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의 대전쟁(Weltkreig) 이전까지의 사건을 다루는 연표이다.

대전쟁 이전까지(Before Weltkreig)

1890년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는 독일이 조금 더 안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적대적으로 지내지않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했고, 독일과 러시아간 재보장 조약을 연장시켰다. 러시아가 독일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던 덕택에, 삼제동맹은 유지되었다. 빌헬름 2세가 재보장 조약을 연장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 체제는 무너지지 않았고 이에 대한 연쇄효과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의 해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록 황제와 수상간의 불화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그의 임기는 그가 죽는 1912년까지 계속된다.

• 독일의 성장에 압박감을 느낀 영국은 삼제동맹의 일원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좋지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이탈리아와 비록 오랜 적국이나 같은 반독일 세력인 프랑스와 동맹함으로서 반독일 전선을 형성하였고, 훗날 1907년의 영불타협에 따라 삼국협상이 형성된다. 삼국협상은 삼국동맹을 절대적으로 견제하면서 독일의 성장을 방해했고, 이때부터 쌓인 악연은 결국 대전쟁으로 폭발하게된다.

1894년

동학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으나, 정부와 민씨 정권의 타도와 한국내의 외세 척결, 개혁등을 조건으로한 극적인 타협을 맺음으로서 종결되었다. 동학은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새로히 개칭되어 조선내에서 공식적인 허가를 받았다. 동학군은 해체되었으며, 최제우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 동학이 요구한 타협조건에 따라 고종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부 조건을 제외하고 개혁파 김홍집을 주축으로 갑오개혁을 실시했고, 민비와 그녀가 세운 새로운 민씨의 세도권력은 일단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빼앗긴 정권을 되찾기 위해 민비는 일본측과 접촉하였고 이는 훗날 동학과 급진개혁파 세력이씨 왕조를 타도하고 새 정권을 세우는 계기가 된다.

1895년

• 동맹국은 중국에서 이권을 확보하면서 점차 커져가는 새 열강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고, 결국 청일전쟁에 개입했다. 독일측의 물자적 지원하에 청나라는 항복을 거부하며 일본에 맞서싸웠고, 결국 일본의 대륙진출 야욕은 저지되었다.

청나라는 청일전쟁 당시에 삼제동맹이 준 도움의 댓가로 러시아에 대만을 할양해야만했다. 대만을 할양받음으로서 연해주와 대만으로 하여금 일본의 해권을 남북으로 포위하게된 러시아는 결국 러일전쟁때 일본 해군을 포위섬멸할 수 있게되었다. 이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게되는 이유중 하나가 된다.

1898년

변법자강 운동이 발생하다. 운동은 초기에 서태후 및 반개혁파에 의해 실패할 뻔했으나 광서제가 이들을 지지할 것을 천명하면서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개혁파들은 민병대를 창설해 자금성을 점령, 서태후와 부패한 관리들을 베이징에서 척결해냈고, 광서제는 개혁파에 의해 옹립되었다.

• 청나라의 반개혁파들이 개혁파 정권을 부정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제1차 중원내전이 발발하게된다.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등의 국가들은 개혁파가 자주개혁을 외침에도 불구하고 기존 서태후가 보여온 반서양적 성향 때문에 개혁파를 지지하며 개입했고, 대륙진출을 꿈꾸던 일본 역시 조계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불법적으로 산둥반도 내로 군을 진주시켰다. 한편, 아시아의 또다른 열강인 스페인도 무너져가는 아시아 식민지를 살려내기 위하여 중국 개입을 실시하였고, 필리핀 주둔군을 대규모 확장시켰다. 이것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승리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의 USS 메인 함이 의문의 사건으로 침몰하다. 이 메인함 사건의 주범을 스페인으로 몰아간 미국 정부는 스페인에 선전포고했고, 순식간에 스페인령 쿠바가 점령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기존에 확장시킨 필리핀 주둔군과 해군을 통하여 역공을 펼쳐 오히려 하와이를 해방했고, 결국 미국의 진격은 쿠바에서 멈췄다. 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미국 대통령인 윌리엄 매킨리가 사임했고, 그의 뒤를 이어 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 임기를 이었다. 하와이에서는 하와이 왕국이 스페인의 괴뢰정권으로서 부활했다.

1899년

• 스페인이 내부반발을 못이기고 필리핀을 해방하다. 필리핀 주둔군은 후퇴하는 대신에 상부에서 내려온 새로운 지침에 따라 중원내전에 개입하기위해 광저우만에 파견되었다. 스페인군은 중국내 혼란을 틈타서 조계지를 확보하기 위해 취안저우를 점령했다.

• 남아프리카에서 제2차 보어전쟁이 발발했으나, 오히려 선침한 영국군이 밀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보어인들은 조국을 지키고 자신들의 아프리카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프리카 원주민 부족들과 당시 영국과 적대관계를 유지하던 동맹국과 손을 잡았고, 동맹국이 밀수시킨 무기로 무장한 보어인들은 케이프타운 식민지를 쉴세없이 몰아치며 영국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1900년

의화단이 서태후와 반개혁파를 지지하며 외세척결을 구호로 들고 일어났다. 서태후는 의화단 운동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반개혁파를 이끌어 이들과 군을 합쳤고, 곧 베이징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의화단을 진압하기 위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일본, 오스트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총 4천명의 10개국 연합군이 중국에 파견되었으나, 너무 방심한 나머지 의화단에 의하여 격파되었다. 전술과 장비를 재정비한 열강 연합군은 곧 다시 3만 5천의 병사를 재파견했고, 개혁파와 연계해 북경을 탈환하고 남벌을 실시했다. 러시아는 중원내전 개입을 위해 아시아 함대를 대규모로 확장시켰고, 이 역시 대만 할양과 더불어 러일전쟁 승리 원인이 된다.

1901년

•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고 에드워드 7세가 즉위했다.

• 의화단 운동은 사그라들긴 했으나 서태후를 비롯한 반개혁파가 윈난과 광시에 걸쳐 저항에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태후가 암살됨으로서 중원내전은 막을 내렸다. 전후 맺어진 조약과 의화단 운동 최종의정서에 따라서 톈진은 10개국을 위해 분할되어 조차되었고, 오스트리아에는 산웨이가, 스페인에게는 취안저우가 추가 조차되었다. 개혁파는 공화정 수립을 주장하고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쑨원과 흥중회 주축의 급진개혁파와 입헌군주정과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캉유웨이 및 온건파 주축의 온건개혁파, 마지막으로 전제군주정-군정 수립과 황제의 권력 복고를 주장하는 위안스카이와 군부, 구 반개혁파 인사 주축의 위안스카이파로 나뉘었다.

• 미국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3년에 걸친 대규모 개혁과 경제개발을 통해 매킨리때 잃어버린 공화당의 지지율을 다시 대폭 상승시키는데 성공하다. 그의 정책은 외교적으로는 제국주의적이면서 정치, 경제적으로는 급진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이후 이는 미국 대중주의(American Populism) 혹은 테디즘(Teddism)이라 불리우며 미국 남부나 중부에서 큰 인기를 얻게된다. 한편,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사회당의 인기에도 영향을 끼쳤고, 사회당이 상원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인들이 보어인들에게 굴복하다. 남아프리카의 모든 이권은 보어인들의 차지가 되었으며, 영국인들은 케이프타운에 고립되었다. 영국 정부는 급히 보어인들과 타협에 나섰고, 영국령 남아프리카 식민지는 케이프타운밖에 남지않았다. 보어전쟁에 자극받아 아일랜드에서도 한차례 봉기가 발생했고 인도에서도 대규모 봉기가 모의되었지만 실패했다.

• 프랑스에서 정교분리와 근왕주의 세력을 배재한 공화정부를 주장했던 제3공화국의 파벌, 급진공화파가 예수회 추방을 위한 결사법을 발의했으나 부결되었다. 프랑스내 공화파와 반유대주의•종교계간의 불화는 점차 심화되었고, 결국 반유대주의 열풍에 따라 민중의 지지를 받은 반유대주의 종교 세력이 의회에서 급진공화파를 완전히 배재시키면서 급진공화파는 지방의회를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 사건은 훗날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드 라 로크의 프랑스국 정부를 부정하고 독자적인 공화 임시정부를 건립하는 계기가 된다.

1902년

쿠바가 미국으로부터 독립하다.

• 스페인은 스페인어권 국가들을 규합해 이베리아 세력권(Iberia Sphere)을 형성하고자했다. 스페인은 우선 자국으로부터 독립해나간 식민지인 쿠바와 필리핀에 요청을 보냈고, 신생국가로서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했던 쿠바와 필리핀은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자주성을 댓가로 스페인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 청일전쟁에서 실패했으나, 산둥반도에 영향력을 끼침으로서 다시한번 군국주의에 불을 지핀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고, 곧 협상국의 지원 아래에 동맹국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의 웨이하이 점령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한반도에도 군을 진주시키는등 무력적인 도발행위를 벌이면서 러시아의 심기를 건들게된다.

•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이 최종적으로 보어인들과 합의를 보다. 두 세력간에 맺어진 트란스발 조약에 따라 보어인들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그들의 자주성을 인정받았고, 영국인들의 보어인-원주민 거주지 불법침입 사실을 용인했다. 이 사건으로 사이가 돈독해진 아프리카 원주민 부족과 보어인 공화국 및 자유주들은 자유주의의 이념에 따라서 라이베리아 이래의 두번째 아프리카의 민주국가, 남아프리카 연방을 구성하게된다. 한편, 영국은 케이프타운을 남아프리카 자치령이라는 이름으로 자치를 허용했으나, 사실상 인도로 향하는 교두보 위치로 전락하고만다. 남아프리카 연방은 동맹국의 지원에 보답하고자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나미비아, 탄자니아 등지에서 독일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시작한다.

1904년

• 일본이 뤼순항을 기습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하다. 러시아는 독일로부터 함대를 빌려 뤼순에서 일본 함대를 일시적으로 격퇴시켰고, 그 틈을 타 뤼순과 다롄을 요새화시키고 대만에 주둔한 병력을 통해 오키나와 지역에 기습상륙을 가하면서 역공을 시도했다. 이어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러시아 해군을 동해로 진주시킨 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동해를 정찰할 권리를 받아내면서 동해의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러시아가 승승장구하자 한국의 친일파들은 곧장 친러파나 친독파, 친서파등으로 갈아탔고, 일본이 한국에 제안한 한일의정서는 거부되었다.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뤼순에서의 패배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그의 내각은 중의원으로부터 내각불신임을 받으면서 입헌정우회 주축 민주세력은 파멸했고 이 자리를 근왕파가 채우면서 일본 군사정부 시대의 막이 내리게된다.

1904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지다. 선거 초기부터 승세는 공화당에 기울어져있었던 이 선거는 결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대통령이자 공화당 대선후보가 민주당 후보 엘튼 파커를 2배의 투표수차로 이기면서 재선에 성공했다. 부통령은 그의 러닝메이트, 찰스 W. 페어벵크스가 되었다. 한편, 이 선거의 진짜 의의는 사회당의 유진 데브스 후보가 뉴욕과 인디애나 주에서 승리하면서 제3당으로서 상원에 입성한 것에 있으며, 그외에 토마스 왓슨인민당이나 사회노동당 역시 아메리칸 포퓰리즘으로인한 진보적인 영향으로 상당한 지지를 얻게된다.

1905년

노동자 임금 문제를 두고 러시아에서 시위가 발생하다. 비록 병사들이 시위대를 사격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러시아의 온건적인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병사들을 제지하고 시위대의 지도자 가폰 신부와 타협해 개혁을 약속하면서 무력시위나 유혈진압으로 번지는 결과는 없었다. 알렉산드르 2세가 펼친 개혁에 따라서 핀란드, 폴란드, 우크라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소비에트가 설치되어 그들의 자치가 허용되었고, 전러시아에는 보통평등선거가 보장되었다.

쓰시마 해전에서 동해와 대한해협의 지형을 파악한 러시아 해군이 일본 해군을 격멸하면서 러일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다. 러시아는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신 부산에 조계지를 설치하고 동해에서 상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한국이 이를 수락하면서 한러의정서, 혹은 을사협약이라 불리우는 조약이 체결된다.

•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가 모로코 왕국의 내정에 간섭하자, 삼제동맹이 모로코 문제에 개입하여 프랑스의 모로코 합병을 저지하고 모로코의 독립을 유지시키다. 이후, 모로코는 에티오피아 제국, 라이베리아 공화국등과 함께 아프리카의 몇안되는 독립국이자 지중해와 대서양의 입구를 통제하는 국가로서 북아프리카의 무역대국으로 거듭나게된다. 모로코 왕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과 친선을 맺으며 훗날 대전쟁에서 동맹국에 참전하게된다. 한편, 이 사건에 자극받은 북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무력시위를 일으켜 프랑스의 아프리카 지배를 대항하기 시작했고, 열강 세력의 주요시설을 사보타주하며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 독립운동은 대전쟁때 절정을 맞이하여, 니제르, 말리, 모리타니아등이 독립하는 계기가 된다.

• 태평양에서 미국이 필리핀과 협약을 맺고 러시아와 담판을 지어 양국의 영향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추진해나가다. 이 조약은 러시아 제국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과 미국 전쟁부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간에 맺어졌다고하여 스톨리핀-태프트 조약이라고 불리우며,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본격적으로 확장적이고 공격적인 외교에 나서며 하와이, 필리핀의 내정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1906년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참모총장직을 유지하다. 슐리펜 계획은 효율적이고 현실적으로 보강되었고, 러시아를 적으로 돌릴 필요가 있어짐에 따라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군대를 1915년까지 최소 이탈리아급으로 성장시켜놓을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독일측 장교단은 빈에 파견되었고, 즉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명령체계와 군내 언어를 통합하고 오스트리아군을 프로이센식으로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가 두마를 개최하고 농지나 노동법 개혁등을 수용하면서 러시아를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급진적 공화파들이 주장한 왕정 폐지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프랑스에서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이 유죄로 판결났고 결국 드레퓌스는 지지자들의 도움하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드레퓌스는 프랑스 공화파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추대되었고, 프랑스내 반유대감정은 극화되기 시작한다.

• 러시아 제국이 북만주 영향력을 강화하고 만주의 철도를 확실히 관리하기 위해 북만주 철도회사를 설립하다. 한편, 한국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3국의 협력 아래에 러시아와 남만주 철도를 공동관리하기로 결정하면서 남만주 철도회사가 설립되다. 훗날, 이 두 회사는 러시아의 패전 이후 독일이 북만주 철도회사를 인수하면서 만주 철도회사, 즉 만철이라 불리우게된다.

1907년

네덜란드 왕국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다. 당대 강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등의 국가가 참여했으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건의에 따라 대한제국과 청나라가 참관하기도했다. 총 14개의 국제평화를 위한 협약이 이 평화회의 기간동안 맺어졌다.

• 영국이 프랑스와의 아프리카 국경을 확정지음으로서 분쟁을 끝내다. 이에 따라서 삼국협상이 체결되었으나,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티베트에서의 영유권 분쟁은 더욱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 영국이 케이프타운에 이어서 뉴질랜드뉴펀들랜드에 자치령을 형성하다.

1908년

포르투갈 왕국의 왕, 카를루스 1세가 암살 미수를 당하다. 비록 총에는 맞았지만, 곧바로 응급처치가 이루어지고 급소에 맞지 않은 덕에 카를루스 1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왕위를 보전할 수 있었고, 포르투갈은 왕정으로 계속 남을 수 있었다.

퉁구스카에서 운석 충돌로 인한 대폭발이 발생하다. 나무 수천그루가 쓰러졌고, 순록 1500여마리 가량이 폭발의 영향으로 폐사했다.

오스만 제국에서 청년 튀르크 당 혁명이 발생하다. 청년 튀르크 당은 황제 압둘 하미트 2세에게 압력을 가하여 미드하트 헌법을 복원하고 압둘 하미트 2세를 폐위, 메흐메트 5세를 즉위시켰고, 이후 여러 개혁과 개발을 거치며 오스만의 근대화를 선도하게된다.

• 오스만에서 혁명의 혼란을 틈타, 러시아의 지원을 받던 슬라브족 국가 불가리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해나갔다. 새로히 세워진 불가리아 차르국에서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페르디난드 1세가 차르로 추대되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일방적으로 합병함으로서 보스니아 위기가 발생하다. 삼제동맹의 균열이 서서히 깨져감으로서 발칸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간의 영토분쟁이 심화되었고, 러시아가 발칸에 대한 대대적인 간섭을 재개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역시 그들이 점령한 보스니아와 산자크로 하여금 발칸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다. 이 문제를 중재하기 위해 독일이 나섰으며, 동맹국의 3개 제국이 모두 참여한 중재회의, 베를린 회의가 개최된다. 중재 내용에 따라, 산자크는 자유주로서 독립해나갔으며,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독일 3국의 보호령으로서 일종의 완충지대가 되었다.

콩고 자유국에서 레오폴드 2세가 행한 만행을 보다못한 벨기에 정부가 레오폴드 2세로부터 콩고를 받아내다. 콩고는 국유지가 되었고, 레오폴드 2세는 열강들의 압박에 못이겨 스스로 왕위를 내려놓았다. 왕위는 그의 조카이자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의 아들 알베르가 알베르 1세로서 이어받았다.

• 청나라에서 광서제가 죽고 선통제 아이신기오로 푸이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다. 정권은 급진개혁파와 온건개혁파의 연합전선과 위안스카이파간의 갈등끝에 결국 위안스카이파가 한발 물러서면서 연합전선이 정권을 잡았다. 이들은 한때 병과 견제로 인하여 정계에서 은퇴해있던 늙은 사자이자 아시아의 비스마르크 리훙장을 섭정으로서 추대했고, 리훙장의 철혈정치와 개혁 아래에 청나라는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 1908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지다. 공화당에서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전직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지원 아래에 경선에서 승리, 대선후보로 선출되었고 상대편 민주당에서는 윌리엄 브라이언 후보가 공화당을 '특권정부'라 비난하면서 나섰다. 하지만 선거는 태프트의 승리로 끝났고, 공화당이 3번 연속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게된다. 한편, 유진 데브스와 사회당은 비록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상원의원 선거에서 인민당과 연합, 조지아 주를 차지하면서 의석수를 더욱 많이 차지하는데에 성공하게된다.

1909년

• 미군이 최종적으로 쿠바에서 철수했다. 관타나모 만은 미군기지가 세워짐에 따라 미국에 조차되었다.

• 청나라와 대한제국간에 간도분쟁이 발생하다. 러시아의 중재하에, 북간도만이 양국간 공동통치구역으로 지정되었다.

• 페르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했으나, 러시아의 지원하에 혁명은 무산되었다. 모함마드 알리 샤가 왕위를 지키다.

1910년

• 영국 귀족원이 영국의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예산안을 거부하면서 총선이 치뤄지다. 간소한 차로 자유당은 결국 여당직을 잃었고, 보수당-자유연합당의 연립정당이 총선에서 승리, 아서 밸푸어가 총리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