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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우휠 6편
계획

워렛의 마음은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최고 권력자인 총통이 자신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후, 그 새벽을 달리는 기차에서 워렛은 오만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총통이 자신의 능력을 원한다. 자신이 불사가 되기를 원하고, 불사가 된다면 그에 따른 보상을 제공할 것이라고.

하지만 쉬운 선택은 아니다. 만약 자신이 총통을 돕는다고 덜컥 제안을 받아들이면 호소니에 대학살이 벌어질 것이다.

"불사의 재료는.."

불사의 재료는, 그보다 수 배, 아니 수 백 배의 인간. 즉, 목숨.

워렛의 가문이 그토록 불사를 완성하지 못한 이유는, 아니, 완성하지 못했다고 사람들은 속인 이유는 그것이 완성되어서는 안되는 금기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왕가에도 결코 제공하지 않은 그야말로 기밀 중의 기밀이다.

아무리 총통이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고 자신을 회유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는 불사를 만드는 원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원한다. 그렇다면 그는 학살자다. 그가 불사가 된다고 해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지도 나아가 세상의 혼란을 몇 배는 더 가중시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럼 자신은 어쩌란 말인가?

그의 부탁을 거절해도 죽는다면.. 무슨 답이 있을까?

"자네가 직접 호소니로 향한다면,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하지. 빨리 선택해야 할걸세."

아직, 아직 답을 내릴 순 없다.

우선..

"돌아가자."

워렛은 달리는 열차 화장실의 거울 앞에서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달은 저물고, 해는 떠오르고, 열차는 멈췄다.

차가운 공기의 새벽아침이다. 외투를 입고 피곤함도 잊은 워렛은 혹시나 있을 감시자들을 피해 이동했다. 모자를 눌러썼고, 발걸음을 빠르게했다. 안다. 그래도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보고될 것이다. 워렛의 예상대로 승강장부터 계속 자신을 따라오는 남자들이 있었고 워렛도 그들을 예의주시했다.

그러다 사거리를 지나니 워렛에게 익숙한 사람이 나타났다.

"여기에요."

워렛이 한참 정신이 팔렸을 무렵, 워렛을 마중나온 여군 한 사람이 건너편 길에서 손을 흔들었다. 단발머리에 군복을 정갈하게 입은 사람이다.

"시안. 우선 가자. 따라와."

"네?"

워렛은 그녀를 데리고 곧장 계속 길을 나아갔고, 누나의 군 사무실이 있는 군청 방면으로 계속 걸었다. 여전히 그들은 뒤에서 따라왔다.

"무슨 일인데요? 냅다 설명도 없이.."

"날 쫓아와. 우선 들어가서 이야기 해"

문을 박차고 들어간 워렛은 경비의 인사도 무시한 채 엘리베이터를 탔고, 멀리서 워렛을 쫓던 갈색 코트의 남성들은 엘리베이터를 탄 워렛을 애써서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다.

"뭐가 어떻게 된거에요?"

"그게.. 할 이야기가 있어."

"뭔데요? 나도 할 얘기가 많아요."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것 같아."

"무슨 배신자요? 우리 중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곧 복도를 걸어서 아렌 집무실에 도착한다. 워렛은 들어가자마자 문을 굳게 잠궜다.

"우선, 시안, 내 이야기 잘 들어봐."

"잘 듣고 있잖아요. 근데, 저부터 이야기 해야할 거같아요. 많이 중요하거든요."

워렛은 가슴팍을 치며 말했다.

"아니, 시안 우선, 이 이야기가 뭐냐면..."

"저택이 수사받고 있어요."

"?"

워렛은 멍하니 시안을 바라본다.

"저택이.. 수사받고 있다구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거에요?"

그녀는 워렛에게 따져묻듯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저택이란, 워렛과 아렌이 가지고 있는 소유의 큰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중요한 자료가 거기 다 있었어요. 급하게 사람들을 시켜서 파기하긴 했지만, 당장 턱 밑까지 올라왔다구요. 이러다가는 다 죽을지도 몰라요. 알고는 계셨던거에요? 제가 말하기 전까지는 몰랐죠? 도련님 수준이 딱 그정도에요. 비밀경찰이 아니라 그냥 아예 총통이랑 대면까지 하지 그래요?"

시안이 쏘아붙이듯이 말해서 숨도 못 쉰 워렛은 입을 꼭 물었다.

"그래요. 이제 말해보세요."

"그게, 총통을 만났어."

"?"

시안은 방금 전의 워렛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총통이, 자신을 불사(不死)로 만들어달라고 했어. 그럼, 우리를 헤치지 않을거라고.."

워렛은 무언가 이성의 끈을 놓고서 허탈하게 말했다. 그럴만 하다. 얘기를 들은 시안은 건너편 소파에 워렛과 같이 누웠다.

"뭐라고 반응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시안은 두 손을 꼼지락거린다.

"믿는 건 아니죠?"

"조금은 흔들려. 왜냐하면.."

"왜냐하면 어차피 안 들으면 죽고, 들으면 죽을지 안 죽을지 불확실하니까?"

"잘 아네"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곰곰이 생각한다.

"우리 정체를 전부 빠짐없이 다 안다구요?"

"대충은. 적어도 누가 협조자인지는 알고 있어"

"그래요?"

그리고 결론이 나온 듯 했다.

"당분간 이곳에만 있어요."

"뭐?"

시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워렛에게 그렇게 선언했다.

"어딜 가든 감시가 따라다닐 거 아니에요. 나도 그렇겠지만"

"어쩌려고?"

"이 나라를 떠야죠."

워렛은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무슨 수로?

"총통은 신이 아니에요. 그래봤자 한낮 인간이구요. 협박 당했다고 무서워하고 아무것도 못하면 안되요. 어차피 놈은 자기 하수인들을 부리느라 바쁠 테고, 감시인들도 당장 제거하면 우리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 알겠어. 그럼 내가 여기 있다고 치면, 누나는?"

"아렌 아가씨를 구할 방법이 있어요. 우선 그 방법부터 시도해봐야죠."

"우리가 직접 구하는 건?"

"도련님 덕분에 저도 감시당할 텐데 무슨 수로?"
"아..." 워렛은 확실히 누나보다 명석하지는 못했다.

"우선 공화수호전선이 우릴 도와줄 거에요. 그리고 당분간은 나오지 마시구요. 그게 최선이니까."

"여기 처박혀서 크래커만 씹어먹는 게 도움이 맞아?"

워렛은 그렇게 말하며 선반에 있던 크래커를 씹어먹었다.

"앉아서 죽을 순 없잖아요. 안 그래요?"


"상처는 어때? 반델 소령."

"따끔합니다. 휴가 일주일이면 충분히 나을 겁니다."

"너무 긴데.."

아렌과 반델은 비공정 복도를 걸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반델의 활약으로 조종실을 되찾은 후, 비공정 대부분의 공간은 통제권을 찾을 수 있었다. 사병들이 무기고에서 다시 무장하면서 이제 비공정 최하단의 짐칸에만 적들이 숨어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들이 오래 버텨보았자 어차피 곧 비공정은 호소니에 도착할 테고, 이리되나 저리되나 포위되어서 항복하는 건 시간문제다..

"포로로 잡은 적들에게 정보를 취했는데, 공화수호전선이 맞답니다."

"...그렇네. 소령 말이 맞았어."

아렌은 찜찜한 속내를 감추기 어려웠다. 도대체 왜..

"너무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자국인이라고 해도 반란군이니까요. 그들은 어차피 숙청대상입니다."

"그렇지."

"확실히 같은 훈련을 받은 정규군이어서 많이 위험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포위됐으니 금방 끝날겁니다."

"그럼 포위된 대상 중에 적의 우두머리도 포함인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중장님!"

"아우 놀래라"

복도 모퉁이에서 덜컥 튀어나온 그는 바로 맥거만 중사다. 그는 경례를 하고는 아렌이 1시간 전에 부탁한 답을 알아왔다.

"이송중인 정치범에 대해서 관련서류 찾아왔습니다."

의외로 기밀문서치고는 얇은 서류고, 아렌은 슬쩍 표지 뒷장의 이름을 흘깃 본다.

"세그넌.. 타라바오 세그넌"

"익숙한 이름이십니까?"

"예. 나름 유명인이니 알고는 있습니다."

맥거만은 주절주절 설명을 이어갔다.

"꽤 중요한 인물입니다. 제국 시절에는 있었을 땐 외교 요직을 맡았었고, 데모부르크와도 깊은 친분이 있구요. 그리고 무엇보다 공화파에서 워낙 중요시여기는 사람인데, 이번에 비공정으로 이감된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이감 사유가.. 호소니 감옥으로 이동?"

아찔한 사유다. 호소니 감옥은 철천지 악질 범죄자들이나 가는 곳이다. 고작 정치범인 50대의 중년이 그런 곳으로 간다면 영 생활이 녹록치는 않을 테고. 아렌은 괜한 걱정이 들었다. 왜냐하면 세그넌은 자신을 군인으로 신분 세탁 시켜준 장본인이니까. 계속해서 평범하지 않은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다보니 스트레스가 쌓일 만큼 쌓이는 중이었다.

죽었을지 살았을지 정확하지 않으리라 짐작하긴 했지만, 결국 그는 살아있었다.

물론 그가 그저 정치범이라면 진즉 죽었겠지만..

"혹시 만나볼 수 있습니까?"

"절차 상 총통의 승인이 필요하지만, 암묵적으로 선장님께서 동의해주신다면 문제는 없을겁니다. 그 동의는 제가 받아낼 수 있구요. 비공정을 구해내셨는데 그게 뭘 별거겠습니까?"

아렌에게 맥거만은 처음 만취 상태로 꽤 형편없는 첫인상이었지만, 술이 다 깨고 정갈한 모습을 하니 나름 아부도 하고 사회생활도 하는 관계형 인간이었다.

아렌이 반델을 처다보자, 반델은 바로 스케줄을 읊었다.

"2시간 뒤에 비공정이 착륙하니 문제는 없습니다."

"그럼 미안한데 내 짐이랑 서류 좀 부탁해 반델."

"혼자 가시는 겁니까? 그래도 아직 호위는..."

"괜찮아. 맥거만 중사가 있으니까."

맥거만은 생각없이 끄덕거리다가 약간 의아한 표정을 하지만 그래도 크게 부정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반델은 아렌에게 경례한 후 다른 복도로 사라졌고, 맥거만과 아렌은 함께 계단을 타고 최하단 층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맥거만의 설명처럼 거대한 화물실을 지나자 약간 개조된 비밀 수감실의 문이 있었다. 맥거만이 이중, 삼중으로 되어있는 자물장치들을 풀자 그제서야 쇠창살이 보였다. 제법 열악해보인다.

"이곳입니다."

안에 갇혀있는 이는 단 한 사람, 세그넌이란 이름의 백발 중년이다.

"둘이서 대화할 수 있습니까?"

"심문이시라면 뭐. 저는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맥거만 중사가 자리를 비우자, 공간에는 오롯이 두 사람만 남았다. 한적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아렌은 뜸을 들이다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은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렌? 아렌인가?"

그러다 고개를 슬쩍 들어서 바깥을 본 세그넌이, 아렌을 알아보았다.

"....예"

"내가 얻어준 군복을 여즉 잘도 입고 있었군. 동생은?"

"..."

아렌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워렛은 다른 곳에 있어요."

"그렇군"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해도 되는건가? 너에겐 위험할 텐데. 네가 그런 성격은 아니고 말이지."

"이미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사형당하신 줄 알았어요."

아렌은 그렇게 말하며 가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고, 세그넌에게 한 대 건낸다.

"나는 이미 죽었어. 아주 오래전에.. 제국이 멸망하면서 모든 게 끝났지."

"..."

그리고 다시 침묵과 함께 두 사람은 서로 등지고 담배를 폈다.

"망할 놈. 내가 여깄는 걸 알았으면.. 좀 구해주지 그랬냐. 정 없는 기집애 같으니."

세그넌은 뭔가 푸념을 늘어놓듯이 말했다. 아렌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밖에 소리를 들어보니.. 누가 날 구하러 온 것 같았는데.. 아니.. 됐지. 이젠 아무 소용이 없어. 후우"

손바닥만한 유리창 하나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자그마한 등과 두 개의 담뱃불이 살랑거렸다.

"어르신. 호소니 감옥으로 가고 계십니다."

"...아니"
세그넌은 담배를 피다 말고 바닥에 밟아뭉겠다.

"눈치없긴, 고작 그런 이유로 나같은 적을 옮길 이유는 없지."

"그럼요?"

"총통놈. 뭔가 계획하고있어. 나 뿐만이 아니야. 마법사들을 죄다 호소니로 보내고 있지."

등을 돌려 앉았던 아렌은 그 이야기를 듣고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무슨 이야기에요?"

총통이 마법사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이 알고있다? 아렌은 전혀 모르는 정보였다.

"나도 그 이상은 모른다. 이제 가라. 니 부하가 온다. 그리고.. 건강해라."

그리고 세그넌의 말대로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맥거만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중장님? 죄송하지만 이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달사항이 있다고.."

세그넌은 끝까지 아렌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아렌은 조금 서운했다. 세그넌과 자신이 그렇게 가족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혼란스러운 시대에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래서 더더욱 친분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렇게 아렌은 다시 세그넌을 만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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