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iny634, 2024 - | CC-0


극동 출정
極東出征
a trip to the Far East
냉전의 일부
width: calc(100% + 5px)
사쿠라 작전을 수행하는 일본군
날짜
1958년 9월 12일 ~ 1958년 11월 28일
장소
구 러시아 극동
배경과 원인
러시아 군벌들의 만주국과 몽강국 치안 교란
목표
극동의 안정화
종류
군사작전
결과
일본, 극동 재정복. 극동 공화국 수립
영향
시베리아 지역 러시아 군벌의 일본 종속화
교전 단체
군벌
대동아공영권
[ 펼치기 · 접기 ]
[ 펼치기 · 접기 ]
지휘관
군벌
대동아공영권
[ 펼치기 · 접기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유리 갈란스코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다닐 하름스
[ 펼치기 · 접기 ]
병력[1]
군벌
대동아공영권
[ 펼치기 · 접기 ]
: 노보시비르스크: 약 50만 명
우랄 군관구: 약 40만 명
톰스크: 약 14만 명
기타: 약 2만 명
[ 펼치기 · 접기 ]
일본군:약 6만 명
만주군:약 15만명
몽강군:약 7000명
피해 규모
군벌
대동아공영권
[ 펼치기 · 접기 ]
30만 명 사망
민간인 100만 명 사망
[ 펼치기 · 접기 ]
군인군인 3500명 사망
각주
  1. 11월 배치 병력 기준


개요

1958년 일본 관동군이 감행한 구러시아 극동 침공. 이를 통하여 콘스탄틴 로자옙스키를 이용하여 괴뢰국 극동 공화국을 세우는 한편으로 극동을 안정화한다.

상세

1958년, 당시 소련 붕괴이래의 혼란 아래서 러시아가 군벌시대로 들어선 가운데, 일본의 극동 통제력이 약화하자 군벌들은 공영권, 특히 만주국과 몽강국을 향하여 잦은 약탈 및 침략행위를 벌였다. 이에 대하여 관동군은 도쿄 본국에 극동 토벌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정부가 무시하는 가운데 만몽의 피해는 계속됐다.

결국 1958년 9월 3일, 만러경계선의 상황을 보고받게 된 내각은 본래부터 극동 출정을 준비 중이던 관동군에게 극동의 안정화를 위한 군사 작전을 명령했다. 이에 본래부터 기회만 노리던 관동군의 세지마 류조 대장과 다카기 마사오 소장은 바이칼 호 부근에서 일본군 병사의 실종을 조작, 곧바로 관동군을 주공, 만주군을 조공으로 하여 극동을 침공하기로 결의하게 된다.

전개

1958년 9월 11일, 관동군은 이르쿠츠크의 철도역에서 일본군 병사가 실종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러시아 군벌인 우랄 군관구 측은 일본 측의 모함이라고 반박하였으나, 일본군은 명목상 다카기 마사오에게 세지마 류조가 명령하는 형식으로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다. 물론, 실종되었다던 스기야마 일병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병사였다.

9월 12일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르쿠츠크가 점령되고, 일장기를 게양했다. 9월 13일, 제국 해군이 해군성의 명령에 따라 지원 의사를 타전, 이토 세이이치 제독의 지휘 아래 캄차카 반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3일 당일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만몽의 일본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일본의 특별 군사작전이 시작되었음을 포고했다.

또한 14일에는 조센의 가와사카이현, 세이신현, 츠메야마현에 주둔하던 4개 사단 또한 출동 명령을 받고 만주국으로 월경했다. 이렇게 육해군 합동으로 극동 정복을 위한 작전이 시작되고, 대본영은 이를 사쿠라 작전(桜作戦)이라고 명명하였다.

일본 해군과 해군 항공대의 압도적인 화력 아래 캄차카 반도는 9월 19일, 그 전 지역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이미 그보다 이전인 9월 15일 관동군과 조센에 주둔하던 4개 사단은 바이칼 호를 넘어서 해군 상륙군과 합류를 위해 북상했다.

러시아 군벌들은 저항하였으나 육해군 합해 고작 6만으로 침공해온 일본군을 상대로 처참히 털리며 패주하였다. 10월 중순이 되면 이미 사쿠라 작전의 전투는 대부분 종료되고, 저항하는 게릴라들을 소탕하고 "치안유지"에 나서는 작업이 이어졌다. 11월 28일, 사쿠라 작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으며 일본은 극동의 광활한 영토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점령한 극동에서 주민들에게 각종 가혹행위를 자행하였으며, 특히 러시아 여성들은 일본군에게 강간당해 일본으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은 만주국에서 게이조로 옮겨 망명 생활중이던 전러시아 파시스트당 전 대표 콘스탄틴 로자옙스키에게 극동으로 가서 이르쿠츠크에 일본의 후원을 받는 "러시아 합법정부"를 새울 것을 주문했고 이에 긴 망명에 지친 로자옙스키가 바로 화답하면서 이르쿠츠크행 열차에 올랐으며 12월 12일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극동 공화국을 세웠다. 이후 극동 공화국은 1989년 공영권에서 독립하고 1993년 일본에 의해 러시아 연방에 합병된다.

반응

미국

미국은 일본의 시베리아 병탄으로 베링 해가 분쟁지역화되면서 안보 위협에 직면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는 일본이 시베리아를 안정화하는 본연의 목적에만 충실하고 물러가야 한다며 압박을 가하는 성명을 냈다. 물론 일본은 듣지 않았고 미국은 알래스카에 미사일 기지를 대거 설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대게르만국

독일은 일본의 극동 안정화를 지지한다는 메세지를 냈으나, 내부적으로는 일본이 시베리아 중부까지 서진하는 것을 경계했다. 총통 히틀러 역시 일본이 일정 이상으로 서진해올때는 독일도 움직여야만 한다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다카기 마사오는 이 사건을 통하여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1961년 세지마 류조가 퇴역한 후 44세의 나이로 관동군 사령관 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관동군 사령관을 1967년까지 역임한 그는 그 이후엔 본토로 영전하였고, 육사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육군의 거장으로 성장하였다.

1969년 다카기는 대장까지 진급했으며, 1973년에 조센인 최초로 제국 육군대신까지 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