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제6차 함대법이 통과됨에 따라서 독일 황립해군은 더 강한 전함을 건조하길 바랬다. 특히, 7월 위기 이후로 심화된 독일제국과 대영제국 간의 외교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1916년 4월에 북해 상에서 양국의 해군이 조우한 사건까지 생겼다. 이 사건 당시 함대를 지휘하고 있던 라인하르트 쉐어 제독은 대영제국의 1선급 전함들을 압도할 수 있는 전함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독일 해군 무기부는 42cm 함포를 개발하여 채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1916년 11월 회의에서 추가적으로 40cm 함포와 38cm 함포로 무장한 설계안이 제안되었지만, 모두 기각되었다.
그 해 12월 설계 담당자는 42cm 주포로 무장한 함선에 대해 설계에 들어갔다. 다음 달 회의에서 선호되는 디자인은 4개의 포탑에 8개의 주포 또는 3개의 포탑에 12개의 주포로 무장한 안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3연장으로 된 포탑은 충분한 검증을 받지 못했고, 독일 해군의 오랜 전통이었던 2연장 포탑을 대체하기에는 무기부는 이르다고 판단했다. 또한, 그들은 3연장 포탑이 42cm 주포를 충분히 지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따라서 12월 20일 4개의 포탑에 8개의 42cm 주포로 무장한 선박으로 방향이 잡혔다.
해군 제독들의 건의로 대응방어가 가능한 42cm 주포로 장비된 선박을 건조해야 했지만, 그들이 감당해야 할 자원과 금액은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많은 부분 그들은 더 최적화된 설계에 기대야 했다. 나아가 그들은 내부에 많은 공간을 요구받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새로운 장갑 배치에 대한 많은 소요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의 자금은 1916년 통과된 제6차 함대법에 따라 3척의 선박에 대해 배정되었다. SMS 지크프리트과 SMS 에기르의 재정은 다음 해에 바로 지원되었고, SMS 오딘은 생산 비용이 실제보다 많이 나갔기 때문에 다음 해 배정된 재정과 함께 건조되었다. SMS 헤임달와 SMS 하겐는 그 다음 해에 되어야 예산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지크프리트와 오딘, 에기르는 각각 SMS 카이저 빌헬름 데어 그로세, SMS 카이저 카를 데어 그로세, SMS 카이저 바르바로사 를 대체했고, 헤임달와 하겐는 각각 SMS 비텔스바흐와 SMS 베틴을 대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