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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공]]과 [[융무제]](隆武帝)가 중심이 된 부흥 세력은 [[절강성]](浙江省)에 기반을 둔 [[주이해]](朱以海)와 황위를 두고 마찰을 겪는 등 부흥 세력간의 혼선을 겪은 뒤에 1646년에 [[복건성]](福建省)으로 진격한 [[청나라]](淸國) 군대에게 패배함에 따라 대륙에서의 힘을 잃게 되었고, 포로로 끌려간 [[융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영력제|주유랑]](朱由榔)이 [[광서성]](廣西省)과 [[주산군도]](舟山群島)를 지나 [[정성공]]의 근거지인 [[하문]](廈門)에서 합류함에따라 이해관계로 얽혀있던 부흥 세력은 단일화될 수 있었다. 이후 [[금문도]](金門縣)까지 밀려난 명 부흥 세력은 1661년에 [[타이완 섬]]에 위치한 [[타이징]](臺北)을 공격하여 [[네덜란드령 포르모사]](臺灣荷蘭統治時期)를 몰아내고 새로운 근거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정성공]]과 [[융무제]](隆武帝)가 중심이 된 부흥 세력은 [[절강성]](浙江省)에 기반을 둔 [[주이해]](朱以海)와 황위를 두고 마찰을 겪는 등 부흥 세력간의 혼선을 겪은 뒤에 1646년에 [[복건성]](福建省)으로 진격한 [[청나라]](淸國) 군대에게 패배함에 따라 대륙에서의 힘을 잃게 되었고, 포로로 끌려간 [[융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영력제|주유랑]](朱由榔)이 [[광서성]](廣西省)과 [[주산군도]](舟山群島)를 지나 [[정성공]]의 근거지인 [[하문]](廈門)에서 합류함에따라 이해관계로 얽혀있던 부흥 세력은 단일화될 수 있었다. 이후 [[금문도]](金門縣)까지 밀려난 명 부흥 세력은 1661년에 [[타이완 섬]]에 위치한 [[타이징]](臺北)을 공격하여 [[네덜란드령 포르모사]](臺灣荷蘭統治時期)를 몰아내고 새로운 근거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황제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정씨 가문은 [[동녕왕]](東寧王)이라는 세습 직함을 내세워 실질적인 통치를 시도했고, [[정성공]]의 뒤를 이은 [[정경]](鄭經)은 [[강희제]](康熙帝)와의 협상을 통해 흥명멸청(興明滅靑) 기치의 포기 및 변발과 신하의 예를 달할 것을 요구의 대가로 독립 세력임을 묵인하는 것으로 국체를 보존하였다.
황제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정씨 가문은 [[동녕왕]](東寧王)이라는 세습 직함을 내세워 실질적인 통치를 시도했고, [[정성공]]의 뒤를 이은 [[정경]](鄭經)은 [[강희제]](康熙帝)와의 협상을 통해 흥명멸청(興明滅靑) 기치의 포기 및 변발과 신하의 예를 달할 것을 요구의 대가로 독립 세력임을 묵인하는 것으로 국체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고, [[삼번의 난]](三藩之亂) 당시에는 [[경정충]](耿精忠)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가담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청나라]]와 함께 삼번 세력의 해상 패권을 위협함으로서 확고한 독립국가 체제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 성립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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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5일 (금) 00:50 판

大明帝國
後明帝國, 東寧國
후명 정권
대명제국, 동녕국

1661년1683년
국기
표어 반청복명反淸復明
수도 타이징(臺京)
정치
공용어 근세 중국어, 대만 민남어
정부 형태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
황제(皇帝) 영력제(永曆帝, 1661-1670)
정무제(定武帝, 1670-1682)
융광제(隆光帝, 1682-1683)
동녕왕(東寧王) 정성공(鄭成功, 1655-1670)
정경(鄭經, 1670-1681)
정극장(鄭克臧, 1681-1683)
역사
 • 타이징 공방전 1661년 4월 29일
 • 삼번의 난 1673년 - 1681년
 • 천창선위 선언 1683년 7월 12일
지리
면적 35,980 km²
내수면 비율 2.8%

후명(중국어: 後明) 혹은 동녕국(중국어: 東寧國)은 1661년부터 1683년까지,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남명 정권(南明政權)이 몰락한 이후, 영력제(永曆帝)와 정성공(鄭成功)을 위시한 명나라 부흥 세력이 타이완 섬(臺灣島)으로 도피한 이후의 통치 정권을 일컫는다.

정성공융무제(隆武帝)가 중심이 된 부흥 세력은 절강성(浙江省)에 기반을 둔 주이해(朱以海)와 황위를 두고 마찰을 겪는 등 부흥 세력간의 혼선을 겪은 뒤에 1646년에 복건성(福建省)으로 진격한 청나라(淸國) 군대에게 패배함에 따라 대륙에서의 힘을 잃게 되었고, 포로로 끌려간 융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주유랑(朱由榔)이 광서성(廣西省)과 주산군도(舟山群島)를 지나 정성공의 근거지인 하문(廈門)에서 합류함에따라 이해관계로 얽혀있던 부흥 세력은 단일화될 수 있었다. 이후 금문도(金門縣)까지 밀려난 명 부흥 세력은 1661년에 타이완 섬에 위치한 타이징(臺北)을 공격하여 네덜란드령 포르모사(臺灣荷蘭統治時期)를 몰아내고 새로운 근거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황제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정씨 가문은 동녕왕(東寧王)이라는 세습 직함을 내세워 실질적인 통치를 시도했고, 정성공의 뒤를 이은 정경(鄭經)은 강희제(康熙帝)와의 협상을 통해 흥명멸청(興明滅靑) 기치의 포기 및 변발과 신하의 예를 달할 것을 요구의 대가로 독립 세력임을 묵인하는 것으로 국체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고, 삼번의 난(三藩之亂) 당시에는 경정충(耿精忠)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가담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청나라와 함께 삼번 세력의 해상 패권을 위협함으로서 확고한 독립국가 체제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성립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