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1968 벨지엄 긴배

대한민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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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김일성
金日成 | Kim Il-seong
본명 김성주 (金成柱)
출생 1912년 4월 15일
일제강점기 치하 조선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現 평양광역시 만경대구 용산동)
사망 1986년 5월 1일 (향년 74세)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 특각 호텔
재임 기간 제6대 대통령
1969년 1월 20일 ~ 1973년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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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김형직, 어머니 강반석
배우자 김정숙
자녀 장남 김정일[1]
학력 중학교 중퇴
종교 개신교 (장로회)
의원 선수 3 (하원)
의원 대수 1, 2, 3
선거구 평양 중
소속 정당
약력 대한민국 대의원 의원
국방장관 (조봉암 행정부)
대한공산당 서기장
대한사회당 서기국장
대한민국 대통령
군사 경력
복무 기간 소련군
1942년 ~ 1945년 10월 14일
최종 계급 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 육군 대위
참여 전투 보천보 전투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제6대 대통령 직을 역임하였다.

상세

독립운동가 출신의 정치인으로 역대 대통령중에서는 유일한 군인 출신의 정치인이자, 유일하게 항일 유격활동 경력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인 보천보 전투는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으로, 일본에는 공포를,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희망을 안겨준, 한일 양국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광복 후 대한민국의 정치인중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렸으며, 그의 높은 인지도와 인기는 그가 제6대 대한민국 정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양당 출신이 아닌 대통령이다. 그의 당선은 사회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안정적인 중도좌파-중도우파의 양당제가 무너졌다고도 평가받았던 일대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평론이 무색하게도, 대통령 재직 도중에는 미숙한 경제 정책과 자신의 고집만 센 태도로 인해 그의 퇴임 이후 사회당 계열의 정치인들이 영원히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실책은 점차적으로 잊혀지게 되었으며, 냉전의 시대가 저물고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위치상 중국과의 관계가 중요해지자 그가 취한 친아시아적 외교 방향이 고평가 받기도 하였다. 퇴임 이후에는 평양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에서 조용히 여생을 누렸으며 묘향산 여행 도중인 1986년 5월 1일 노동절날 급서하였다.

생애

항일 유격 활동의 중심으로

광복 후 하원 의원 활동 시절

조봉암 행정부의 국방장관으로서

야당 활동

대통령 시절

퇴임, 그리고 그 이후의 삶

평가

긍정적 평가

현대에 들어서 그는 대체로 위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무래도 그가 재임기간 도중 벌였던 각종 병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졌던데다가, 현대에 들어서는 그의 항일 투사적인 면모가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여론조사에서 그는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에서 중상위권을 늘 차지하고 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도중에는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실책으로 크게 비판받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대통령 재임 기간 외의 업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노무현과도 그 성격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군 현대화 정책은 한국의 국방력을 크게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방장관으로서 그는 미국의 퇴역한 장비들을 대거 수입하여, 제대로 된 장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대한민국 국군을 탱크와 대포로 무장시켰다. 대통령 시기 시행한 "선군" 정책은 현대에 들어서는 다소 비판의 대상이 되나, 군대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순수 군사 정책으로는 가장 대한민국의 군대를 강하게 만든 정책이었다며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대통령 재임 도중에는 "새아침을 여는 새마을 정책"이라는 기치 아래에 농촌을 현대화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신의주-평양-서울-부산 고속도로의 건설, 전국 각지의 토목 공사를 통하여 그의 재임기간 4년도중 지방의 모습은 몰라보게 변하였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새마을 정책이 김일성의 아이디어였다기보다는, 박정희 내무장관의 아이디어에 더 가까웠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부정적 평가

김일성 행정부의 외교 정책은 단지 닉슨 행정부의 외교 전술과 시간이 잘 맞아 떨어진 것일 뿐, 다른 때에 했다면 미국과의 외교가 파탄났을 것이라는 지적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는 중국 공산당과 소련군 출신이었기 때문에, 대통령 당선 이전부터 미국으로부터 신용할 수 없는 자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따라서 시기적으로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때가 아니었다면 미국과 한국의 사이가 크게 악화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현대 국제정치학자들 사이에서의 중론이다.

또한 군대를 앞세운 이른바 "선군 외교" 역시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벌인 무리한 군비 증액으로 인해 김일성 행정부는 임기 내내 의미 없는 곳에다가 돈을 퍼붓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제대로 된 사회복지제도 정책의 수립은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될때까지 4년간 미뤄지게 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도중, 몇몇 경제-외교-사회 정책은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실패하였다. "쌀 밥에 고깃국을, 고래등 지붕의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천리마 정신" 등 슬로건만 거창할 뿐, 실속은 없고 충동적으로 입안된 정책이 절대 다수였다. 김일성은 언제나 자신이 무엇을 하겠다고만 말하였을 뿐, 그것을 달성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결국 이는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기대와 그 뒤로 이어지는 큰 실망감만을 안겨주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고집스러운 성격과 권력을 탐하던 성향은 현대에 들어 그의 평판을 가장 크게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의 독단적인 당 운영은 대한사회당이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현실타협적인 사회주의로 성향이 바뀌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독재자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의 임기 도중 마지막으로 국무장관을 지낸 김원봉을 비롯한 사회당의 다수 중진 의원들이 김일성의 독단적인 당 운영을 비판하며 사민당으로 당적을 이적하여, 김일성으로 인하여 당세가 많이 기울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외에는 김일성이 자신의 항일 경력을 앞세워, 반일 외교 정책을 고수하였던 것과는 달리 그의 재임 기간 도중 상당히 많은 친일파들이 등용되었다는 점도 크게 비판받는다. 대표적으로 김일성 행정부 시기 내무장관을 맡았던 박정희는 만주군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라온 대표적인 친일인사이나, 오히려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일성의 뒤를 잇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정도로 김일성의 신임을 받았다. 공화당의 상원 원내대표이자, 지일파 성향이었던 김대중은 이런 점을 내세워 김일성의 실체가 없는 반일 정책을 거세게 비판하였으며, 결국 1972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어마어마한 표차로 김대중에게 패배하게 된다.

가족 관계

소속 정당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율 (득표수) 당선 여부 비고
1948 제헌 대한민국 대의원 의원 선거 평양 중 16,597 (56.77%) 당선 (1위) 초선
1950 제2대 대한민국 대의원 의원 선거 21,408 (68.48%) 재선
1954 제3대 대한민국 대의원 의원 선거 21,881 (64.85%) 3선[2]
1964 제5대 대한민국 정부통령 선거 대한민국
4,426,778 (25.73%) 낙선 (3위)
1968 제6대 대한민국 정부통령 선거 7,876,338 (39.86%) 당선 (1위) 초선

여담


  1. 대한민국 재선 상원 의원 (평안도 권역 선거구, 1998~2004 / 2007~2011)
  2. 1957.01.23 국방장관 취임을 위한 의원직 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