면서 더욱 거세지면서 율리우스 5세가 정치단체, 정당 설립과 활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정당임을 인정하였다.

19대 총선에서 12석으로 원내 진출을 시작하였고, 20대 총선에서는 자유당과 49석을 얻어 총 59석의 연립 정부로 부상한다. 그러나 21대 총선에서 야당이 되었고 209년 율리우스 아페렌스 총리의 돈세탁 의혹으로 물러나자 의장이 21대 의회 해산을 선언하면서 야당들은 때를 노리긴 했지만 당 내 16명의 중도좌파 성향 의원들이 민주당이 지나치게 우경화되었다며 탈당을 선언하면서 민주대안당을 창당함에 따라 진보진영에 금이 가는 듯 싶었으나 22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44석, 자유당이 20석으로 총 64석을 흭득하여 다시 한번 자유당과 연립여당이 된다. 그러나 민주대안당의 지지율이 자유당 지지율을 흡수하여 점점 증가하였고 지지율이 10%에 불과했던 통합군주당이 공명연단과 선거연합을 맺어 18%를 기록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자 민주당-자유당은 동반 하락, 결국 23대 총선에서 참패하여 제1당 자리를 내주었고 자유당은 10석이 되면서 교섭단체를 잃을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23대 총선 이후 여당 의원들의 각종 사고와 선거법 위반 등으로 인하여 매년 공석이 생기던 216년 재보궐선거부터 3년동안 자유당과 공동 압승하여 통합군주당-공명연단 연합미래신화당 연립 정권을 무력화시켰고 집권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24대 총선에서 민주당과 자유당, 무소속 3석을 포함하여 39석을 얻으면서 참패를 당했고 동시에 UMP-KE에게 제1당 자리를 내주었다.

221년 사클레치아 반정부 시위가 터지고, 조기 총선이 발표됨에 따라 자유당과 함께 유력한 야당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역사

창당

186년 1월 자유당은 율리우스 5세를 비판하기에 바쁜 상황이었고, 백성들과 자유당원들은 세력이 약한 자유당으로는 도저히 율리우스 5세를 비판할 힘이 없다며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율리우스 5세를 비판하는 정치인들이 이를 대변하기 위한 정당을 만들자는 계획을 준비했고, 20명을 중심으로 창당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4월이 되자, 당명을 민주당으로 정해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원은 여전하며 사클레치아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당의 창당이 어려워진 상태였다. 그러던 중, 카네이션 연합이 민주당사를 방문해 합류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다. 민주당 창준위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해산되고 카네이션 연합에 들어가게 된다. 그 중 민주당원 중 하나였던 마르쿠스 펠릭스가 카네이션 연합의 대표가 되었고 민주정당 통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6월이 되면서 각 야당 대표들은 민주정당 전당대회를 7월에 열 것으로 합의했다. 여기에 시민단체와 자유당/사회당 탈당파도 민주당 참여에 합류했는데 자유당도 민주당 참여를 위해 민주계 대다수가 탈당한 상황이었고, 사회당도 당 내 갈등으로 중도파가 사회당과 결별한 상태였다. 이어 입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입헌민주당과 사회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민주국민당도 참여하여 합당 움직임이 보이게 되었다. 이후 카네이션 연합이 추천한 150여 명의 의원단을 중심으로 투표를 진행했고, 투표 결과 전원이 찬성하면서 합당을 선언한 끝에 드디어 민주당을 창당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당은 자유당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율리우스 5세는 민주당을 반국가단체로 인식하여 해산을 시도했다는 점과, 당시 민주당 합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점차 우경화되면서 원외 우익정당인 국민당을 만들어 민주당 창당을 방해했다는 점으로 인해 민주당의 활동을 하기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수도에 민주당의 첫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큰 성공을 보였다.

19대 총선에서의 진출, 20대 총선 대약진

자유군주당과 자유당이 19대 총선을 준비하는 사이 민주당도 총선 준비에 나섰다. 민주당은 정파별로 나뉘어 군주당의 텃밭이던 자일리온주의 모든 선거구에 9명, 자카르파티야주에는 4개 선거구에 후보를 전략으로 공천했다. 당수인 펠릭스는 일리오스 시티 제3구에 출마하여 대규모 유세를 펼쳤다.

190년 4월 노르문티아주 4구에 출마했던 페르소니아 마르쿠스 후보가 사망하자 사클레치아의 새벽의 당원임이 밝혀져 분노와 안타까움을 샀다. 이 와중에 군주당은 19대 총선 결과, 군주당이 보수당, 공명당과 합쳐 73석을 흭득했지만 자유당과 함께 26석을 얻어 원내에 입성하였다. 펠릭스도 이 선거에서 당선되어 의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191년 3월부터 부당수를 신설하여 펠릭스계 의원인 알렉산드르 체리페츠를 부당수로 임명하였다. 그 후 올바른 방법으로 군주당의 행보와 정부를 비판하였고, 민주당의 백성 소통을 토대로 지지율이 급상승하기 시작했고, 자유당도 이미 특이한 방법으로 지지율이 16%까지 올라갔다. 192년 3월에는 점점 군주당을 쫒아가다가 193년 1월 여론조사에서는 31.4%로 군주당 지지율 29.8%를 넘어 추월에 성공하였다. 193년 3월 율리우스 6세가 국가시장제도를 도입하려 하자, 자유당과 민주당이 적극 반대하였고, 백성들도 이에 반대하면서 여론조사에서는 67.3%가 반대할 정도로 반대 여론이 높았다. 결국 민주당과 자유당, 그리고 기타 진보정당들은 국가시장제 폐지를 위한 단식 투쟁을 실시하였고, 도리어 일부 의원들의 삭발식까지 강행했다. 193년 6월 율리우스 6세가 이클리우스 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왕궁 앞에서는 무려 10만 명의 사람들이 단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율리우스 6세가 돌아오자 헌병들을 동원해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쳐 총 2,659명이 부상을 당했고 59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후 194년 3월 세습 문제를 지적하며 부국왕 폐지와 총리 신설, 지방선거 실시, 총리 선출 방법 등을 담은 헌법 개정안을 자유당 전원과 군주당 일부 의원들과 발의하면서, 97명의 의원들이 찬성하면서 총리제 실시를 이끌어냈다. 이어 195년 5월 처음 실시된 지방선거에서는 690석을 흭득하면서 상당히 약진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195년 11월 민주당은 체리페츠가 건강 악화를 이유로 부당수에서 사퇴하자 제2차 전당대회를 열었다. 주류 후보에 알렉산드르 루코프스키, 가브릴로 밀로치카, 비주류 후보에 세보치크 노비크가 출마하였으며, 여론조사에서는 루코프스키가 차기 부당수 선호도 1위로 조사되었고 그 뒤로 노비크가 2위, 밀로치카가 3위로 나타났다. 전당대회 결과 루코프스키가 69.9%, 밀로치카가 13.3%, 노비크가 17.7%로 나타나면서 루코프스키가 부당수로 선출되었다. 198년 9월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이 55.3%로 일단 20대 총선에서는 제1당이 예상된다. 199년 6월 자유당은 "만약 민주당과 100석을 흭득한다면 통합 절차를 밟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여 통합론을 주장했으나 비주류계가 일부 반대하면서 묻히고 말았다. 그러던 중, 민주당과 자유당의 지지율을 합친 63.1%를 기점으로 멈추면서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지만 회복과 감소를 조금씩 띄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자유군주당이 통합군주당이 된 이후에는 지지율이 69.8% vs 19.1%로 나타났고, 결국 20대 총선에서 49석을 흭득, 자유당이 10석을 얻어 총 59석의 연립 정권이 탄생한다. 뿐만 아니라 통합군주당은 31석으로 추락한 반면 원외정당이던 노동당이 3석을 얻고 범진보 무소속도 4석을 얻어 사실상 범진보는 66석, 범보수는 34석으로 그쳤다.

1차 야당 생활

21대 총선 패배로 인해 지도부가 총사 자유당과 민주당은 결국 야당 신세가 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 205년 12월 전당대회를 열어 중도우파 성향의 앨리스 리너반이 선출되었고, 선거 직후 군주당 추천으로 새로 선출된 율리우스 아페렌스 총리는 야당의 목소리를 듣겠다며 야당과 협력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206년 1월 민주당과 연정을 제안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면서 무산되긴 했으나, 같은 해 8월 일리오스에서 유로아스피아 전쟁 피해 유족들의 진상규명 시위가 일어나면서 과거사 청산 여론이 커졌고 민주당과 자유당 등을 야당들도 이에 합류하면서 과거사 청산을 촉구하였다. 결국 아페렌스는 과거사 청산 캠페인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민주당은 "확실히, 제대로, 투명하게 과거사 청산에 임해달라"고 밝혔다. 그 후 과거사 청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자 여론조사에서는 아페렌스의 지지율은 70.1%로 상승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9년 아페렌스의 돈세탁 의혹이 불거지면서 지지율 하락을 겪자 민주당과 자유당 등 야당은 "과거사 청산으로 국정 운영하랬더니 백성들 몰래 부정부패 저지른다. 이건 백성들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가 없다"며 아페렌스 총리를 비판하면서 퇴진 운동을 주도하였다. 심지어 군주당 지지율은 36%에서 22%로 줄었고, 아페렌스 총리 역시 지지율도 54.1%까지 떨어지면서 민주당은 48.5%, 자유당은 19.9%까지 올라가면서 야당의 승리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210년 1월 16명의 중도좌파 성향 의원들이 민주당을 탈당했는데, 이들은 "민주당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닌 기득권들을 위한 우파정당이 되어 간다"며 민주당의 우경화를 비판하였다. 이후 탈당파들은 민주대안당을 창당하였고 민주당은 29석에서 13석으로 줄어들면서 교섭단체를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210년 3월 22대 총선을 4개월 앞두고 대안당은 5.1%를 기록하여 가뿐하게 3%를 넘겼고 22대 총선에서의 대안정당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커졌다. 하지만 민주당도 신뢰성을 위해 중도화를 택했으며 자유당은 백성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야권연대를 구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5월 자유당, 노동당, 사회당과 함께 야권연대를 형성한다. 22대 총선 결과 민주당은 44석으로 제1당, 자유당이 제2당이 됐지만 원외정당이 된 노동당과 사회당을 제외하고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민주당-자유당 지지세가 강한 첸트루주베뢰니크주에서는 민주대안당의 녹색 돌풍에 못 이겨 2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다시 여당으로

민주당은 22대 총선에서 다시 여당이 되었고, 자유당과의 연립 정권을 구성하여 두번째 정권교체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