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저라이히 (Seojh060722): 두 판 사이의 차이

(연표 수정, 1906년 추가)
편집 요약 없음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18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카이저라이히(Kaiserreich)''' 세계관은 사라예보 사건 직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세르비아 및 대러시아 선전포고가 지체되지않고 이루어졌으며, 대 몰트케와 슐리펜에 의해서 효율적으로 수정된 슐리펜 계획이 성공하면서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이 물리적인 항복을 하고 대영제국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한 기아로 항복하여 대전쟁(Weltkrieg)이 동맹국의 승리로 끝난 세계이다.
 
'''카이저라이히(Kaiserreich)''' 세계관은 [[오스트리아 제국 황태자 부부 피격사건|사라예보 사건]] 직후 [[독일 제국(카이저라이히)|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카이저라이히)|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세르비아 및 대러시아 선전포고가 지체되지않고 이루어졌으며, 수명이 연장된 독일의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슐리펜 계획(카이저라이히)|슐리펜 계획]]의 최우선 목표를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변경함에 따라 러시아가 전쟁 초에 항복, 이어 합류한 동부전선군과 함께 벨기에 우회침공을 강행해 프랑스마저 항복하고 뒤늦게 참전한 대영제국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한 함대 궤멸과 기아로 항복하여 [[대전쟁(카이저라이히)|대전쟁(Weltkrieg)]]이 동맹국의 승리로 끝난 세계이다.


독일 제국은 전후 상수시 조약으로 하여금 협상국들을 굴복시켜 세계의 강대국으로 거듭났으며, 유럽 경제적 협력공동체인 미텔오이로파(Mitteleuropa)와 독일의 세력권인 국가협정(Reichspakt)을 창설하여 제국주의 시대의 제2전성기를 이끌고있다. 하지만, 내부에서의 정치분열과 무리한 식민지 경영, 각지 제국영토에서의 독립운동으로 독일의 모순된 제국은 점차 무너져내리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불어오는 국가대중주의와 공산주의의 물결은 전세계를 또다시 2번째 대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독일 제국은 전후 상수시 조약으로 하여금 협상국들을 굴복시켜 세계의 강대국으로 거듭났으며, 유럽 경제적 협력공동체인 미텔오이로파(Mitteleuropa)와 독일의 세력권인 국가협정(Reichspakt)을 창설하여 제국주의 시대의 제2전성기를 이끌고있다. 하지만, 내부에서의 정치분열과 무리한 식민지 경영, 각지 제국영토에서의 독립운동으로 독일의 모순된 제국은 점차 무너져내리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불어오는 국가대중주의와 공산주의의 물결은 전세계를 또다시 2번째 대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년도는 1930년이며, 전세계는 독일 제국이 이끄는 국가협정(Reichspakt), 프랑스국이 이끄는 강철조약(Pacte d'acier), 캐나다 왕국이 이끄는 신 협상국(New Entente), 토리노 코뮌이 이끄는 제3인터내셔널(Third Internationale)이 있다. 각각 권위주의 및 반동주의, 국가대중주의,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세력들이며 전세계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있는 강대세력들이다.
현재 세계관 년도는 1936년이며, 전세계는 독일 제국이 이끄는 [[국가협정(카이저라이히)|국가협정(Reichspakt)]], 프랑스국이 이끄는 [[강철조약(카이저라이히)|강철조약(Pacte d'acier)]], 캐나다 왕국이 이끄는 [[신 협상국|신 협상국(New Entente)]], 토리노 코뮌이 이끄는 [[제3인터내셔널(카이저라이히)|제3인터내셔널(Third Internationale)]]의 4개 세력에 의해서 갈라져있는 상태이다. 각 세력들은 권위주의 및 반동주의, 국가대중주의,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의 이념을 대표하며, 전세계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있는 상태이다.


===세력(Pact)===
===세력(Pact)===
31번째 줄: 32번째 줄:
|[[프랑스어]]
|[[프랑스어]]
|[[프랑스국(카이저라이히)|프랑스국]]
|[[프랑스국(카이저라이히)|프랑스국]]
|-
![[파일:캐나다 왕국 국기.png|50px]]
|[[신 협상국]]<br><i>New Entente</i>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카이저라이히)|자유민주주의]]([[조지안 데모크라시]])
|[[영어]]<br />[[프랑스어]]
|[[캐나다 왕국]]
|-
|-
![[파일:토리노 국기.png|50px]]
![[파일:토리노 국기.png|50px]]
38번째 줄: 46번째 줄:
|[[영어]]<br />[[이탈리아어]]<br />[[프랑스어]]
|[[영어]]<br />[[이탈리아어]]<br />[[프랑스어]]
|[[토리노 코뮌]]
|[[토리노 코뮌]]
|-
![[파일:캐나다 왕국 국기.png|50px]]
|[[신 협상국]]<br><i>New Entente</i>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카이저라이히)|자유민주주의]]([[캐네디안 데모크라시]])
|[[영어]]<br />[[프랑스어]]
|[[캐나다 왕국]]
|-
|-
|}
|}
50번째 줄: 51번째 줄:
===분기점===
===분기점===
현실의 지구 역사와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이 갈라지는 분기점을 다룬다.
현실의 지구 역사와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이 갈라지는 분기점을 다룬다.
==대전쟁(Weltkrieg) 이전까지==
====대전쟁(Weltkrieg) 이전까지====
자세한 내용은 [[카이저라이히/대전쟁 이전까지의 연표]] 참고.
자세한 내용은 [[대전쟁 이전까지의 연표]] 참고.
 
실제 역사와는 달리,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카이저라이히)|빌헬름 2세]]는 러시아를 대놓고 적으로 돌리는 멍청한 짓은 벌이지않았다. 빌헬름 2세는 독일이 안정적으로 발전해나가기 위해서 최소한 당분간은 러시아와 적대관계로 있지않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했고, 독일과 러시아간 재보장 조약이 연장시켰다. 삼제동맹이 1910년대까지 이어지고 비스마르크가 해임되지않으면서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을 견제하는데 집중할 수 있게된다. 러시아에 투자될 군비가 군사적 개발과 경제개발에 돌아가면서 독일은 현실보다 더 강력한 국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1890년''', [[독일 제국(카이저라이히)|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카이저라이히)|빌헬름 2세(Wilhelm II)]]는 [[러시아 제국(카이저라이히)|러시아]]가 독일의 성장과 평화에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재보장 조약의 연장에 동의했다. 러불동맹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구 동맹국|삼제동맹]]은 유지되었다. 독일의 성장에 압박감을 느낀 [[대영제국(카이저라이히)|영국]]은 [[이탈리아 왕국(카이저라이히)|이탈리아]], [[프랑스 제3공화국(카이저라이히)|프랑스]]와 함께 삼국협상을 맺었고 삼제동맹과 [[구 협상국|삼국협상]]은 서로 견제하며 나아가기 시작한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의 해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의 임기는 그가 죽는 1912년까지 계속된다.
한편,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함에 따라 한국은 독립을 유지하였고, 이에 따라 원래는 한반도 합병을 기점으로 대륙진출에 나서야만했던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와 입헌정우회 내각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몇십년 일찍 군사독재를 맞이하게된다. 이어 변법자강운동이 성공함에 따라 위안스카이를 비롯한 북양군벌이 내정에 간섭하는데 실패하였고, 쑨원과 캉유웨이가 10년 일찍 청나라에 민주주의를 뿌리잡게하면서 청나라 역시 수명이 몇년 더 연장되는 결과를 초래하게된다.
====대전쟁(Weltkrieg)====
자세한 내용은 [[대전쟁 연표]] 참고.


'''1894년''', [[동학]]이 [[한국(카이저라이히)|정부]]와 민씨 정권의 타도와 한국내의 외세 척결, 개혁등을 조건으로한 극적인 타협을 맺고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동학군은 해체되었으며, 최제우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동학의 요구에 따라 [[고종(카이저라이히)|고종]]은 [[김홍집]]을 주축으로 갑오개혁을 실시했다.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은 실제 역사와 달리 건강에 신경쓰면서 1906년 이후에도 참모총장직을 유지했고 슐리펜 계획을 효율적으로 보강하는데 성공한다. 계획에서는 본래 계획과 정반대로 프랑스군을 최대한 막고 대신 러시아를 속전속결로 점령하고 그 뒤에 프랑스를 치는 전술을 채택했으며, 이것이 독일이 대전쟁에서 승리하는 이유가 된다.


'''1895년''', 동맹국이 [[중일전쟁|청일전쟁]]에 개입하다. [[일본 제국(카이저라이히)|일본]]의 대륙진출 야욕은 저지되었고 도움의 댓가로 [[대청제국(카이저라이히)|청나라]]는 러시아에 대만을 할양해야만했다. 이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는 계기가 된다.
1914년 6월 28일, 실제 역사와는 달리 [[프란츠 요제프 2세|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피격에서 살아남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페르디난트 대공 피격을 이유로 [[몬테네그로 왕국(카이저라이히)|몬테네그로]]의 내정에 간섭하며 러시아의 신경을 건들게된다. 결국 이 [[제4차 발칸위기|몬테네그로 위기]]를 기점으로 6월 30일,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면서 대전쟁은 실제 역사보다 1달 일찍 개전되었고 독일이 곧바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지지를 천명하면서 슐리펜 계획이 본격적으로 발동하게된다. 정예 기병대로 구성된 독일의 기동대는 빠르게 치고나가 러시아가 항복하는 1916년 시점에는 이미 바르샤바, 빌뉴스, 민스크등 러시아의 주요한 도시들이 독일에 점령된 상태였고, 안그래도 총동원령과 여러 문제로 인하여 내부불만이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던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전쟁을 끝냈지만 곧바로 [[2월 혁명(카이저라이히)|혁명]]이 일어나 제정이 붕괴, 새로히 집권한 [[러시아 공화국(카이저라이히)|케렌스키 정권]]이 전쟁을 지속하면서 동부전선은 길게 늘어지게된다.


'''1898년''', [[변법자강 운동]]이 발발하다. 변법자강은 서태후 및 반개혁파에 의해 실패할 뻔했으나 광서제가 이들을 지지함을 천명하면서 기적적으로 성공했고, 개혁파들은 민병대를 창설해 자금성을 점령, 서태후와 부패한 관리들을 북경에서 척결하는데에 성공했다. 광서제는 개혁파에 의해 옹립되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반개혁파들은 개혁파 정권을 부정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중원내전|제1차 중원내전]]이 발발했다.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등의 국가들이 개혁파를 지지하며 개입했고 일본 역시 군대를 산둥반도 등지로 진주시키며 개입했으며, 당시 중국을 노리고있던 스페인도 중국 개입을 위해 필리핀 주둔군을 대규모 확장시켰다. 한편, 메인 함 사건을 이유로 미국은 스페인에 선전포고했고, 스페인령 쿠바가 점령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역공을 펼쳐 오히려 하와이를 해방했고, 미국의 진격은 쿠바에서 멈췄다. 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윌리엄 매킨리가 사임했고, 뒤이어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 임기를 이었다. 하와이에서는 스페인의 괴뢰정권인 하와이 왕국이 재건 및 건국되었다.
그래도 케렌스키 공세가 실패로 끝난 덕택에 새로운 러시아 공화정부도 1916년 5월에 항복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라브르 코르닐로프|코르닐로프]][[5월 쿠데타|쿠데타를 일으켜]] [[제1차 러시아 내전|내전을 발생시키면서]] 동부전선은 종결을 맞게된다. 독일은 동부전선군을 서부전선으로 곧장 옮겨 1916년 10월 즈음에 [[벨기에 침공|벨기에 우회를 강행하기 시작했고]], 우회기습이 성공적으로 끝남에 따라 독일군은 순식간에 베르됭에 접하는 상황이 일어나게된다. 벨기에 침공과 함께 전쟁에 참전한 영국은 이미 영국 해군을 기습하기 위하여 대기중에 있던 잠수함 함대가 영국 함대 대부분을 궤멸시키고 봉쇄작전을 펼치면서 기아상태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1917년 5월, 베르됭이 돌파되고 6월에 파리에 독일 제국기가 꽂히면서 프랑스는 빠르게 항복, 이어서 독일이 영국에 상륙함에 따라 영국 역시 백기를 들고만다.


'''1899년''', 스페인이 [[스페인-필리핀 전쟁|내부반발을 못이기고]] [[필리핀 공화국|필리핀을 해방했다.]] 대신, 필리핀 주둔군은 곧장 중원내전에 개입하기위해 광저우에 파견되었고, 취안저우를 점령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제2차 보어전쟁(카이저라이히)|제2차 보어전쟁]]이 발발했고, 영국군이 포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남부전선의 상황은 동부, 서부보다 훨씬 좋았는데, 1915년 [[불가리아 차르국|불가리아]]가 참전함에 따라 [[세르비아 왕국(카이저라이히)|세르비아]]를 양쪽에서 포위할 수 있게되었고 현실보다 상태가 나아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1915년 안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 이어 그 해에 협상국측으로 참전한 [[알바니아 공국|알바니아]], [[루마니아 왕국(카이저라이히)|루마니아]]를 항복시키고 2년 일찍 참전한 [[그리스 왕국(카이저라이히)|그리스]]마저 테살로니키에서 대부분 군대를 궤멸시키면서 항복시키는데 성공한다. 개전과 함께 참전한 [[이탈리아 왕국(카이저라이히)|이탈리아]] 역시 상황은 다르지않아서 [[이손초 전투|제3차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의 주력을 완전히 궤멸시키면서 이탈리아 북부를 순식간에 점령하게되었고, 결국 1917년 2월 로마와 나폴리를 오스트리아에 내주면서 이탈리아도 패배를 맞이하게된다.


'''1900년''', [[의화단 운동(카이저라이히)|의화단이 서태후와 반개혁파를 지지하며 외세척결을 구호로 들고 일어났다.]] 서태후는 의화단 운동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이들과 군을 합쳐 북경을 장악했다. 의화단을 진압하기 위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일본, 오스트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총 4천명의 10개국 연합군이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격파되었다. 곧 연합군은 다시 3만 5천의 병사를 재파견했고, 개혁파와 연계해 북경을 탈환하고 남벌을 실시했다. 러시아는 중원내전 개입을 위해 아시아 함대를 대규모로 확장시켰고, 이것이 러일전쟁의 승리 원인이 된다.
협상국군 주력이 모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프랑스 남부의 저항군과 [[포르투갈 왕국(카이저라이히)|포르투갈]], [[일본 제국(카이저라이히)|일본]], 그리고 협상국의 식민지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1918년까지 진행되었다. 아프리카 전선은 [[파울 폰 레토프-포어베크]] 장군이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식민지군 대부분의 주력을 묶어준 덕분에 독일군이 손쉽게 아프리카에 진입할 수 있었고, 1918년 5월 시점에 카이로와 트리폴리에 입성하고 10월에는 튀니스와 알제를 점령, 11월에는 시가전을 펼치며 버티던 마르세유의 프랑스군이 투항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고 에드워드 7세가 즉위했다. 의화단 운동은 사그라들긴 했으나 서태후를 비롯한 반개혁파가 윈난과 광시에 걸쳐 저항에 나섰고, 결국 서태후가 암살됨으로서 중원내전은 막을 내렸다. 천진은 10개국을 위해 분할되어 조차되었고, 오스트리아에는 산웨이가, 스페인에게는 취안저우가 추가 조차되었다. 미국에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3년에 걸친 대규모 개혁과 경제개발을 통해 매킨리때 잃어버린 지지율을 다시 끌어모았다. 그의 정책은 외교적으로는 제국주의적이면서 정치, 경제적으로는 급진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이후 이는 [[아메리칸 포퓰리즘|미국 대중주의(American Populism) 혹은 테디즘(Teddism)]]이라 불리우며 남부나 중부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한편,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미국 사회당(카이저라이히)|사회당]]의 인기에도 영향을 끼쳐 사회당이 상원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인들이 보어인들에게 굴복했고, 남아프리카의 광산은 보어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영국인들은 케이프타운에 고립되었다. 보어전쟁에 자극받아 아일랜드에서도 한차례 봉기가 발생했고 인도에서도 대규모 봉기가 모의되었지만 실패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급진당|급진공화파]]가 예수회 추방을 위한 결사법을 발의했으나 부결되었고, 이는 프랑스내 공화파와 반유대주의•종교계간의 불화를 불러오면서 훗날 민주 세력이 프랑스국 정부를 부정하고 독자 공화정부를 건립하는 계기가 된다.
전쟁이 끝난 직후, 베를린의 상수시 궁전에서는 전후처리와 패전국 영토 분할을 위한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상수시 조약에 따라 패전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는 수백만 마르크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 대부분을 잃은채 분할당해야만 했다. 한편, 포르투갈이나 일본, 캐나다의 경우 조약 이후에도 독일과의 전쟁 지속을 주장했는데, 이 역시 1921년 코펜하겐에서 맺어진 조약, 일명 [[코펜하겐 조약|'명예로운 평화']]에 의해서 대전쟁은 최종적으로 종결된다.


'''1902년''', [[쿠바 공화국|쿠바]]가 미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한편, 스페인은 스페인어권 국가들을 규합해 [[이베리아 동맹|이베리아 세력권]]을 형성하고자했고, 신생국가로서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했던 쿠바와 필리핀은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자주성을 댓가로 스페인과 함께했다. 한편 청일전쟁의 실패로 나날이 희망을 잃어가던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고, 곧 협상국의 지원 아래에 동맹국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의 웨이하이 점령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한반도에도 군을 진주시키는등 무력적인 도발행위를 벌이면서 러시아의 심기를 건들게된다. 남아프리카에서는 트란스발 조약에 따라 보어인들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자주성을 인정받았고, 아프리카 원주민 부족과 보어인 공화국 및 자유주들이 남아프리카 연방을 구성하게된다. 한편, 영국은 케이프타운을 남아프리카 자치령이라는 이름으로 자치를 허용했다.
====전간기(Zwischenkriegs)====
자세한 내용은 [[전간기 연표]] 참고.
=====전후 프랑스=====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국(카이저라이히)|프랑스국]] 참고.


'''1904년''', 일본이 뤼순항을 기습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는 독일에게 함대를 빌려 뤼순에서 일본 함대를 격퇴시켰고, 뤼순과 다롄을 요새화시키고 대만에 주둔한 병력을 통해 오키나와 지역을 공습하면서 역공을 시도했다. 이어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러시아 해군을 동해로 진주시키고 한국에 동해를 정찰할 권리를 받아내고 동해의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러시아가 승승장구하자 한국의 친일파들은 친러파나 친독파, 친서파등으로 갈아탔고 한일의정서는 거부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뤼순에서의 패배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그의 내각은 중의원으로부터 내각불신임을 받고말았다.
전후 프랑스는 독일의 점령과 폭동, 정치분열로 인하여 혼란에 차있었다. 군부는 상수시 조약을 부정하고 지속적인 전쟁 수행을 주장했지만 대중들은 전쟁이 끝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결국 군부의 수장 [[페르디낭 포슈]]는 쿠데타를 강행했고, 마르세유를 장악, 국가대중주의자이자 프랑스의 장군 레몽 드 라 로크의 아들인 [[장 프랑수아 드 라 로크|드 라 로크]]와 젊은 미래주의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로 하여금 민중을 선동하여 민병대를 소집시킬 것을 명령한다. 약 3만가량으로 구성된 일명 [[제2차 마르세유 의용병|마르세유 자원병]]들은 포슈의 명령에 따라 [[파리 진군|파리로의 기나긴 진군을 행하게된다.]] 상당히 불확실한 도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로의 진격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지휘부를 잃은 프랑스의 독일 점령군들은 프랑스 북부에서 철수해 그들의 영향력이 확고했던 부르고뉴 지역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1905년''', [[1905년 혁명|노동자 임금 문제를 두고 러시아에서 시위가 발생하다.]] 병사들이 시위대를 사격하는 사건이 일어나긴 했으나, [[알렉산드르 2세]]가 병사들을 제지하고 시위대의 지도자 [[게오르기 가폰|가폰 신부]]와 타협해 개혁을 약속하면서 무력시위로 번지는 결과는 없었다. 핀란드, 폴란드, 우크라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의회(소비에트)가 설치되어 자치와 보통평등선거가 보장되었다. 한편, 쓰시마 해전에서 동해와 대한해협의 지형을 파악한 러시아 해군이 일본 해군을 격멸하면서 러일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다. 러시아는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신 부산에 조계지를 설치하고 동해에서 상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한국이 이를 수락하면서 한러의정서 혹은 을사협약이 체결된다. 북아프리카에서는 프랑스가 [[모로코 왕국]][[모로코 위기|내정에 간섭하자]], 삼제동맹은 모로코 문제에 개입하여 프랑스으 모로코 합병을 저지하고 모로코의 독립을 유지했다. 이후, 모로코는 [[에티오피아 제국]], [[라이베리아 공화국]]등과 함께 아프리카의 몇안되는 독립국이자 지중해의 무역대국으로 거듭나게된다. 모로코 왕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과 친선을 맺으며 훗날 대전쟁에서 동맹국에 참전하였으며, 이 사건에 자극받은 북아프리카인들은 폭동을 일으키며 프랑스의 아프리카 지배를 대항하기 시작한다. 태평양에서는 미국이 필리핀과 협약을 맺고 러시아와 담판을 지어 양국의 영향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추진해나갔다.
독일군이 철수하자 프랑스에는 온갖 군벌과 파벌, 국가들이 난립하는 [[프랑스 군벌시대|전국시대]]에 돌입했으나, 포슈가 설립한 파리의 새 프랑스 정부는 강력한 군사력과 철권을 통한 철저한 치안을 기반으로 빠르게 프랑스 남부와 중부를 장악해나갔고, 마침내 1922년에 이르러서 독일이 점령한 동부의 부르고뉴 지역과 저항이 막강했던 [[브르타뉴 입헌국|브르타뉴]], [[노르망디 대공국|노르망디]]의 반란군을 제외한 프랑스 전역이 군부의 손에 들어왔다. 10월 3일, 군부의 수장 페르디낭 포슈는 파리의 개선문에서 '독일 침략군'과 '조국에 대항한 반동 반란군'을 궤멸시키고 프랑스의 자유주의를 지켜냈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군부의 괴뢰세력이 되어버린 새로운 파리의 의회와 내각은 만장일치로 포슈가 이끄는 군부에 정권을 이양했고, 50년간 이어져온 프랑스의 3번째 공화정은 또다시 군인에 의해 몰락했다.


'''1906년''',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참모총장직을 유지하다. 슐리펜 계획이 효율적이고 현실적으로 보강되었고, 최우선 목표는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변경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가 두마를 개최하고 군주제 폐지등을 제외한 개혁을 수용하면서 러시아를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프랑스에서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이 유죄로 판결났고 결국 드레퓌스는 지지자들의 도움하에 미국으로 망명해 프랑스 공화파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지내게된다.
1922년 12월, 정권을 이양받은 [[프랑스 군정의회]]는 새 프랑스 통일국가 프랑스국을 선포하였고, 페르디낭 포슈를 대원수(Grand Maréchal), [[앙리 필리프 페탱]]을 총통(Généralissime)로 추대했다. 새로운 프랑스국의 의회는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배재된 채로 구성되었다. 포슈는 대독 복수주의와 프랑스 제일주의 사상 아래에 국민들을 선동하며 10년간의 세월동안 독재체제 하에 국가를 발전시켜왔다. 대원수 페르디낭 포슈가 죽은 이후, 페탱은 의회로부터 새로운 대원수직에 추대받았고, 공석이 된 총통직은 마르세유 의용병을 최전선에서 이끈 [[프랑스 파시즘]]의 지도자 프랑수아 드 라 로크가 이어받았다.

2021년 1월 13일 (수) 11:50 기준 최신판

카이저라이히(Kaiserreich) 세계관은 사라예보 사건 직후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세르비아 및 대러시아 선전포고가 지체되지않고 이루어졌으며, 수명이 연장된 독일의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슐리펜 계획의 최우선 목표를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변경함에 따라 러시아가 전쟁 초에 항복, 이어 합류한 동부전선군과 함께 벨기에 우회침공을 강행해 프랑스마저 항복하고 뒤늦게 참전한 대영제국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한 함대 궤멸과 기아로 항복하여 대전쟁(Weltkrieg)이 동맹국의 승리로 끝난 세계이다.

독일 제국은 전후 상수시 조약으로 하여금 협상국들을 굴복시켜 세계의 강대국으로 거듭났으며, 유럽 경제적 협력공동체인 미텔오이로파(Mitteleuropa)와 독일의 세력권인 국가협정(Reichspakt)을 창설하여 제국주의 시대의 제2전성기를 이끌고있다. 하지만, 내부에서의 정치분열과 무리한 식민지 경영, 각지 제국영토에서의 독립운동으로 독일의 모순된 제국은 점차 무너져내리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불어오는 국가대중주의와 공산주의의 물결은 전세계를 또다시 2번째 대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세계관 년도는 1936년이며, 전세계는 독일 제국이 이끄는 국가협정(Reichspakt), 프랑스국이 이끄는 강철조약(Pacte d'acier), 캐나다 왕국이 이끄는 신 협상국(New Entente), 토리노 코뮌이 이끄는 제3인터내셔널(Third Internationale)의 4개 세력에 의해서 갈라져있는 상태이다. 각 세력들은 권위주의 및 반동주의, 국가대중주의,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의 이념을 대표하며, 전세계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있는 상태이다.

세력(Pact)

세력은 4개의 강대세력과 그외의 중소세력, 그리고 중립국으로 나뉜다.

세력명 이념 공용어 중심 국가
경제 이념 정치 이념
국가협정
Reichspakt
자본주의 시장경제 권위민주주의(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 독일어 독일 제국
강철조약
Pacte d'acier
자본주의 계획경제 국가대중주의(로크주의) 프랑스어 프랑스국
신 협상국
New Entente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조지안 데모크라시) 영어
프랑스어
캐나다 왕국
제3인터네셔널
Third Internationale
Terza Internazionale
사회주의 계획경제 공산주의(토리노 생디칼리즘)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토리노 코뮌

분기점

현실의 지구 역사와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이 갈라지는 분기점을 다룬다.

대전쟁(Weltkrieg) 이전까지

자세한 내용은 대전쟁 이전까지의 연표 참고.

실제 역사와는 달리,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러시아를 대놓고 적으로 돌리는 멍청한 짓은 벌이지않았다. 빌헬름 2세는 독일이 안정적으로 발전해나가기 위해서 최소한 당분간은 러시아와 적대관계로 있지않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했고, 독일과 러시아간 재보장 조약이 연장시켰다. 삼제동맹이 1910년대까지 이어지고 비스마르크가 해임되지않으면서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을 견제하는데 집중할 수 있게된다. 러시아에 투자될 군비가 군사적 개발과 경제개발에 돌아가면서 독일은 현실보다 더 강력한 국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한편,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함에 따라 한국은 독립을 유지하였고, 이에 따라 원래는 한반도 합병을 기점으로 대륙진출에 나서야만했던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와 입헌정우회 내각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몇십년 일찍 군사독재를 맞이하게된다. 이어 변법자강운동이 성공함에 따라 위안스카이를 비롯한 북양군벌이 내정에 간섭하는데 실패하였고, 쑨원과 캉유웨이가 10년 일찍 청나라에 민주주의를 뿌리잡게하면서 청나라 역시 수명이 몇년 더 연장되는 결과를 초래하게된다.

대전쟁(Weltkrieg)

자세한 내용은 대전쟁 연표 참고.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은 실제 역사와 달리 건강에 신경쓰면서 1906년 이후에도 참모총장직을 유지했고 슐리펜 계획을 효율적으로 보강하는데 성공한다. 이 계획에서는 본래 계획과 정반대로 프랑스군을 최대한 막고 대신 러시아를 속전속결로 점령하고 그 뒤에 프랑스를 치는 전술을 채택했으며, 이것이 독일이 대전쟁에서 승리하는 이유가 된다.

1914년 6월 28일, 실제 역사와는 달리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피격에서 살아남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페르디난트 대공 피격을 이유로 몬테네그로의 내정에 간섭하며 러시아의 신경을 건들게된다. 결국 이 몬테네그로 위기를 기점으로 6월 30일,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면서 대전쟁은 실제 역사보다 1달 일찍 개전되었고 독일이 곧바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지지를 천명하면서 슐리펜 계획이 본격적으로 발동하게된다. 정예 기병대로 구성된 독일의 기동대는 빠르게 치고나가 러시아가 항복하는 1916년 시점에는 이미 바르샤바, 빌뉴스, 민스크등 러시아의 주요한 도시들이 독일에 점령된 상태였고, 안그래도 총동원령과 여러 문제로 인하여 내부불만이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던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전쟁을 끝냈지만 곧바로 혁명이 일어나 제정이 붕괴, 새로히 집권한 케렌스키 정권이 전쟁을 지속하면서 동부전선은 길게 늘어지게된다.

그래도 케렌스키 공세가 실패로 끝난 덕택에 새로운 러시아 공화정부도 1916년 5월에 항복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코르닐로프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을 발생시키면서 동부전선은 종결을 맞게된다. 독일은 동부전선군을 서부전선으로 곧장 옮겨 1916년 10월 즈음에 벨기에 우회를 강행하기 시작했고, 우회기습이 성공적으로 끝남에 따라 독일군은 순식간에 베르됭에 접하는 상황이 일어나게된다. 벨기에 침공과 함께 전쟁에 참전한 영국은 이미 영국 해군을 기습하기 위하여 대기중에 있던 잠수함 함대가 영국 함대 대부분을 궤멸시키고 봉쇄작전을 펼치면서 기아상태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1917년 5월, 베르됭이 돌파되고 6월에 파리에 독일 제국기가 꽂히면서 프랑스는 빠르게 항복, 이어서 독일이 영국에 상륙함에 따라 영국 역시 백기를 들고만다.

남부전선의 상황은 동부, 서부보다 훨씬 좋았는데, 1915년 불가리아가 참전함에 따라 세르비아를 양쪽에서 포위할 수 있게되었고 현실보다 상태가 나아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1915년 안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 이어 그 해에 협상국측으로 참전한 알바니아, 루마니아를 항복시키고 2년 일찍 참전한 그리스마저 테살로니키에서 대부분 군대를 궤멸시키면서 항복시키는데 성공한다. 개전과 함께 참전한 이탈리아 역시 상황은 다르지않아서 제3차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의 주력을 완전히 궤멸시키면서 이탈리아 북부를 순식간에 점령하게되었고, 결국 1917년 2월 로마와 나폴리를 오스트리아에 내주면서 이탈리아도 패배를 맞이하게된다.

협상국군 주력이 모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프랑스 남부의 저항군과 포르투갈, 일본, 그리고 협상국의 식민지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1918년까지 진행되었다. 아프리카 전선은 파울 폰 레토프-포어베크 장군이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식민지군 대부분의 주력을 묶어준 덕분에 독일군이 손쉽게 아프리카에 진입할 수 있었고, 1918년 5월 시점에 카이로와 트리폴리에 입성하고 10월에는 튀니스와 알제를 점령, 11월에는 시가전을 펼치며 버티던 마르세유의 프랑스군이 투항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베를린의 상수시 궁전에서는 전후처리와 패전국 영토 분할을 위한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상수시 조약에 따라 패전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는 수백만 마르크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 대부분을 잃은채 분할당해야만 했다. 한편, 포르투갈이나 일본, 캐나다의 경우 조약 이후에도 독일과의 전쟁 지속을 주장했는데, 이 역시 1921년 코펜하겐에서 맺어진 조약, 일명 '명예로운 평화'에 의해서 대전쟁은 최종적으로 종결된다.

전간기(Zwischenkriegs)

자세한 내용은 전간기 연표 참고.

전후 프랑스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국 참고.

전후 프랑스는 독일의 점령과 폭동, 정치분열로 인하여 혼란에 차있었다. 군부는 상수시 조약을 부정하고 지속적인 전쟁 수행을 주장했지만 대중들은 전쟁이 끝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결국 군부의 수장 페르디낭 포슈는 쿠데타를 강행했고, 마르세유를 장악, 국가대중주의자이자 프랑스의 장군 레몽 드 라 로크의 아들인 드 라 로크와 젊은 미래주의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로 하여금 민중을 선동하여 민병대를 소집시킬 것을 명령한다. 약 3만가량으로 구성된 일명 마르세유 자원병들은 포슈의 명령에 따라 파리로의 기나긴 진군을 행하게된다. 상당히 불확실한 도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로의 진격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지휘부를 잃은 프랑스의 독일 점령군들은 프랑스 북부에서 철수해 그들의 영향력이 확고했던 부르고뉴 지역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이 철수하자 프랑스에는 온갖 군벌과 파벌, 국가들이 난립하는 전국시대에 돌입했으나, 포슈가 설립한 파리의 새 프랑스 정부는 강력한 군사력과 철권을 통한 철저한 치안을 기반으로 빠르게 프랑스 남부와 중부를 장악해나갔고, 마침내 1922년에 이르러서 독일이 점령한 동부의 부르고뉴 지역과 저항이 막강했던 브르타뉴, 노르망디의 반란군을 제외한 프랑스 전역이 군부의 손에 들어왔다. 10월 3일, 군부의 수장 페르디낭 포슈는 파리의 개선문에서 '독일 침략군'과 '조국에 대항한 반동 반란군'을 궤멸시키고 프랑스의 자유주의를 지켜냈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군부의 괴뢰세력이 되어버린 새로운 파리의 의회와 내각은 만장일치로 포슈가 이끄는 군부에 정권을 이양했고, 50년간 이어져온 프랑스의 3번째 공화정은 또다시 군인에 의해 몰락했다.

1922년 12월, 정권을 이양받은 프랑스 군정의회는 새 프랑스 통일국가 프랑스국을 선포하였고, 페르디낭 포슈를 대원수(Grand Maréchal), 앙리 필리프 페탱을 총통(Généralissime)로 추대했다. 새로운 프랑스국의 의회는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배재된 채로 구성되었다. 포슈는 대독 복수주의와 프랑스 제일주의 사상 아래에 국민들을 선동하며 10년간의 세월동안 독재체제 하에 국가를 발전시켜왔다. 대원수 페르디낭 포슈가 죽은 이후, 페탱은 의회로부터 새로운 대원수직에 추대받았고, 공석이 된 총통직은 마르세유 의용병을 최전선에서 이끈 프랑스 파시즘의 지도자 프랑수아 드 라 로크가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