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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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후보 지명에 가장 유력한 후보는 현직 대통령인 [[해리 S. 트루먼 (51주)|해리 S. 트루먼]]이었다. 새로 제정된 수정헌법 22조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출마할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루먼은 1952년이 시작하는 해에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전 대선 후보였던 듀이가 주도하는 [[사우스코리아]] 문제에 대한 공화당의 반발은 네 번째 해에 접어들었고, 중국이 공산화되고 자유의 경계선이 후퇴한 상태에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반공산주의십자군은 "붉은 위협"을 강조하며 대중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또한 트루먼 행정부의 고위급 인사 일부와 연방 공무원들의 광범위한 부패가 적발되면서 트루먼은 임기 말 레임덕에 빠진 상황이었다. 여론조사에서 그는 57%를 넘는 부정 평가를 받았으며, 이는 수십 년 후 [[리처드 닉슨 (51주)|리처드 닉슨]]이나 [[조지 W. 부시]]의 부정 평가에 이어 3번째를 기록했다.
트루먼의 경쟁 상대는 포퓰리스트인 에스테스 케파우버 테네시 상원의원이었다. 케파우버 의원은 1951년 전국적으로 방송된 조직범죄수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으며, 범죄와 부패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2월 15일의 갤럽 여론조사는 트루먼의 약세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민주당 지지층에서 트루먼은 36%, 케파우버는 21%의 선택을 받았지만, 중도층에서 트루먼은 18%에 그쳤지만 케파우버는 두 배인 36%의 지지를 받았다.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케파우버는 트루먼 보다 높은 표를 받았는데, 이는 트루먼을 분노케 했다. 하지만 케파우버는 "이 결과는 정부에 대한 거부나 반대가 아니라, 변화에 대한 욕망"이라며 겸허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예비선거에서 자신감을 잃은 트루먼은 3월 29일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ref>한편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케파우버에게 패배하기 훨씬 전에 재선 출마에 대한 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ref>
트루먼의 퇴장으로 케파우버는 선두주자가 되었고, 그는 대부분의 예비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다른 주요 경쟁자에는 홈스테이트에서 승리한 휴버트 험프리 미네소타 상원의원, 플로리다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조지아 출신의 리처드 러셀 주니어 상원의원,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승리한 외교관 아벨 해리먼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 대의원의 대부분은 프라이머리가 아니라 코커스였기 때문에 민주당 주지사나 시장이 대의원을 사실상 선택할 수 있었다. 특히 트루먼을 포함한 민주당 지도부와 북부와 중서부의 민주당 위원장들은 케파우버를 굉장히 싫어했는데, 그의 범죄조직 조사위원회에서 마피아와 대도시 민주당 조직들 사이의 부정한 커넥션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당 지도부는 케파우버를 신뢰할 수 없는 매버릭으로 여겼고, 그래서 그를 지지하기를 거부했다.
대신 트루먼은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으면서도, 민주당 지도부도 수용 가능한 다른 후보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후보자들은 큰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러셀은 남부의 지지를 받았지만 인종차별을 지지했으며, 트루먼이 주도하는 시민권법에 반대한 전력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북부와 중서부 대의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트루먼은 뉴욕의 해리먼을 선호했지만 그는 선출직을 맡은 적이 없었고, 정치의 경험이 없었다. 앨번 W. 바클리 부통령은 74세의 고령인데다, 노동조합 위원장들의 반대로 추대에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약점이 거의 없는 일리노이 주지사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을 찾아내며 민주당 지도부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스티븐슨은 일리노이의 유명한 가문 출신이었으며, 달변가였고, 지적인 이미지였으며, 정치적으로도 온건파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1952년 봄, 트루먼은 스티븐슨에게 대통령 경선 출마를 제안했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주지사 재선을 원하고 있었고, 트루먼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민주당 지도부는 끊임없이 요청했으며 유권자들은 다가오는 전당대회에 깜짝 등판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 민주당 전당대회 ====
==== 민주당 전당대회 ====
[[1952년 민주당 전당대회]]는 공화당이 몇 주 전에 모인 시카고 경기장에서 열렸다. 전당대회가 스티븐슨의 홈스테이트에서 열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는다는 입장을 확실히 밝히고, 전당대회 개막 인사를 하게 된다. 그는 유머 있고 감동적인 인사는 대의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자신이 출마를 거부하는 상황에서도 대의원들이 그를 지명하기 위한 노력을 더 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리노이 지역조직 위원장인 제이콥 아비가 스티븐슨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경선 출마를 간청한 이후, 스티븐슨은 마침내 경선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출마 결정과 동시에 중서부와 북부의 지역 지도부는 빠르게 스티븐슨에 대한 지지선언을 발표했다. 케파우버는 1차 투표에서는 선두를 달렸지만, 승리에 필요한 표보다 훨씬 적은 표 만을 얻었다. 스티븐슨이 3차 투표에서 지명될 때까지 케파우버의 표는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대의원들이 스티븐슨을 지명한 후, 전당대회는 부통령 후보 선출로 전환되었다. 존 스파크먼 상원의원과 마이크 먼로니의 두 명으로 후보를 좁힌 트루먼과 민주당 지도부는 앨라배마 출신의 보수주의자인 스파크먼을 후보로 지명했다. 이후 전당대회는 스파크먼을 스티븐슨의 러닝메이트로 확정했다. 그는 남부 정체성과 보수적인 가치관 덕분에 선택되었으며, 당 지도부는 스티븐슨과 스파크먼이 시너지를 내 균형 잡힌 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 공화당 ===
=== 공화당 ===

2022년 9월 25일 (일) 17:12 판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52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스티븐슨 134인 (25.1%)
(74.9%) 399인 아이젠하워
1948년 11월 2일
1948 대선
1952년 11월 4일
1952 대선
1956년 11월 6일
1956 대선
투표율 64.3%
투표자 72,799,857표
선거일시 1952년 11월 4일 5시 ~ 3일 6시 (UST)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
대통령
애들레이 E. 스티븐슨
부통령
존 스파크맨
공화당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부통령
리처드 닉슨
선거인단
134인 399
전국득표
49.2%
35,792,653표
50.0%
36,414,293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공화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1952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1952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는 1952년 11월 4일 실시된 미국의 42번째 대통령 선거이다. 공화당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민주당애들레이 E. 스티븐슨 후보에 대해 압도적 승리를 거뒀고, 이 선거로 1932년부터 시작된 민주당의 연승가도를 끝냈다.

일리노이 주지사 스티븐슨은 테네시 상원의원 에스테스 케파우버, 조지아 상원의원 리처드 러셀 주니어 및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952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3차 투표에서 후보로 지명되었다. 공화당 후보 지명은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와 오하이오의 상원의원 로버트 A. 태프트 사이에서 치러졌다. 토마스 E. 듀이와 공화당 지도부의 지지를 받은 아이젠하워는 195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캘리포니아 출신의 젊은 상원의원 리처드 닉슨을 러닝메이트로 삼아 태프트를 간신히 따돌렸다. 이 대선은 역사상 첫 번째 TV 광고를 송출한 선거였는데, 이 때 아이젠하워와 스티븐슨의 광고가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아이젠하워의 카리스마가 굉장한 호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화당은 트루먼의 사우스코리아 승인과 광범위한 냉전 전략을 공격했고, 소련 스파이들이 미국 정부에 침투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과 스티븐슨은 인기 없는 트루먼 행정부와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뉴딜의 향수를 자극하는 선거운동을 벌였고, 공화당 정부의 재집권은 또 다른 대공황을 불러올 것이라고 불안감을 확산 시키는데 주력했다.

아이젠하워는 캠페인 슬로건인 "I Like Ike"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대전을 통해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이 인기와 트루먼의 저조한 인기는 공화당의 승리로 이어졌고, 아이젠하워는 50.02의 득표율을 얻으며 1928년을 제외하고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로 단 한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던 남부의 버지니아, 테네시, 플로리다, 텍사스 등 모든 주에서 승리했다. 1888년 이후 웨스트버지니아 없이 공화당이 승리한 선거 역시 이번이 처음이었다. 1920년 이후 켄터키 없이 공화당이 승리한 미국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선거였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은 양원을 확고히 통제하는 것에는 모두 실패했다.[1]

후보

민주당

민주당 (51주)
민주당 (51주)
1952년 민주당 지명 후보
애들레이 E. 스티븐슨
Adlai E. Stevenson
존 스파크먼
John Sparkman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1949–1953)
미국 상원의원(앨라배마)
(1946–1979)

민주당 후보 지명에 가장 유력한 후보는 현직 대통령인 해리 S. 트루먼이었다. 새로 제정된 수정헌법 22조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출마할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루먼은 1952년이 시작하는 해에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전 대선 후보였던 듀이가 주도하는 사우스코리아 문제에 대한 공화당의 반발은 네 번째 해에 접어들었고, 중국이 공산화되고 자유의 경계선이 후퇴한 상태에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반공산주의십자군은 "붉은 위협"을 강조하며 대중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또한 트루먼 행정부의 고위급 인사 일부와 연방 공무원들의 광범위한 부패가 적발되면서 트루먼은 임기 말 레임덕에 빠진 상황이었다. 여론조사에서 그는 57%를 넘는 부정 평가를 받았으며, 이는 수십 년 후 리처드 닉슨이나 조지 W. 부시의 부정 평가에 이어 3번째를 기록했다.

트루먼의 경쟁 상대는 포퓰리스트인 에스테스 케파우버 테네시 상원의원이었다. 케파우버 의원은 1951년 전국적으로 방송된 조직범죄수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으며, 범죄와 부패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2월 15일의 갤럽 여론조사는 트루먼의 약세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민주당 지지층에서 트루먼은 36%, 케파우버는 21%의 선택을 받았지만, 중도층에서 트루먼은 18%에 그쳤지만 케파우버는 두 배인 36%의 지지를 받았다.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케파우버는 트루먼 보다 높은 표를 받았는데, 이는 트루먼을 분노케 했다. 하지만 케파우버는 "이 결과는 정부에 대한 거부나 반대가 아니라, 변화에 대한 욕망"이라며 겸허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예비선거에서 자신감을 잃은 트루먼은 3월 29일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2]

트루먼의 퇴장으로 케파우버는 선두주자가 되었고, 그는 대부분의 예비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다른 주요 경쟁자에는 홈스테이트에서 승리한 휴버트 험프리 미네소타 상원의원, 플로리다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조지아 출신의 리처드 러셀 주니어 상원의원,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승리한 외교관 아벨 해리먼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 대의원의 대부분은 프라이머리가 아니라 코커스였기 때문에 민주당 주지사나 시장이 대의원을 사실상 선택할 수 있었다. 특히 트루먼을 포함한 민주당 지도부와 북부와 중서부의 민주당 위원장들은 케파우버를 굉장히 싫어했는데, 그의 범죄조직 조사위원회에서 마피아와 대도시 민주당 조직들 사이의 부정한 커넥션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당 지도부는 케파우버를 신뢰할 수 없는 매버릭으로 여겼고, 그래서 그를 지지하기를 거부했다.

대신 트루먼은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으면서도, 민주당 지도부도 수용 가능한 다른 후보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후보자들은 큰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러셀은 남부의 지지를 받았지만 인종차별을 지지했으며, 트루먼이 주도하는 시민권법에 반대한 전력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북부와 중서부 대의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트루먼은 뉴욕의 해리먼을 선호했지만 그는 선출직을 맡은 적이 없었고, 정치의 경험이 없었다. 앨번 W. 바클리 부통령은 74세의 고령인데다, 노동조합 위원장들의 반대로 추대에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약점이 거의 없는 일리노이 주지사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을 찾아내며 민주당 지도부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스티븐슨은 일리노이의 유명한 가문 출신이었으며, 달변가였고, 지적인 이미지였으며, 정치적으로도 온건파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1952년 봄, 트루먼은 스티븐슨에게 대통령 경선 출마를 제안했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주지사 재선을 원하고 있었고, 트루먼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민주당 지도부는 끊임없이 요청했으며 유권자들은 다가오는 전당대회에 깜짝 등판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당 전당대회

1952년 민주당 전당대회는 공화당이 몇 주 전에 모인 시카고 경기장에서 열렸다. 전당대회가 스티븐슨의 홈스테이트에서 열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는다는 입장을 확실히 밝히고, 전당대회 개막 인사를 하게 된다. 그는 유머 있고 감동적인 인사는 대의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자신이 출마를 거부하는 상황에서도 대의원들이 그를 지명하기 위한 노력을 더 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리노이 지역조직 위원장인 제이콥 아비가 스티븐슨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경선 출마를 간청한 이후, 스티븐슨은 마침내 경선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출마 결정과 동시에 중서부와 북부의 지역 지도부는 빠르게 스티븐슨에 대한 지지선언을 발표했다. 케파우버는 1차 투표에서는 선두를 달렸지만, 승리에 필요한 표보다 훨씬 적은 표 만을 얻었다. 스티븐슨이 3차 투표에서 지명될 때까지 케파우버의 표는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대의원들이 스티븐슨을 지명한 후, 전당대회는 부통령 후보 선출로 전환되었다. 존 스파크먼 상원의원과 마이크 먼로니의 두 명으로 후보를 좁힌 트루먼과 민주당 지도부는 앨라배마 출신의 보수주의자인 스파크먼을 후보로 지명했다. 이후 전당대회는 스파크먼을 스티븐슨의 러닝메이트로 확정했다. 그는 남부 정체성과 보수적인 가치관 덕분에 선택되었으며, 당 지도부는 스티븐슨과 스파크먼이 시너지를 내 균형 잡힌 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공화당

공화당 (51주)
공화당 (51주)
1952년 공화당 지명 후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유럽최고연합군 사령관
(1951–1952)
미국 상원의원(캘리포니아)
(1950–1953)

공화당 전당대회

선거

선거운동 문제

선거운동

닉슨 스캔들

TV

아이젠하워 지지단체

결과

각주

  1. 상원은 49대 49로 동률이었기 때문에, 리처드 닉슨이 가부동수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어 근소한 우위로 볼 수 있다.
  2. 한편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케파우버에게 패배하기 훨씬 전에 재선 출마에 대한 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