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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第二次世界大戰
World War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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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939년 9월 1일 ~ 1947년 9월 2일
장소 전세계
원인 파시즘의 확산
베르사유 조약의 불공정함
세계 대공황
교전국 연합국 추축국
미국[1]
영국
중화민국
프랑스[2]
자유프랑스[3]
소련[4]
그 외 기타 연합국들
대독일국
이탈리아 왕국
대일본제국[5]
그 외 기타 추축국들
지휘관 연합국 추축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
조지 6세
윈스턴 처칠
장제스
마오쩌둥
샤를 드 골
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주코프
아돌프 히틀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
베니토 무솔리니
쇼와 덴노
도조 히데키
야마모토 이소로쿠
그 외 기타 추축국들
결과 추축국의 승리, 연합국의 패망
영향
초강대국 미국, 독일, 일본 등장, 냉전 체제 대두
OFN, 아인하이츠팍트, 대동아공영권 개설
서구 식민제국의 몰락

개요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또는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 침공부터 1947년 일중전쟁의 종결까지 약 세계 각지에서 8년간 치뤄진 전쟁이다. 1939년 추축국이 일으키고 연합국이 맞서면서 1억명 이상의 민간인/군인이 숨졌고, 수많은 경제 기반 시설과 도시들이 파괴되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라고 불린다. 또한 1990년대까지 세계 패권의 중심이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식민제국에서 미국과 독일, 일본 3극으로 옮겨간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배경

일본: 문민정부의 몰락과 대공황

독일: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

제1차 세계 대전은 유럽의 지정학적 지도를 근본에서부터 뒤바꿔놓았다. 동맹국이 패배하면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이 사라지고 1917년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소련이 수립되었다. 한편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루마니아, 그리스와 같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한 연합국은 영토를 늘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국민 국가들이 등장했다.

미래에 있을 또 다른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1919년 파리 강화회담 기간에 국제 연맹이 수립되었다. 국제 연맹의 목표는 집단안전보장, 육해군 군축, 평화적인 협상과 중재를 통한 국제 분쟁 해결로 무력 분쟁을 막는 일이었다.[6]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강력한 평화주의적 정서가 퍼졌음에도 불구하고[7] 동시기 유럽 여러 국가에서 민족통일주의보복주의내셔널리즘이 대두되었다. 이런 정서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에게 부과된 상당한 영토, 식민지, 재정적 손실이 다가오며 독일에 두드러지게 발생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자국 본토 영토의 13%와 모든 식민지를 상실했으며 독일과 타국과의 합병도 금지되었으며 배상금이 부과되었고 독일군의 규모와 전쟁능력도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8]

1918년에서 1919년 사이 독일 11월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해체하고 민주정부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전간기 기간 새 공화국의 지지층과 이를 반대하는 우익좌익 강경 반대파가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한편 이탈리아는 협상국의 일원으로 전후 영토가 늘어났다. 하지만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탈리아가 참전하는 대신 보장했던 여러 약속이 평화 협상에서 전혀 이행되지 않은 것에 분노했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은 내셔널리즘, 전체주의, 계급협조론적 의제를 가지고 대의민주정을 폐지하고 사회주의, 좌파, 자유주의 세력을 탄압하며 이탈리아를 세계 강대국으로 만들고 "신로마 제국"을 세우겠다는 공격적인 확장주의적 외교정책을 추구하며 이탈리아의 정권을 장악했다.[9]

파일:무솔리니와 히틀러.jpg
베니토 무솔리니(왼쪽)과 아돌프 히틀러(오른쪽)

아돌프 히틀러는 1923년 독일 정부 전복 시도는 실패하였으나 결국 1933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라이히스탁(의회)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독일 권력을 장악했다. 히틀러는 급진적이고 인종주의적 배경을 가진 세계 질서의 전환을 부르짖으면서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대규모 재무장에 들어갔다.[10] 한편 프랑스는 동맹국을 잡아두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이탈리아가 전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협정을 맺었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두길 원했다. 1935년 초에는 자르 분지 지역이 합법적으로 독일과 병합되고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며 재무장 계획을 가속화하고 징병제를 도입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11]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1935년 4월 군사 세계화의 중요한 단계를 밟고 있는 독일을 막기 위해 스트레사 전선을 결성했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영국이 독일과 독자적인 해군 협정을 맺어 독일의 제한을 완화시켜 버렸다. 동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을 장악하러는 독일을 우려한 소련은 프랑스에게 접근해 상호 원조 조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하지만 조약 발효 직전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을 국제 연맹의 관료제 체계를 거치도록 요구하면서 본질적인 조약 약속 자체가 무력화되었다.[12] 유럽과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우려한 미국은 같은 해 8월 중립법을 제정했다.[13]

1936년 3월 히틀러는 라인란트에 독일군을 진주시켜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을 무력화시켰다.[14] 1936년 10월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로마-베를린 추축국을 결성했다. 한달 후 독일과 일본이 방공 협정에 서명했고 다음 해에는 이탈리아도 방공 협정에 서명했다.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집권

전개

만주사변과 나치 집권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 2만여 명이 상부의 통제를 무시한 채, 중국의 만주를 공격, 탈취한 것이었다.이는 1918년 유럽에서의 대전쟁이 끝난 이래로 15년도 지나지 않아 지구에 다시한번 드리운 전운이었다.

1933년,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졌고,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며 나치 정권이 들어섰다. 나치는 집권하자마자 독일 민족의 부흥을 외쳤고, 군대를 재건하고 전 유럽에 위협을 가하며 다시한번 유럽에 전운을 감돌게 했다.

지나 전쟁

1937년 7월 7일, 흔히 마르코 폴로 다리라고 부르는 중국과 일본의 접경지대 루거우차오에서 한 병사의 실수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던 전쟁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1937년 7월 29일, 베이핑과 톈진이 함락되고 1937년 11월 상하이가, 1937년 12월에 난징이 함락되었고, 중국은 그대로 전쟁에서 패배할 듯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충칭으로 후퇴한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일본을 향한 처절한 저항의 기치를 1938년 1월, 들어올리게 됩니다.

고조

그러는 동안, 서방의 히틀러는 자신의 야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1936년,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비무장지대 라인란트를 무력화 시킨 그는, 1938년 2월, 오스트리아를 무혈 합병하며 "대독일"의 부활을 알렸다.

이어서 히틀러는 1938년 말 주데텐란트를 합병하고, 1939년 3월 체코를 병합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일본을 향한 중화민족의 처절한 저항이, 점차 일본의 발목을 잡아가고 있었다. 1938년 10월, 일본군은 수만명의 피로 우한을 함락했고, 이곳에는 피로 물든 일장기가 휘날렸다.

그리고 1938년 12월까지, 일본은 중국의 남방 해안을 공격하여, 중국의 해외 지원 루트를 차단함은 물론, 해양을 봉쇄하게 되었다.

동아시아가 점점 참화로 물들어갈 즈음, 유럽에서도 포성이 울렸다.

개전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독일군은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어 히틀러와 비밀 불가침 협정을 맺은 스탈린 역시 동쪽에서부터 폴란드를 공격했다. 1939년 9월 폴란드는 항복하였고,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되며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1940년 5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장악한 독일은 프랑스를 향한 회심의 공세를 개시했고, 1940년 6월 프랑스를 항복시켰다.

그리고 일본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해 점령하였고, 곧 프랑스 식민당국을 일본군 휘하로 격하시키며 이곳을 사실상 장악했다.

이에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그는 일본을 규탄하는 한편, 일본에 대한 제재까지 가하기 시작했다.

독소전쟁

1941년 5월 15일, 독일군은 전격적으로 소련과의 경계선을 넘었고, 독-소전쟁의 시작점이 울렸다.

대숙청으로 혼란의 도가니에 있던 소련 독일의 전격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으며, 1941년 8월에 모스크바가 함락되면서 사실상 소련은 붕괴했다.

모스크바가 함락되자, 일본군 또한 소련과의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극동을 침공했다.. 그리고 1942년 3월 21일, 레닌의 사망 18년이 되는 해 봄에, 소련은 짫은 역사를 끝마쳤다.

한편, 미국은 1941년 7월 더이상 참지 않고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를 취했다. 석유의 80%를 미국에서 수입하던 일본에게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았고, 일본은 미국에게 제재를 풀어달라며 일본의 중국과 인도차이나 이익을 보장받는 쪽으로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국은 요지부동이었고, 일본이 아시아에서 침략행위를 멈추기만을 요구했다. 결국 일본의 수상 도조 히데키와 천황 히로히토는 미국을 공격하기류 결정을 내릴수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쟁

1941년 12월 8일, 소련의 숨통이 거의 끊어져 가던 날, 일본 해군 항공대는 타이완에서 날아올라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해군기지로 진격했다.

그리고 곧,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진주만은 일본의 공격을 받았고, 이와 함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진주만공습의 결과는 그야말로 일본에게 쾌거였다. 일본은 3차례에 걸친 공격으로 미 항공모함 3척을 손실시켰으며, 항공기 320기를 파괴하고, 유류 저장고를 대파했다.

그렇게 미국은 일본에게 뜻밖의 일격을 당한 채,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1년 12월 9일 미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을 시작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하며 태평양 전쟁의 막이 올랐다.

1941년 12월 10일, 말레이 앞바다에서 일본 전투기들은 영국 해군의 신예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를 망망대해의 태평양에 가라앉혔다.

이어 1942년 4월까지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해전과 실론 해전 등에서 서구 연합군의 함대를 대파하며, 전 동남아로 진출하였으며 홍콩과 마카오 등 서구 식민지도 점령했다.

진주만에서 회심의 타격을 입은 미국은, 비틀거리며 일본 해군이 태평양을 유린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1942년 6월, 일본군은 하와이의 미드웨이 제도를 점령하고, 장기적으로 하와이에 대한 통상파괴전 및 점령에 나서는 계획을 입안했다.

이미 수차례의 참패로 태평양 중부까지 밀려난 미군은, 미드웨이에서의 결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항모 3척이 투입되는 등 무시할수 없는 전력이 미드웨이 제도로 집결했습니다.

일본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일본 연합함대 특유의 기동전을 발동하였고, 마침내 2일에 걸친 해전 끝에 그리고 1942년 6월 7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투입된 미 항모 3척이 모두 침몰했고, 니미츠 제독은 전사합니다.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대승이었으며 이제 미국은 더이상 일본이 태평양을 유린하는 것을 막을 힘이 남지 않게 되었고, 1942년 8월, 하와이가 함락되었다. 일본은 이어서 1942년 8월부터 하와이를 요새화하는 한편, 호주와 뉴질랜드를 침공할 준비를 10월까지 마쳤다.

1942년 9월, 일본 연합함대는 호주와 뉴질랜드에 침공을 시도했으나 영미연합군의 방어가 탄탄하자 포기했고, 이어서 연합군은 호주와 뉴질랜드로 일괄 후퇴했다. 이곳의 영국군과 미군은 종전 시까지 일본에 농성했고, 1942년 11월 일본은 사실상 잔존 연합군을 오세아니아로 축출함으로서 태평양의 대한 압도적, 독점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서 연합군의 해군력은 1942년 11월까지 약 11개월간의 전투로 완전무결하게 궤멸되었다. 일본은 점령한 태평양 섬들의 요새화를 1942년 12월까지 마쳤고, 1943년 1월, 마침내 영국령 인도를 침공하기 위한 임팔 작전이 승인되었다.

1943년 2월 15일, 일본군은 미얀마의 임팔지역을 넘어 영국령 인도에 들이닥쳤고, 당시 독일에게 본토가 유린당해 식민지에 신경쓸 겨를이 없던 영국 군대는 1943년 4월, 단 2개월만에 인도를 완전히 내주고 항복할수밖에 없었다.

1943년 5월, 막강한 생산력으로 해군력을 어느정도 재건한 미국은 일본을 향해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1943년 6월 북동태평양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미 해군이 참패하며, 미국의 하와이 탈환은 먼 일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다시 한번 1943년 6월에 일본 해군을 케스케이디아 해전에서 격파하고, 이어 1944년까지 일본이 점령한 섬들에 지상군을 투입하여 축출하는 "도약 작전"을 벌이지만, 1944년 5월 과달카날에서 미 해병대 10만 명이 전멸한 과달카날 전투는 일본이 밀려가던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일본은 1944년 6월부터 다시 연합함대의 총공격을 개시하고, 1944년 7월 콜론 해전에서 미 해군을 격멸하며 하와이를 사수했다.

전쟁의 피날레와 종전

한편 유럽에서 오래간 버티던 영국은 1944년 9월에 화염방사기 등을 내세운 저항에도 불구하고 본토가 함락되었습니다. 이후 영국은 독일의 괴뢰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추축국인 독일과 일본은, 1944년 12월 베를린에서 독일이 일본의 승전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며 양국의 우호를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미일간의 대치와 미군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북아프리카 전역이 계속되던 1945년 7월 4일, 미국 플로리다의 잭슨빌에는 하켄크로이츠 문양을 한 독일 폭격기가 등장했다.

폭격기는 그대로 잭슨빌을 가격했고, 이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은 14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독일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어서 1945년 7월 8일 펜실베이니아에 위치한 필라델피아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약 2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항복을 선언했고,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공모함 아카기 갑판에서 맺어진 미일강화조약은 굴욕적이었다.

미국은 하와이를 비롯한 태평양의 속령들을 일본에 양도했고, 서부의 최대도시 샌프란시스코를 일본의 조차지로 내어주어야 했다. 또한 2000억 달러의 배상금이 독일과 일본에 지급되어 양국은 이를 1000억 달러씩 나눠가졌다.

이로서, 일본은 아시아와 태평양의 주인이라는 지위를 인정받은듯 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중국은, 1947년 9월 2일 , 일본군이 충칭을 함락시키고 한때 충징이었던 잔해 위에서 "아시아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선포함으로서 완전히 잿가루가 되었고, 일본의 노예로 전락했다.

  1. 1941 ~ 1945
  2. ~ 1940
  3. 1940 ~ 1945
  4. 1941 ~ 1942
  5. 1940 ~
  6. 틀:뉴스 인용
  7. Ingram 2006, 76–78쪽.
  8. Kantowicz 1999, 149쪽.
  9. Shaw 2000, 35쪽.
  10. Brody 1999, 4쪽.
  11. Zalampas 1989, 62쪽.
  12. Mandelbaum 1988, 96쪽; Record 2005, 50쪽.
  13. Schmitz 2000, 124쪽.
  14. Adamthwaite 1992, 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