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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기원과 형성

고대 거란의 유목민 모습. 거란이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8년 (서기 378) 가을 9월의 기록으로, 이때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8개의 부락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4세기경 전연의 영향력하에 있다가 전연이 중심지를 남쪽으로 이동하여 고막해의 영향력하에 있게 되었다. 388년 고막해가 북위에게 토벌당하자 이후 어정쩡하게 독립하게 되었다. 고막해가 선비족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생각해보면 족보를 따지면 선비족의 별종이라 할 수 있다.

등국 중에 북위의 군대가 크게 깨뜨리자, 마침내 달아나 흩어져 고막해와 나뉘었다. 수십 년이 지나 점차 커져서, 부락이 화룡의 북쪽 수백 리에 있게 되었다. 위서 거란전[* 登國中、國軍大破之、遂逃迸與庫莫奚分背。經數十年、稍滋蔓、有部落於和龍之北數百里。]

그 뒤 나름대로 세력을 키워 4세기 후반 북위와 대립했으나 압도적인 세력차로 북위에 복속했고, 이러한 주종관계는 북제-북주-수-당이 차례로 물려받는다. 일부는 광개토대왕의 거란 토벌 후 고구려에 복속되어 그 번병이 되었다. 고구려가 망하고 세력을 키워 그 후손인 발해와 대립했다. 한편 북방 몽골방면과의 관계를 살펴보자면, 북방이 유연으로 정리되면서 유연과 대립했고 유연이 쇠퇴할 때는 유연을 공격하여 약화시키기도 하나 돌궐이 등장하며 그에 복속되고 거란과 북방간의 그러한 주종관계는 위구르시기까지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야율아보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거란은 주변 중원, 막북, 요동 강호들의 샌드위치 신세였다는것.

이진충손만영의 반란당시 거란-당나라 전투경로

손만영의 죽음. KBS 드라마 《대조영》

7세기경 대하씨가 거란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대하씨는 당에 귀부하여 이씨성을 하사받게 된다. 고구려 멸망 뒤 거란에 대한 당의 지배권은 공고해지는 듯 했으나 696년 이진충이 무상가한을 칭하며 독립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이진충이 죽고 후계자 손만영이 집권한 뒤에야 측천무후돌궐의 도움을 받아 거란을 멸망시켰으나, 돌궐과의 동맹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란은 돌궐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진충의 양자인 이해고가 등장하는 KBS 드라마 《대조영》

당시 이진충이 죽자 그의 양자였던 이해고가 당나라에게 항복했고, 그후 당나라 측천무후에게 연공이란 작위를 받고 옥검위대총관이 되어 12만 대군으로 대조영을 추격한 것은 아주 유명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전투가 천문령 전투이며 이 전투 이후 발해가 세워지게 된다. ~~훗날 이해고의 후손이 발해를 멸망시킨다.~~ 그후 돌궐이 730년대에 몰락하면서 거란은 다시 당의 영향권에 들어가지만 안록산의 난이 터지면서 거란은 위구르(회흘)에게 복속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요 태조 야율아보기의 등장 이전까지 계속된다.

중세

요나라 건국

한국에서 요나라하면 딱 이런 이미지 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불경 목탑인 요나라의 응현목탑

거란족 최대의 전성기 745년에 위구르 제국이 건국되자 100여년 동안 위구르의 통치를 받았다.

840년에 위구르가 망하고 당이 쇠퇴한 틈을 이용해서 대외 팽창을 시작해 북방의 오고(烏古), 실위 등의 부족을 복속시키고 한족을 포로로 데려와 노예로 삼았다. 10세기 초에 질랄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는 많은 한족을 부하로 삼아 새로운 권위를 창출했고, 906년에 연맹장인 카간(可汗)이 되었다. 그는 다른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카간의 선거제를 폐지해 세습제를 확립했다. 916년에는 황제를 칭하며 거란을 세웠고, 상경임황부를 수도로 하였다.

거란족을 통합한 태조 야율아보기는 924년에 서역 정벌에 나서 탕구트와 토욕혼을 굴복시키고, 925년에 발해를 공격해 926년에 멸망시켰다. 태종은 화베이 지역을 엿보다가 936년에 연운십육주를 탈취하고, 국호를 대요로 고쳤다. 태종이 죽은 뒤에 내분이 이어졌지만 성종이 즉위해 정치 안정을 꾀하고 대외 확장을 시도했다. 성종은 화베이로 들어가 북송과 대치하다가 1004년에 '전연의 맹'이라는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족약에 따라 요는 북송에서 해마다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의 세폐를 받아 재정이 넉넉해졌다. 이 시기에 요는 정치·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법전도 공포해 강력한 중앙집권 전제체제를 확립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성종은 국가의 안정을 바탕으로 고려와 여진족을 압박하고 서하를 굴복시켜 중앙아시아의 파미르 고원까지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성종 이후 중국식 체제를 도입하는 문제를 놓고 보수파와 혁신파로 나누어져 정국이 혼미해졌다. 흥종과 도종 때 두 파는 번갈아 집권했고 종실 내부에서도 세력 투쟁을 되풀이했다. 이 와중에 몇 차례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여진족을 통일한 아구다는 북송과 동맹을 맺고 요를 공격해 1125년에 요를 멸망시켰다. 그 무렵 요의 일족인 야율대석이 서쪽으로 도망가서 중앙아시아에 요를 다시 세웠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서요라고 한다.

서요

이후 야율대석이 세운 서요가 망하자, 그 자리에 다시 그 명맥을 이어 대량국이 세워졌으며, 현재까지도 대량제국으로서 남아있다.

후요

이후 잔존세력이 만주에 대요수국, 즉 후요를 건국했으나 이후 1219년 원나라에게 망하여 유민이 뿔뿔히 흩어졌다. 그중 8만의 유민은 후요의 마지막 왕 야율함산을 따라 사할린 섬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이들은 요를 계승하여 1220년 신요를 세웠다. 이 왕조는 약 690년간 지속됬으며 후에 가라후토 청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도 공주인 야율몽주를 중심으로 부흥운동이 일거했다. 1993년 소련에게 독립하자 야율몽주의 조카인 야율토후를 18대 황제로 삼아 다시 계승되어 현재의 요국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자세한 것은 신요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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