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업적

Ernst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3월 28일 (목) 23:37 판
조선 16대 국왕
세조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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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계지복
변법위인
공상지균
만민오락
정묘호란
여진 공세섬멸
조정은 진작부터 여진을 국가가 아니라 야인으로보고 계속하여 명에 원조하니, 이를 불편하게 여긴 청국한은 마침 영원성 전투로 휴전에 들어간 명을 제쳐두고, 후방의 적인 조선을 공격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가도에 숨어든 모문룡 일당을 제거하고 조선을 휘하에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공세는 평양 일대에서 궤멸되었으며, 이로 인해 2만이 넘는 병력을 손실한 청군은 후퇴하였고 청국한의 위엄이 실추되자 여진의 내부분란이 격화되었다.
의주화약
요동 진출
정묘호란에서 대패하고 역공을 당해 요동이 큰 피해를 입자 화친을 요청해왔고, 이에 성상께서 백성의 고역을 생각해 화친에 응하니 배상금을 지불하고 양국은 형제의 예를 갖추며 압록강 인근에 청군을 두지 않는 것, 명과 10년간 휴전을 조건으로 화약을 맺었다.
임오북벌
요동 진출 가시화
청군이 금주를 공격하자, 명은 원군을 보내어 구원하고자 했으며, 이 때, 조선이 후방에서 협공하여 청군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에 조선은 명의 요청대로 원병을 일으켜 요동으로 진출하였고 이내 요동성을 점령해 청의 수도인 묵던 일대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명군은 송산전투에서 궤멸하였다. 홍타이지는 급히 회군하였으나 조선군은 이미 퇴각한 상태였다.
을유호란
요동 진출로 확보
청군이 화북으로 진출하여 기세를 올리자 청국한 풀린은 조선을 굴복시키고자 하여 10만의 대병력을 이끌고 압록수를 건넜는데, 이에 성상께서 강화로 몽진하였으나 이내 근왕병이 승전보를 울리며 한성을 탈환하고 후퇴하는 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어 전멸시켰다.
경인북벌
요동 진출
조선은 30만에 달하는 병력을 징집하여 원정을 준비하였고, 이를 위해 대부분의 재정을 쏟아부었고 열도에서도 증원군을 차출하였다. 이들은 묵던(봉천)과 일대를 장악하고, 산해관까지 이르렀고, 일본과 정선공의 원군은 산해관 후방에 상륙하였다. 이내 북경이 함낙되었다.
일조법
조세제도의 간소화
각종 잡세와 지방세, 전세 등을 일원화하여 지세로 합쳐 징수하였으며, 이 때, 지세는 논밭 뿐만 아니라, 대장간, 사업장, 집터 등을 통합한 것이다. 지세의 절반은 곡식으로 지방에 납부하고 절반은 화폐로 중앙에 납부하도록 하였다. 이후에 요역도 포함되었다.
상은제
국가보험제도
증명가능한 불황이나 재난, 인명사고로 인하여 소득이 급감하였을 때, 평년대비 소득의 8할이 보장되도록 금액을 빌려주는 제도
노비감제법
노비세습폐지
노비종모법을 폐지하여 오직 형벌과 부채에 의해서 노비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조합신고제
공장제 확산
국립조합인 직공단과 건선거 등의 영향을 받아 사조보나 출판물을 다루는 인쇄조합과 공인과 결탁한 무역조합, 기공조합 등 각종 산업에서 조합을 민간에서 설립하도록 장려하고, 이를 신고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조합 소유의 토지에 대해 법인으로 납부하며 이는 모든 조합원이 동일하게 납부하도록 법제화되었다.
공인사상제
사무역 허용
대마도, 평호도, 제주도, 강화도, 완도 5개 섬에 대하여 사무역을 허용하도록 하고, 항만에서 즉시 세금을 수취하고 수입물자를 확인하도록 제도화하였다.
임역조합제
요역의 시장화
토목, 조영 등 이전까지 세금으로 부과했던 신역을 민간 조합에 일정부분 양도하여 시장에서 맡아하도록 점진적으로 개혁하였다.
천주비판
서민문학 발달
민간 인쇄소가 만들어지고 언문소설이 각지에서 유행하며, 민간문학이 발달하였다.
극패
서민문화 발달
판소리, 사물놀이, 탈춤, 널뛰기, 격방 등이 성행하고 이를 전문적으로 하면서 순회하는 극패라는 집단이 융성하게 되었다.
격방회
서민문화 발달
격방과 같은 경기 또한 지역별로 패를 꾸리고 규칙을 제작하는 등 민간에서 발전되었다.
古界之復
북방의 옛 변경을 다시 되찾을지어다
變法爲仁
인을 행하기 위해 법을 바꾸노라
工商之均
공업과 상업을 균형있게 다루어야 한다
萬民娛樂
만백성이 걱정없이 풍류를 즐기는 것이 보기 좋구나
조선 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