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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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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칸 영화제 수상작
심사위원상
제53회
2000년
제54회
2001년
제55회
2002년
사미라 마흐말바프
《칠판》

로이 앤더슨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
김정일
《꿈속의 님》
엘리아 슐레이만
《신의 간섭》
역대
감독상
제18회
1997년
제19회
1998년
제20회
1999년
이창동
《초록물고기》
김정일
《솔잎》
강제규
《쉬리》
역대
감독상
제26회
1987년
제27회
1988년
제28회
1989년
임권택
《연산일기》
김정일
《유경의 불빛》
김호선
《서울무지개》
제46회
2008년
제47회
2009년
제48회
2010년
나홍진
《추격자》
김정일
《지우개》
강우석
《이끼》
영화부문 대상
제36회
2000년
제37회
2001년
제38회
2002년
임권택
《춘향뎐》
김정일
《꿈속의 님》
허진호
《봄날은 간다》
영화부문 작품상
제33회
1997년
제34회
1998년
제35회
1999년
임권택
《축제》
김정일
《솔잎》
강제규
《쉬리》
대한제국 문화훈장 수여자
연도 2001년
이름 김정일
분야 영화
훈장 은관문화훈장(2등급)
대한제국 문화훈장 수여자
연도 2011년
이름 김정일
분야 영화
훈장 금관문화훈장(1등급)
김정일

金正一 | Kim Jong-Il
출생 1941년 2월 16일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용악리
(現 평양광역시 대동구 용악2동)
사망 2011년 12월 17일 (향년 70세)
평양광역시 용성구 청계동 자택
국적 대한제국 대한제국
서명
링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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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김성주 (1912년 - 1994년)[2]
어머니(생모) 김정숙 (1917년 - 1949년)
어머니(계모) 김성애 (1924년 - 2014년)
형제자매 남동생 김만일 (1944년 - 1947년)[3]
여동생 김경희 (1946년)
이복여동생 김경진 (1952년)
이복남동생 김평일 (1954년)
이복남동생 김영일 (1955년 - 2000년)
배우자 본처 성혜림 (1937년 - 2002년)[4]
후처 고용희 (1952년 - 2004년)[5][6]
자녀 장남 김정남 (1971년)
차남 김정철 (1981년)
삼남 김정은 (1984년)
장녀 김여정 (1988년)
학력 평양용산창덕소학교[7][8] (졸업)
용산중학교 (졸업)
청명고등학교 (졸업)
국립평양대학교[9] (독일어과 / 학사)
종교 개신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10]
신체 162cm, 84kg, A형
대뷔 1975년 영화 '정전'

개요

대한제국의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 제작자, 편집자.

한반도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으로 그동안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영화산업을 북부지역에서도 부흥시킨 인물이며 이춘희, 이설주[11], 현송월, 오미란 등 북부지역의 수많은 신인배우들을 발굴해 낸 인물이다.

생애

1941년 평양부 용산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평양부 민의원 의원이던 김성주 전 총리이고 어머니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기독사회실천회 지부장을 지냈던 김정숙이다. 친여동생 김경희는 평양대동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이복남동생 김평일은 제12기동군단 제26기동사단 사단장을 지냈다. 이복여동생 김경진과 이복남동생 김영일은 각각 평양방송(PBS) 드라마 작가와 안주도립박물관 관장을 지냈다.

김성주 총리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 따르면 김정일 감독은 어린시절 굉장히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아이였으며 지금의 대외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이는 김성주 총리의 책임이 큰데 그는 자신의 부인이자 김정일 감독의 생모였던 김정숙과 사이가 많이 안좋았고 김정일의 사고가 형성되던 1940년대 후반에는 이미 김성애와의 내연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부부싸움을 거듭하던 김성주 부부는 결국 1949년 이혼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도출하게 되었다. 김정일 감독은 이후 2003년 인터뷰에서 이당시의 기억이 자신의 영화스타일을 만들어냈다고 회고했다.

이후 1954년 용산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중고등학교 시절 동창들에 의하면 학창시절의 김감독은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성적은 중위권에 머물렀고 축구와 낚시, 사냥에 관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청명고등학교 시절 이미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것을 즐겼다는 증언이 나오는 등 당시의 김감독은 모범생 보다는 비행청소년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나 교우관계는 원만한 편이었으며 김성주 총리는 이시기에 "정일이가 요즘들어 밝아진 것 같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물론 밝아진 성격과는 별개로 사춘기에다가 공부를 멀리하던 성격때문인지 아버지와의 관계는 나빴다고 하며 특히 자신의 친모의 자리를 대체한 계모 김성애와의 관계는 최악이었다고 한다. 김성주 총리는 어떻게든 김정일의 성적을 향상시키려고 총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독일유학 경험을 살려 아들에게 틈만나면 독일어를 가르쳐보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그렇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한편 이시절부터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한 달에 학교에 가있는 시간보다 학교를 탈출해(...) 영화관에 가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에 들어서부터는 "이대로 가다간 진짜 큰일나겠다"라는 위기감이 들어서인지 갑작스럽게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으며 갑자기 공부에 몰두하는 아들에 모습에 김성주 총리는 아내 김성애에게 "무슨 약이라도 먹였냐?"라는 질문까지 할 정도였다 한다. 그렇게 공부에 몰두한 결과 턱걸이 수준의 성적과 평양직할시장 겸 이사장 아버지의 빽으로 재수끝에 1962년 평양대학교 진학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평양대학교에 진학을 하고 나서는 다시금 이전의 생활양식으로 돌아갔으며 하루에 5시간 정도를 영화관에서 보냈다고 한다. 하루는 새어머니 김성애의 생일날 한 경양식집에서 아버지 김성주와 작은아버지 김영주등이 모두 모였었으나 오직 김정일과 김경희만이 그곳에 모이지 않았는데 김영주가 온 평양 시내를 다 뒤집어 본 결과 서평양 영화회관에서 두남매가 영화를 보고있었고 이를 본 김영주가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1966년 대학졸업 이후 잠시 휴식기를 갖던 김정일은 당시 공보부(現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방부에서 진행하던 '군인위문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고난의 행군》이라는 단편영화의 시나리오를 써 제출했으며 호평을 받고 은상을 수상하였는데 당시 심사위원들중 문화계 출신들은 인간미가 있는 김정일의 작품을 선호하였으나 군부출신 인물들은 '승리와 영광'이라는 주재를 강조한 《휘몰아쳐라 조국아》라는 작품을 더 선호하였기에 그의 작품은 은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깊은 인상을 받은 공보부는 1968년 그를 스카우트 했고 이후 공보부에서 진행하는 여러 영화의 제작에 기여하였다.

1969년 그는 대학 동창으로 평소 관심사가 겹치던 성혜림과 교제를 시작했고 당해 결혼을 하여 1971년 첫째아들 김정남을 낳았으나 그녀의 집안이 한일전쟁 당시 친일파로 부역했던 일명 반역자였기에 당시 군인으로 복무했던 김성주는 이를 매우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고 또한 이로 인해 공보부가 김정일과의 관계를 재검토하기 시작하며 그의 인생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이에 그의 여동생 김경희가 아래와 같은 폭탄선언을 하며 김정일과의 사이에 쐐기를 박았고

언니는 우리 오빠보다 나이도 많고 이미 한번 결혼해서 애까지 딸린 여자니까, 게다가 불륜으로 결혼했으니까 당장 꺼지시오! 물론 정남이는 내가 정성껏 키워주겠고, 언니의 노후는 잘 보살펴 주겠소. 뭐 선택은 알아서 하시오. 단, 내 제의를 거절하면 우리 아버지한테 일러바칠 거요.

무엇보다 김정일 본인이 이미 예술인 출신 고용희와의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부 관계는 4년만에 파탄나게 된다. 성혜림과의 이혼 이후 김정일은 다시 영화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와중 드디어 공보부의 지원을 받아 1975년 장편 상업영화 《정전》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김정일 감독은 여러 상업영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이당시 만든 대표적인 작품으로는《유경에서 부는 바람》이 있다.

그렇게 김정일 감독은 1970년대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이자 한반도 북부지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일약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순탄할 것 만 같던 그의 인생은 갑작스럽게 가로막히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한 군부의 집권이었다. 당시 부정한 방법으로 집권한 전두환 총리는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로막기 위해 언론매체를 장악하여 영양가 없이 그저 주의만 끄는 내용의 영화나 드라마, 연극등을 제작하도록 시켰는데 그러던 와중에도 김정일 감독은 자신의 신념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전두환 총리는 김정일을 어떻게든 전향시키던지 아니면 문화계에서 완전히 퇴출시키던지 둘 중 하나를 하려고 했으나 전자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고 후자의 경우 이미 황실을 무시한 처사인 군부 쿠데타로 함흥을 비롯하여 근황여론이 높은 북부지역의 지지율을 대차게 말아먹은 전두환 총리의 입장에서 북부지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인 김정일을 퇴출시킨다면 북한일대의 지지율이 폭락할 터였다. 그렇기에 전총리는 김감독의 영화촬영장에 방문을 하는 등 친근감을 주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아래 어록문단에서 보이듯 촬영이 방해되자 "이럴 거면 돌아가시라."라고 단호히 되돌아가기를 요청하는 등 전두환 총리와 군부의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그렇기에 전두환 총리와 군부는 김정일 감독의 모든 활동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방해했고 가택연금까지 단행하였으나 결과적으로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정치가 복원되며 전두환 총리가 실각하자 복귀하여 다시금 왕성한 작품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IMF가 오기까지 10여년간 본인이 스스로 '황금의 10년'이라 말하는 10여년의 새월을 보낸다. 이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황금의 시대라는 경제호황기와 대비되는 어두운 작품인 《청기와》와 이전작인 《유경에서 부는 바람》을 리메이크 한 《유경의 불빛》, 김영삼 총리를 비롯하여 김대중 민주당 총재, 김종필 전 총리, 자신의 아버지인 김성주 전 총리등의 정치적 염문을 바탕으로 한 《국민 여러분.》등이 있다.[12]

그러나 1997년 동남아발 외환위기로 국내경제가 침체되고 상당수의 영화투자자들이 영화산업에서 손을 때자 김정일 감독에게도 암흑기가 찾아온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직장과 삶의 이유를 잃고 한강으로, 옥상으로 향하는 이 시점에서 영화산업의 침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감독은 이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영화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때 김감독의 영화는 평소의 어둡고 잔잔한 분위기의 본인의 영화 스타일과는 다르게 희망을 주는 밝은 내용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는 병으로 인해 죽어가던 중년 남성이 산으로 올라가 자연에 어우러지며 건강을 되찾는다는 내용의 《솔잎》이 있고 이외에도 기타 2개의 단편영화 제작에도 합류하였다.

외환위기가 끝날 무렵에는 다소 몽환적이라 평가받는 《꿈속의 님》을 발표하였으며 2009년에는 휴가차 방문한 평북 동림군의 치메노인을 모티브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지우개》를 발표하였는데 이 당시 김정일 감독은 이미 뇌졸증으로 인해 쓰러진 전적이 있을 만큼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황이었고 결국 《지우개》는 김감독의 유작으로 남고 만다.

2010년 이후로 김정일 감독은 영화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으며 모교인 평양대학교에 강연을 다니거나 몇몇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는 등의 활동만을 하며 지냈다. 그러나 2011년 들어서는 건강상태의 악화로 인해 거의 모든 공개활동을 전면 중단하였으며 이후 2011년 말에는 평양대학병원에 입원하여 투병생활을 이어나갔으나 병세에는 차도가 없었다. 결국 김정일 감독은 12월 15일경 자신의 운명을 채념한 듯 자식들을 불러 유언을 전했으며 자택으로 돌아가겠다는 의견을 피력, 결국 퇴원 후 자택으로 복귀하였다.

결국 2011년 12월 17일 향년 70세의 나이로 평양 용성구의 자택에서 사망하였으며 이후 정부는 고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하였다.

영화스타일

작품

수상

여담

가족관계

염세주의자?

어록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자
자신의 좌우명
이럴 거면 돌아가시라.
전두환 총리가 영화촬영장을 방문해 촬영이 방해되자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노력하여 국민들이 다시는 웃음을 잃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배우들에게
새로운 소재를 생각하는데 인터넷 매체는 항상 훌륭한 참고자 입니다,
정부에 대한 대담한 비판자이자 민중의 충실한 대변인으로써 인터넷 매체에 대한 검열은 최소화 되어야 합니다.
통신보안법의 폐지를 지지하며
학생소년들을 어릴때부터 이것저것 시키며 시간을 빼앗는것은 그저 아이들의 상상력을 딱딱한 기계덩어리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가축이나 기계가 아닌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으로 키워야합니다.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며
모든 아이들과 학생들과 청소년들은 미래세계의 첫발을 내딛는 탐험가,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열혈 발명가, 예술가가 되어 미래의 반도를 빛으로 채워나가야 합니다.
문화관광부 어린이날 행사에서
자기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
숭고한 정신과 풍부한 지식을 겸비한 21세기의 믿음직한 근간이 되라!
분발하고도 분발하여 그대들을 온 세상이 우러라보게 해라!
2010년 자신의 모교인 평양대학교를 방문하여 한 연설 中
온 세상에 만발하라 상상의 꽃이여
유언

논란 및 사건사고


  1. 김정일 감독의 아들 김정은이 운영하는 사이트로 고인의 인생과 작품을 소개해주는 사이트이다.
  2. 대한제국 제68대 내각총리대신
  3. 어린 시절 아버지 김성주의 별장에서 물놀이를 하다 물에 빠져 요절하였다
  4. 1969년 결혼, 1973년 이혼
  5. 1976년 결혼
  6. 이외에도 여자관계가 복잡한 것으로 유명하며 여러 여인들과의 염문을 뿌렸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7. 現 창덕초등학교
  8. 아버지 김성주 전총리가 다녔던 학교이다
  9. 現 평양대학교
  10. 할아버지 김형직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신도였던 아버지 김성주 전 총리와는 다르게 사실상의 무종교인이었다.
  11. 이후 자신의 며느리가 된다
  12. 참고로 이 영화에는 김성주 전총리 본인이 직접 출연하여 눈길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