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세이 로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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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적으로는 2011년의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본다. 이때 정부가 "먹어서 돕자"로 대표되는 후쿠시마 지원 관제활동 및 국난극복의 명목으로 국민적 단결을 강조하기 시작하며 개인주의 풍조는 사그라들었고 아직도 쑴틀거리던 집단주의는 다시금 사회를 휘어잡았다.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2011년의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본다. 이때 정부가 "먹어서 돕자"로 대표되는 후쿠시마 지원 관제활동 및 국난극복의 명목으로 국민적 단결을 강조하기 시작하며 개인주의 풍조는 사그라들었고 아직도 쑴틀거리던 집단주의는 다시금 사회를 휘어잡았다.


그러나 헤이세이 로망 20년간의 극도로 자유로운 사회는 이제 국민들의 뇌리에 민주주의의 개념을 심게 되었으며, 이는 2010년대에 들어서도 보수 세력이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못하는 형국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실제로 2023년에도 일본의 민주주의 지수는 24위로서 외려 아시아에선 가장 높았다.
그러나 헤이세이 로망 20년간의 극도로 자유로운 사회는 이제 국민들의 뇌리에 민주주의의 개념을 심게 되었으며, 이는 2010년대에 들어서도 보수 세력이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못하는 형국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실제로 2023년에도 일본의 민주주의 지수는 28위로서 외려 아시아에선 2반째로 높았다.


== 평가 ==
== 평가 ==

2024년 4월 17일 (수) 22:19 판

Destiny634, 2024 - | CC-0


平成ロマン

개요

일본에서, 1991년 냉전 종식과 민주화 이후 2011년 도호쿠 대지진, 또는 2012년 아베 신조의 집권까지 이어진 20여년에 대한 낭만주의 풍조.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있었던 다이쇼 로망과도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 이 시기는 일본이 세계 초강대국으로서 세계를 삼분하고, 민족주의와 집단주의, 애국,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 존경을 강요받던 경직된 사회가 풀리고 급격히 자유화의 붐이 불어갔던 시기였다.

쇼와 로망이 강력하고 위대했으며 세계를 주름잡던 대일본제국의 영광과 번영에 대한 향수라면, 헤이세이 로망은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했으며, 특유의 해빙된 사회 분위기에 대한 향수라고 할수 있다.

시대 자체는 낭만시대라고 불린다.

특징

물론 잃어버린 10년으로 대표되는 경제의 침체라는 점에서는 쇼와 시대보다 못했다. 1985년 4만 달러에 달하던 일본의 1인당 GDP는 20년 후인 2005년에도 4만 달러일 정도로 경제 성장은 사실상 정체되었다. 자이바츠들이 줄줄이 도산하여 실업자가 늘어나고, 은둔청년 히키코모리 문제가 부상하는 등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암흑기에 가까웠다.

이는 대동아공영권을 경영하며 자원과 원자재 등을 충당하고 그 원자재로 만든 일본제의 수준높은 제품을 후진적인 공영권 회원국들에게 고가에 팔아넘기는 방식으로 일본은 엄청난 성장과 호황을 구가하였으나, 일순간 이것들이 끊기자 일본은 당장 돈을 벌수가 없게 됐던 것이었다. 이에 경제가 붕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민주화 후 들어선 새로운 정부는 긴축 정책 등의 경제 안정책으로 90년 후반 ~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 최악의 경제 침체를 극복하고 상황을 어느정도는 안정화시켰으며, 애초에 일본은 세계적으로 가장 부유한 나라였기에 침체를 겪었다 해서 완전히 무너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헤이세이 로망의 핵심은 문화발전과 사회의 해빙이었다. 이전까지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있던 문화 산업은 민주화와 함께 모든 규제가 풀리게 되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즉 아니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으며 J-POP 또한 미국 대중문화 개방으로 대표되는 서방 음악계의 영향을 받아 동서양의 조화를 낳는 새로운 일본 음악을 탄생시키게 된다. 이 시기 대표적으로 X-JAPAN등 일본에서 록 밴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 영화는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자유롭게 만들어냈으며 세계로 수출되면서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사회 분위기는 자유의 물결이 물밀듯 들어왔다. 정부에 의해 강요되던 집단주의와 뒤틀린 애국심은 구시대의 산물로 치부되었고, 침체되는 경제와 실업률, 줄어든 청년들의 경제적 기회는 나 하나 잘 살자는 개인주의 가치관을 당시의 청년들(70-80년대생)에게 심어줬다. 정치적으로도 다당제의 허용과 보수-혁신 양당제의 성립은 더욱 상호견제를 통한 민주주의의 길로 이행하도록 하였다.

징병제의 전면적인 폐지가 1998년 이루어지고, 이는 군에 복무한 남성들이 군대식 문화를 사회로 가지고 나와 그것을 사회 표준으로 만들고, 회사와 심지어 학교, 가정에서도 통용되던 "군기"로부터 비롯된 병영국가가 종막을 고했음을 알리게 되었다.

가정의 경우 이 시기의 아버지들은 불황 속에서 가족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무게를 짊어진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부유하고 부족함 없던 그들의 젊은 시절과 대조되게 갑자기 찾아온 불황은 책임을 막중하게 만들었다.

종막

정치적인 종막의 시작은 보혁 상호견제 양당제의 붕괴였다. 2008년 제47회 중원선에서 사회당에 의한 정권 교대가 이루어졌는데, 1년여 만에 2009년 9월 사회당 내란 사태라는 초유의 사태가 드러나면서 사회당을 위시한 혁신계 진영은 공중분해되었다. 또한 검찰과 경찰에 의하여 다시금 공안정국이 조성되었다.

2009년 11월 제48회 중원선에선 야당의 붕괴로 인하여 자민당이 의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5당 체제"라는 이름의 자민당 합법적 독주가 확립되었다. 쓰키야마 아키히로 내각 시기부터 시작된 권위의 복귀는 2012년 보수 방류파의 아베 신조가 집권하면서 확립되었으며 헤이세이 로망도 끝이 나게 되었다.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2011년의 도호쿠 대지진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본다. 이때 정부가 "먹어서 돕자"로 대표되는 후쿠시마 지원 관제활동 및 국난극복의 명목으로 국민적 단결을 강조하기 시작하며 개인주의 풍조는 사그라들었고 아직도 쑴틀거리던 집단주의는 다시금 사회를 휘어잡았다.

그러나 헤이세이 로망 20년간의 극도로 자유로운 사회는 이제 국민들의 뇌리에 민주주의의 개념을 심게 되었으며, 이는 2010년대에 들어서도 보수 세력이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못하는 형국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실제로 2023년에도 일본의 민주주의 지수는 28위로서 외려 아시아에선 2반째로 높았다.

평가

정말 로망의 시대였는가?

대중매체에서

헤이세이 로망은 비교적 최근의 시대이다 보니 자료도 풍부하고, 산증인들이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지라 현재 일본의 대중매체에선 헤이세이 로망, 특히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가 배경은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