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이시아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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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클레이시아 전쟁'''은 1495년 6월 29일 [[엘리시움 왕국]]이 그레이터리시움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나일리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발발하여, 1507년 11월 12일 나일리아의 항복과 반도 조약 체결까지  [[클레이시아]] 전역에 걸쳐 총 12년 동안 진행된 전쟁이다.  
'''클레이시아 전쟁'''은 1495년 6월 29일부터 나일리아가 항복하고 반도 조약을 체결한 1507년 11월 12일까지 [[클레이시아]] 전역에 걸쳐 총 12년 동안 진행된 전쟁이다. [[나일리아 전쟁]] 이후 총기를 보급화하고 클레이시아 최고의 대요새 [[피렌체]]를 구축하여 중흥을 시도한 [[나일리아 왕국]]은 이 전쟁에서 12년 간의 장기전 끝에 변방의 소국으로 출발한 [[엘리시움 왕국]]에게 '''완전히 패배해버린다.''' 이는 [[이칼루스 1세]]와 [[존 T. 프랭클린]]의 과감한 전술과 전략, 그리고 뿌리부터 내려오던 나일리아 지휘부의 무능과 오만함이 합쳐진 결과였으며, 양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이에 경악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키오피-나일리아 전쟁]], [[제2차 키오피-나일리아 전쟁]] 이후 최초이자 유일하게 클레이시아 전역을 지배하고 초강대국으로 등극하며 전성기를 맞고 있던 [[나일리아 왕국]]의 '팍스 나일리아'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그 대신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새로운 초강대국 체제인 '팍스 엘리시움' 시대가 시작되었다. 나일리아는 영토가 대략 1000년 전인 [[나일리아 반도]]로 회귀하였으며 이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쇠퇴하다 1781년 [[10.14 나일리아 쿠데타]]로 멸망한다.


클레이시아를 양분할하는 [[엘리스족]]과 [[나일리족]], 두 민족의 통일국가가 총력전을 벌인 유일한 전쟁이다.<ref>[[나일리아 전쟁]] 때는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나일리아는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총력전을 하지 못하였다.</ref> 또한, 단일 전쟁 중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었다.'''<ref>[[제2차 이스톨리아 전쟁]]처럼 여러 전쟁들이 혼합되어 벌어진 "대전"을 제외한다면 클레이시아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다.</ref>
==전쟁의 배경==
==전쟁의 배경==
1342년 팍스 나일리아 체제를 깨부순 [[엘리시움 왕국]]의 독립 이후, 엘리시움 내에선 [[민주입헌당]] 세력을 중심으로 확장주의적 사상이 확산되었다. 특히 4대 국왕 [[루이스 4세]]는 이를 직접적으로 실행하여 아주 서서히, 지속적인 영토 확장을 통해 엘리시움의 영토를 [[아케론]] 전역까지 넓혀놓았다.
클레이시아 전쟁을 포함하여, 엘리시움이 14-15세기 연달아 정복 활동을 전개한 직접적인 원인은 '확장주의 사상의 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1342년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팍스 나일리아 체제에 균열을 일으킨 [[엘리시움 왕국]]의 독립 이후, 의회에선 [[민주입헌당]]중심으로 한 진보주의-자유주의파가 의석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ref>의회, 아니 더 나아가 엘리시움 왕국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활발한 정복 활동(즉, 진보주의)이었으므로, 독립 이후 당연히 그 세력들이 의회를 차지할 수 밖에 없었다.</ref> 당시의 엘리시움은 거의 국가 공동체 전체가 진보적이고 확장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실제로 14-15세기 엘리시움의 의회 의석 수를 살펴보면 자유주의 정당의 중추급이었던 [[민주입헌당]], [[의회민주당]] 등이 의석의 80% 이상을 차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한 빠른 정책 적용과 [[루이스 4세]]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등을 통해 변방의 신흥국이었던 엘리시움을 매우 빠른 속도로 근대화된 중앙집권체제 전제군주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한다.


당시의 엘리시움은 거의 국가 공동체 전체가 진보적이고 확장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실제로 14-15세기 엘리시움의 의회 의석 수를 살펴보면 자유주의 정당의 중추급이었던 [[민주입헌당]], [[의회민주당]] 등이 의석의 80% 이상을 차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민주입헌당과 의회민주당은 현대의 자유주의 정당과는 완전히 다른 매우 극단적인 형태의 정당이었고, 이들이 의회를 지배하자 국가 전체가 극단적인 형태로 움직이게 된다.<ref>이를 통해 [[엘리시움]]은 [[대항해시대 (헤르메스)|대항해시대]] 때 그 정점을 찍으며 '''팍스 엘리시움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근세 종말 및 [[아케론 혁명]] 이후로도 자유주의 세력이 기승을 부렸다.([[65년 체제]]) 13세기부터 시작된 엘리시움의 자유주의는 [[엘리시움 민주당 게이트]]와 [[에릭슨 트래비스 대통령 사망 사건]]으로 민주당이 몰락한 1850년대까지 작지 않은 국가인 엘리시움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다.</ref> 이는 루이스 시대의 종언 [[이칼루스 1세]] 시대에도 지속되었으며, [[나일리아 전쟁]]이라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계획을 실행하고,<ref>당시 나일리아 전쟁이 실제로 전개되자, 이스톨리아에선 확장주의 세력에 힘입은 이칼루스의 오만한 행동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모두가 알듯 이칼루스는 결과로 증명하며 비판 세력들의 입을 잠궈버렸다.</ref> '''이를 실제로 성공시키며 전 세계에 [[엘리시움 왕국|엘리시움]]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다.'''<ref>그 전개마저 엘리시움의 완승이었으니 말 다했다.</ref>
그러나 15세기가 시작되고부터는 말이 좀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1502년 의회 기준으로 400석 중 289석을 차지하고 있던 [[민주입헌당]] 당대표 자리에 [[에든 폴]]이 취임하면서 민주입헌당이 상당히 극단적인 형태의 진보주의 정당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민주입헌당은 의석 72%를 차지하는, 거의 의회를 지배하다시피한 정당이었고<ref>[[의회민주당]] 등 다른 정당들까지 합하면 거의 350석에 달했다.</ref> 이들이 극단화되자 국가 전체가 극단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는 루이스 시대의 종언 이후, [[이칼루스 1세]]
의 성격과 전략적 판단력과도 시너지를 일으키며, 1489년 [[나일리아 전쟁]]이라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계획을 실행한다.''' 침공 소식이 들려오자 이스톨리아 국가들은 '극단적 정치 사상의 최후'라고 평가하며 모두가 엘리시움의 완패를 예상하였으나, 모두가 그 결과를 알듯 이칼루스 1세는 '''이를 실제로 성공시키며 전 세계에 [[엘리시움 왕국|엘리시움]]이라는 네 자를 알리게 된다.'''<ref>그 전개마저 엘리시움의 완승이었으니, 말 다했다.</ref><ref>사실, '''실제로 15세기 엘리시움 진보주의는 문제가 많았다.''' 1400년대 중반부 민주입헌당은 그 극단적 형태가 더 심해져 무분별한 징집과 농민을 생각하지 않는 정책들을 의결하는 등 큰 비판을 받고 있었다. 거기에 [[나일리아 전쟁]]이라는 당시 엘리시움 국민 입장에선 터무니없는 계획으로 인해 자신(또는 가족)이 징집당해야 하니, 국민들의 분노는 들끓었으나 '''그냥 그 계획을 완벽하게 성공시켜버리면서''' 민심을 잠재웠다. 만약 이칼루스 1세가 없었다면 [[아케론 혁명]]이 300년 일찍 일어났을지도 모른다.</ref>


그 이후 승리의 중심에 있던 국왕 [[이칼루스 1세]]와 육군총사령관 [[존 T. 프랭클린]]은 특유의 냉철한 성격으로 1490년부터 국군 전 병력을 동원하는 "나일리아 재침공 계획"을 계획하고 있었다. 비록 이전의 나일리아 전쟁에서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일리아를 완전히 농락하며 완승을 거뒀던 엘리시움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고위층 인물들, 심지어는 같이 침공을 계획했던 [[존 T. 프랭클린]]마저 이번 계획이 성공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시도였다.
그 이후 승리의 중심에 있던 국왕 [[이칼루스 1세]]와 육군총사령관 [[존 T. 프랭클린]]은 특유의 냉철한 성격으로 1490년부터 국군 전 병력을 동원하는 "나일리아 재침공 계획"을 계획하고 있었다. 비록 이전의 나일리아 전쟁에서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일리아를 완전히 농락하며 완승을 거뒀던 엘리시움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고위층 인물들, 심지어는 같이 침공을 계획했던 [[존 T. 프랭클린]]마저 이번 계획이 성공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시도였다.

2024년 4월 24일 (수) 00:45 기준 최신판

 엘리시움 왕국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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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리아 왕국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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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시아 전쟁
Claysia War | ςLคאรเค ฬคг
□: 엘리시움 왕국 / : 나일리아 왕국
전쟁 전후 클레이시아의 모습. 두 국가의 전후가 완전히 바뀐 모습이다.
기간 1495년 6월 29일 ~ 1507년 11월 12일
(총 12년 4개월 14일)
장소 클레이시아 전역
교전국 엘리시움 왕국 엘리시움 왕국 나일리아 왕국 나일리아 왕국
지휘관 엘리시움 왕국 이칼루스 1세[1]
엘리시움 왕국 이칼루스 2세[2]
엘리시움 왕국 존 T. 프랭클린
나일리아 왕국 토리노 9세
나일리아 왕국 브라이언 커티스
결과 엘리시움 왕국의 승리
반도 조약의 체결
영향 '팍스 엘리시움' 체제의 시작
엘리시움의 클레이시아 패권국 등극
나일리아의 패망, 쇠퇴기 돌입

개요

클레이시아 전쟁은 1495년 6월 29일부터 나일리아가 항복하고 반도 조약을 체결한 1507년 11월 12일까지 클레이시아 전역에 걸쳐 총 12년 동안 진행된 전쟁이다. 나일리아 전쟁 이후 총기를 보급화하고 클레이시아 최고의 대요새 피렌체를 구축하여 중흥을 시도한 나일리아 왕국은 이 전쟁에서 12년 간의 장기전 끝에 변방의 소국으로 출발한 엘리시움 왕국에게 완전히 패배해버린다. 이는 이칼루스 1세존 T. 프랭클린의 과감한 전술과 전략, 그리고 뿌리부터 내려오던 나일리아 지휘부의 무능과 오만함이 합쳐진 결과였으며, 양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이에 경악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해 키오피-나일리아 전쟁, 제2차 키오피-나일리아 전쟁 이후 최초이자 유일하게 클레이시아 전역을 지배하고 초강대국으로 등극하며 전성기를 맞고 있던 나일리아 왕국의 '팍스 나일리아'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그 대신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새로운 초강대국 체제인 '팍스 엘리시움' 시대가 시작되었다. 나일리아는 영토가 대략 1000년 전인 나일리아 반도로 회귀하였으며 이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쇠퇴하다 1781년 10.14 나일리아 쿠데타로 멸망한다.

전쟁의 배경

클레이시아 전쟁을 포함하여, 엘리시움이 14-15세기 연달아 정복 활동을 전개한 직접적인 원인은 '확장주의 사상의 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1342년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팍스 나일리아 체제에 균열을 일으킨 엘리시움 왕국의 독립 이후, 의회에선 민주입헌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자유주의파가 의석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3] 당시의 엘리시움은 거의 국가 공동체 전체가 진보적이고 확장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실제로 14-15세기 엘리시움의 의회 의석 수를 살펴보면 자유주의 정당의 중추급이었던 민주입헌당, 의회민주당 등이 의석의 80% 이상을 차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한 빠른 정책 적용과 루이스 4세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등을 통해 변방의 신흥국이었던 엘리시움을 매우 빠른 속도로 근대화된 중앙집권체제 전제군주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15세기가 시작되고부터는 말이 좀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1502년 의회 기준으로 400석 중 289석을 차지하고 있던 민주입헌당 당대표 자리에 에든 폴이 취임하면서 민주입헌당이 상당히 극단적인 형태의 진보주의 정당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민주입헌당은 의석 72%를 차지하는, 거의 의회를 지배하다시피한 정당이었고[4] 이들이 극단화되자 국가 전체가 극단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는 루이스 시대의 종언 이후, 이칼루스 1세 의 성격과 전략적 판단력과도 시너지를 일으키며, 1489년 나일리아 전쟁이라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계획을 실행한다. 침공 소식이 들려오자 이스톨리아 국가들은 '극단적 정치 사상의 최후'라고 평가하며 모두가 엘리시움의 완패를 예상하였으나, 모두가 그 결과를 알듯 이칼루스 1세는 이를 실제로 성공시키며 전 세계에 엘리시움이라는 네 자를 알리게 된다.[5][6]

그 이후 승리의 중심에 있던 국왕 이칼루스 1세와 육군총사령관 존 T. 프랭클린은 특유의 냉철한 성격으로 1490년부터 국군 전 병력을 동원하는 "나일리아 재침공 계획"을 계획하고 있었다. 비록 이전의 나일리아 전쟁에서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일리아를 완전히 농락하며 완승을 거뒀던 엘리시움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고위층 인물들, 심지어는 같이 침공을 계획했던 존 T. 프랭클린마저 이번 계획이 성공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시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종전 후 나일리아 왕국도 더 이상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 꽤나 철저한 대비를 했기 때문이다. 나일리아 왕국은 전쟁 이후 토리노 9세를 중심으로 나일리아 전쟁의 패인이었던 군사 기지 부족 문제를 거의 대부분 지역에 설치하며 해결하였고 당시에 국경에 위치했던 제1서부군[7] 등 여러 군단들이 병합되고 분리되면서 체계적인 군사 체계를 갖췄기 때문이다. 또한, 키오피-나일리아 전쟁 이후 사실상 행정수도에 가까웠던 그레이터리시움에 병력을 다수 배치하여 군사적 수도서의 역할도 겸하게 해 엘리시움을 적극적으로 견제하였다.

결정적으로 나일리아를 이전처럼 공략하기 어려운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그동안 패권국이라는 이름 하에 멈춰있던 군 관련 산업들을 전면 가동시키고 이스톨리아와 활발한 교류를 하면서 나일리아 전쟁 이전부터 토리노 9세가 꿈꿔왔던 총기의 보급화를 성공했기 때문이다. 1436년 리스본의 안드레아 디 나텔리가 발명한 구식 총기를 약 60년 만에 거의 모든 부대에 보급시킨 것이다. 물론 엘리시움도 총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흥국인 만큼 나일리아에 비해 비교적 이스톨리아 국가들과의 유대 관계가 부족했기 때문에 리스본의 총기는 받지 못하고, 폴리네시아가 제작한 유사품에 가까운 총기밖에 없었기에 화력에서 완전히 밀릴 것이 확실했다. 심지어 엘리시움은 병력도 비교적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 문제가 더욱 더 심화될 것이다.

두 번째는 그레이터리시움 서쪽 즉, 엘리시움의 진행 경로에 위치한 도시 피렌체의 존재이다. 피렌체는 나일리아 제1군단이 위치한 도시로서, 전시 상황을 고려하여 설계되었고 나일리아에서 가장 병력이 많은 제1군단을 빠르게 집결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이는 나일리아 전쟁 이후 예산을 증축해 이제는 거의 '요새'의 형상을 띤다고 얘기할 정도. 그레이터리시움으로 향하려면 피렌체를 무조건 거쳐야 하기에 어디를 목표로 하던 대요새 피렌체를 뚫지 못한다면 엘리시움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8]

하지만 이 침공 시도가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나일리아 왕국은 이전부터 꽤나 긴 침체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일리아 왕국의 14세기 초반은 토리노 8세의 정책이 거의 다 실패로 돌아가고 회심의 레트로폴리스 원정에서도 대패하며 경제적으로 크게 몰락하던 시점이었다. 이 상황에서 토리노 6세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아케론 신도시 건설 계획도 엘리시움의 독립과 나일리아 전쟁의 대패에 의해 완전히 무산되어버렸다. 결론적으로 두 전쟁 사이 전간기의 나일리아 왕국은 비록 군사력은 이전보다 상승했으나, 사회·경제적으로 문제가 많았으며 군의 사기도 연속된 패배로 떨어진 상황이었고 상술한 토리노 9세의 정책들은 단순 그 침체기를 복구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이런 나일리아의 침체는 당연하게도 엘리시움 수뇌부의 귀에 들어갔고, 이칼루스 1세는 여러 고위층 인물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며 육군총사령관 존 T. 프랭클린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한다.

또한 나일리아는 군단 체계화, 총기 보급화 등 여러 업적들을 실현하기는 했으나, 정작 가장 중요했던 '설마 침공할까?' 라는 오만한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일부 극우 세력이 재침공을 주장하며 군대를 소집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극성 정치 세력의 입지가 그러하듯 수뇌부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당했으며,[9] 그 중에서 그나마 반대 의견을 낸 당시 육군총사령관 브라이언 커티스가 지금은 완패 이후이므로 절대 오만해서는 안된다며 국왕을 설득했으나 이마저도 수포로 돌아갔다.[10]

당시 국왕이었던 이칼루스 1세는 자신이 직접 나일리아 전쟁에서 증명했듯, 그 특유의 전략적 판단력으로 존 T. 프랭클린과 함께 거의 모든 작전들을 자신이 직접 계획하였다. 다만 나일리아 전쟁과는 달리 노쇠화로 인해 전장에 직접 나가진 못했으며, 대신 당시에는 왕자 신분이었던 이칼루스 2세가 전장에 투입되었다. 이로 인해 클레이시아 전쟁에서 엘리시움의 국왕이 이칼루스 2세인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상술했듯 틀린 말이다.

엘리시움의 초기 계획과 작전

그레이터리시움 - 센트럴 스테이트 - 이스트식스 - 아이테르시아

이칼루스 1세가 맨 처음 구상했던 침공 계획. 이 계획은 예측하지 못한 전쟁의 장기화 때문에 기간이 좀 길 뿐이었지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또 초기에는 나일리아 반도 본토까지 진격하는 계획은 없었으며 전황이 성공적으로 돌아가자 급조한 것이다.

이칼루스 1세는 이 대대적인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를 센터에리어 지역 점령으로 삼았다. 당시 센터에리어는 제2차 키오피-나일리아 전쟁 이후 팍스 나일리아 체제 하에 예산을 크게 증축시켜 매우 폭발적인 성장을 거두며 행정수도의 역할을 하고 있던 그레이터리시움을 중심으로, 그냥 웬만한 나일리아의 대도시들을 싹 다 가지고 있는 지역이라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센터에리어 도시 중 하나만 점령한다 해도 우리나라로 따지면 부산, 대구 수준의 도시가 사라지는 셈이라 나일리아의 피해는 매우 막중할 것이다.

하지만 이 초기 계획은 실제 진행된 계획보다 훨씬 축소된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불가능에 가깝던 계획이었다. 비록 대이변을 일으키며 나일리아 전쟁에서 완승을 거둔 엘리시움이지만, 지금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 접해있는 국경의 길이가 전쟁 이전보다 4배 이상 늘어났으며 나일리아 전쟁의 승리 요인이었던 교전 지역에 나일리아의 군사 기지가 부족했다는 것도 패전 후 토리노 9세가 군대 편성을 병합 및 분리하여 체계적인 군사 체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기에 이번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또한, 토리노 9세가 그레이터리시움을 군사수도로서의 역할도 겸하게 하여 병력들이 모인 상태라 단순하게 병력으로 밀려 애초에 초기에 전선을 올리는 것 자체도 가능할지가 의문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은 "엘리시움의 승리" 라는 기본 요건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어떤 작전을 쓴다 해도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100%에 수렴했고 그 기본 요건인 엘리시움의 승리마저도 절대 보장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한마디로 모든 경우의 수를 까져봐도 그냥 도박에 가까운 수였다.

엘리시움은 우선 리트보아에서 오른쪽에 있는 그레이터리시움 주의 소도시인 뉘베트와 헤이니어를 전쟁 초반의 목표로 세웠다. 조금만 더 진격한다면 수도인 그레이터리시움을 포함한 대도시 권역인 그레이터리시움-센트럴 스테이트 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당시에는 물론이고 현대까지도 아케론나일리아와 함께 클레이시아 3대 도시권으로 불리는 지역들이다. 또한, 세 도시권들 중 유일하게 가장자리가 아닌 중앙부에 위치해있기에, 초반에 섬멸하기 딱 좋은 지역이었다. 전쟁 발발 직전에 엘리시움은 리트보아 지역에 육군 13만 명을 소집했다.

이칼루스 1세는 방어도 놓치지 않았다. 완벽할 것만 같았던 이 작전의 거의 유일한 돌파구는 바로 엘리시움의 국경과 접경해있는 에이션티하프노스 지역이 나일리아 제1서부군(제5, 제6군단)의 주둔지였다는 점이다. 그나마 이 경계에는 마셸 강이 있었지만, 나일리아는 예전만큼의 명성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지구전, 특히 강이나 산 등 지형지물을 두고 싸우는 전투에 굉장히 강했다. 따라서 에이션티와 하프노스 지역의 경계에 제대로 된 방어선이나 요새를 만들어두지 않는다면 제대로 진격하기도 전에 본토가 공격당해 패배할 수도 있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후술하듯 총기를 '보급화' 시켜 다시 강력한 병력으로 돌아온 나일리아 왕국에겐 가능할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칼루스 1세는 전쟁 전부터 이 지역에만 두 군단[11]을 가용하여 대규모 방어선을 구축해놓았다. 이름하여 '에마뉘엘 요새'. 하지만 전쟁 때에는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하진 못했는데, 이유는 전쟁 초반부 전황이 엘리시움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자 제1서부군도 본토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제1서부군은 중부 지역에서 본군을 지원했다. 1502년 말 쯤에는 에마뉘엘 요새도 철수하여 본진으로 참여했다.

전개

엘리시움의 총공세

1495년 6월 29일, 엘리시움 육군은 선전포고와 함께 그레이터리시움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15만 육군을 총동원하여 뉘베트와 헤이니어 방향으로 나일리아 왕국을 침공했다. 엘리시움의 목적은 오직 하나, '영토' 였기에 초반부 공세를 펼쳐 그레이터리시움 주변 일대를 수복하는 것이 제1목표였다. 상술했듯 나일리아는 이 침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침공 2일 만인 1495년 7월 1일에 뉘베트, 헤이니어를 뺏기며 초반 전황을 아주 최악으로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의 일화 하나가 있는데, 침공 당시 토리노 9세나일리아 반도 파틀리아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고 하며, 나일리아군은 총사령관인 국왕의 명 없이는 독단적인 행동을 할 수 없기에 당시 육군총사령관인 브라이언 커티스가 국왕에게 매우 크게 격노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불경죄로 강제 전역의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커티스가 지금까지 이뤄낸 업적들과 현 상황이 전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특별감형되었다.

뉘베트와 헤이니어를 점령하며 엘리시움의 본진은 1차 목표인 그레이터리시움까지 약 200km도 남지 않은 상황, 나일리아는 지금 당장 모을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쓸어담아 소집시켰고, 어떻게든 그레이터리시움은 방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진격하던 엘리시움 앞에는 대요새 "피렌체"가 앞을 막고 있었다.

피렌체 전투

 자세한 내용은 피렌체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미들웨어 전투

전선

틀:클레이시아 전쟁의 주요 전선

평가

클레이시아 전쟁의 정세 요약.
흰색이 엘리시움 왕국, 초록색이 나일리아 왕국이다.

역사상 비슷한 사례조차 찾아볼 수 없는[12], 그야말로 압도적인 자이언트 킬링. 이 전쟁 하나로 엘리시움 왕국은 무려 600년 간 클레이시아의 패권국으로 자리잡고 있던 나일리아 왕국을 다시 반도의 변방국으로 밀어냈고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였다.

나일리아는 물론이고[13] 엘리시움 내부에서도 과연 이 침공이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칼루스 1세는 나일리아의 약점들을 정확히 꿰뚫으면서 초반부 크게 진격했고, 비록 중반부 전력 차이로 조금 주춤하긴 했지만 결정적인 미들웨어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다시 기세를 가져왔고, 결국 1507년 11월 12일 반도 조약을 통해 엘리시움이 승리하면서 12년 간의 전쟁은 끝이 나게 되었다.

전후 및 반응

엘리시움 왕국

반도 조약이 발효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본 사람들은 12년 간의 전쟁이 드디어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했으며, 그들에겐 너무나 거대한 존재였던 '나일리아 왕국'을 자신들이 직접 무너뜨렸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엘리시움의 승리는 자국 내에서 큰 파장을 줬으며, 승전을 자축하는 행사가 일주일 넘게 이어졌다.

역사적으로 한 국가의 손에 들어가있던 경우가 많았던 클레이시아는 가이아 제국, 키오피 왕국, 나일리아 왕국을 넘어 이제 엘리시움 왕국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엘리시움 왕국은 이 전쟁을 끝으로 사실상 클레이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패권국이 되었으며, 이제 다른 대륙으로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강대국이 되었다. 비록 전쟁 초반부에는 너무 커진 영토와 이칼루스 1세의 사망 등으로 혼란이 있었지만, 직후에 즉위한 이칼루스 2세가 압도적인 업적을 세우면서 혼란을 빠르게 잠재웠다.

엘리시움은 이제 세력을 이스톨리아까지 뻗치기 시작한다. 1515년 엘리시움은 대항해시대 국가들에 밀려 경제적인 위기를 겪고 있던 폴리네시아 왕국에게 막대한 지원을 약속하며 영구적인 동맹을 맺었으며 그 외에도 제노바-오슬리아, 멘부르크 등 비교적 서쪽에 위치한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또 특출나게 적대적인 관계 없이 이스톨리아의 전 국가와 활발한 교역을 했으며, 이는 제1차 이스톨리아 전쟁 전까지 유지되는 엘리시움의 '외교적 중립'의 기반이 된다.

정책으로 보자면 국방비를 대폭 감축시키고 계속 유지되어왔던 완전 징병제를 폐지하고 전시 시에만 징병을 시행하는 부분 모병제 형태로 전환하였다. 또한, 넓어진 영토에 맞춰 수도를 그레이터리시움으로 천도하였으며 국시도 '작은 민족, 작은 왕국'에서 '왕국을 수호하라 (קг๏ՇєςՇ Շђє кเภﻮ๔๏๓)'으로 변경되었다.

엘리시움 왕국의 최전성기는 아쉽게도 이칼루스 시대까지만 유지된다. 이후의 패트릭 1세, 패트릭 2세는 전 국가적인 근대화 정책을 벌였다. 그러나 오히려 엘리시움 산업의 반 이상을 담당했던 농업이 힘을 잃기 시작하고, 불균형적인 경제 속에 1782년 아케론 혁명이 일어나면서 왕정이 종결되고 1784년 공화국 체제가 시작되었다.

나일리아 왕국

더 이상의 저항은 불가했습니다.
토리노 9세, 항복 당시

나일리아는 항복했다. 클레이시아 전체를 지배하던 최전성기의 나일리아는, 두 번의 완패 끝에 과거로 족히 천 년은 넘어가 가이아 정복 이전의 나일리아 반도에 위치한 소국으로 복귀하였다.

미드웨어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기점으로 나일리아 수뇌부는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1507년 11월 6일 종전 협정을 요청했고 엘리시움의 요청에 따라 1507년 11월 12일 이칼루스 1세가 나일리아에 방문하여 수도인 나일리아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전쟁의 패배로 군의 사기와, 나일리아인들의 애국심, 자존심은 전부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심지어 조약도 나일리아의 영원한 고향이라 불리는 수도 나일리아에서 체결했기에 더욱 더. 나일리아의 중심에서 종전 협정을 체결하는 장면은 나일리아 역사상 최악의 치욕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전쟁 이후 필리피프 왕조가 들어서며 수도인 나일리아를 더 발전시켰고,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로 정책을 변경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1781년 10월 14일 리스피아누 디아블로가 이끄는 제국혁명위원회10.14 나일리아 쿠데타를 일으키며 나일리아 제국을 세우면서 무려 2천 년을 넘게 존속한 나일리아 왕국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나일리아의 패배 이유

관련 문서

각주

  1. 나일리아 전쟁 때는 직접 전장에 나가기도 했으나 노쇠화의 영향으로 클레이시아 전쟁에선 작전 지휘의 역할을 맡았다.
  2. 당시에는 왕자 신분.
  3. 의회, 아니 더 나아가 엘리시움 왕국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활발한 정복 활동(즉, 진보주의)이었으므로, 독립 이후 당연히 그 세력들이 의회를 차지할 수 밖에 없었다.
  4. 의회민주당 등 다른 정당들까지 합하면 거의 350석에 달했다.
  5. 그 전개마저 엘리시움의 완승이었으니, 말 다했다.
  6. 사실, 실제로 15세기 엘리시움 진보주의는 문제가 많았다. 1400년대 중반부 민주입헌당은 그 극단적 형태가 더 심해져 무분별한 징집과 농민을 생각하지 않는 정책들을 의결하는 등 큰 비판을 받고 있었다. 거기에 나일리아 전쟁이라는 당시 엘리시움 국민 입장에선 터무니없는 계획으로 인해 자신(또는 가족)이 징집당해야 하니, 국민들의 분노는 들끓었으나 그냥 그 계획을 완벽하게 성공시켜버리면서 민심을 잠재웠다. 만약 이칼루스 1세가 없었다면 아케론 혁명이 300년 일찍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7. 제5, 제6군단이 병합되었다.
  8. 심지어 피렌체 바로 옆옆 소도시인 레즈벨트에는 나일리아 역사상 최고의 군사 조직이라 불리는 제6특수기동군단도 위치해 있었다.
  9. 이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자 극우 세력의 지지율이 2배 가량 올라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10. 이 때문에 실제로 침공이 전개되자 브라이언 커티스가 국왕에게 매우 크게 격노했다고 한다. 이 침공도 결국에는 국왕이 아닌, 자신이 전담해야 하기 때문.
  11. 제4, 제5군단이다. 전쟁 때에는 제1남서부방어군이라는 이름으로 두 군단이 통일되었다.
  12. 그나마 자이언트 킬링으로 유명한 나일리아 전쟁이 있지만 여기도 엘리시움과 나일리아의 전쟁이다, 클레이시아 전쟁은 단 한 번의 전쟁만으로 대륙 전체의 패권과 향후 정세를 완전히 바꿔버렸다는 점에서 나일리아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자이언트 킬링이라고 평가된다.
  13. 상술했겠지만, 정말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엘리시움의 재침공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