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내항(鹿兒來航)은 1846년, 보도(保道) 2년에 미국(米國)의 동인도 함대(東印度艦隊) 사령관이었던 제임스 비들(James Biddle)이 2척의 군함을 이끌고 통상을 목적으로 신녕(新寧)에 내항한 사건을 일컫는다. 본래는 평호도(平戶島)에 상륙코자 했으나, 밀집해 있는 군소 섬들로 인해 함선의 접안이 어려워지면서 녹아포(鹿兒浦)로 접근했다. 비들은 포함 사격을 가하였으며, 제임스 K. 포크(James K. Polk) 대통령에 서신을 전달하였다. 2년 뒤에는 이러한 접촉이 미녕화친조약(米寧和親條約) 체결로 이어졌다.

내항 배경

미국의 아시아 시장 진출

산업 혁명(産業革命)을 맞이한 서유럽 각국은 대량 생산된 공산품의 수출을 확대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인도(印度)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東南亞細亞)와 중국 대륙의 청나라(淸國)에 대한 시장 확대를 서두르게 되었고, 이것은 치열한 식민지 획득 경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장 확대 경쟁에서 대영제국(大英帝國) 및 프랑스(佛蘭西) 등이 앞서 있었으며, 인도동남아시아에 거점이 없던 미국은 식민지 쟁탈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었다.

그 후 미국은 1833년에 특사 에드먼드 로버츠(Edmund Roberts)를 파견한 성과로서, 시암 왕국(กรุงรัตนโกสินทร์) 및 오만 제국(سلطنة مسقط وعمان‎ )과의 통상 조약을 간신히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1834년에 미국으로 귀국한 에드먼드 로버츠는 국무장관 루이스 맥레인(Louis McLane)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보고서에서 그는 "조선(朝鮮) 및 청나라와의 통상을 여는 길은 먼저 천녕(天寧), 그리고 일본(日本)과 조약을 맺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에도 막부(江戸幕府) 및 청나라와의 협약 체결을 위해 1835년, 에드먼드 로버츠를 다시끔 특사로 파견하게되나, 에드먼드 로버츠가 특사로 임명된 이듬해에 병사함으로서 통상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제1차 아편전쟁(第一次阿片戰爭) 이후인 1844년, 미국은 망하조약(望廈條約)의 비준을 위해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을 청나라에 파견하게 되는데, 그는 청나라와의 조약 체결 외에도 천녕일본과의 통상 협상의 임무까지 함께 고려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녹아포에 함선들을 접안하고 포격의 위협을 보여주는 등의 강압적인 외교를 보여주었다.[1]

녹아내항 이전 미국 관계

녹아내항 이전 미국과의 관계
鹿兒來航 以前 米寧關係
(휘종 10년) 1797년, 네덜란드(和蘭)가 프랑스 제국에게 점령된 후 일부 미국 선박이 네덜란드 국기를 게양하고 출도(出島)에서 13회에 걸쳐 내항을 했다.
(도종 4년) 1830년, 절역도(絕域島)의 미국 출신의 개척가인 너대니얼 세이보리(Nathaniel Savory)가 상륙함.
(도종 9년) 1835년,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의 특명 사신이었던 에드먼드 로버츠가 통상 협상을 위해 파견되었으나 병사함. 같은 해에 동인도 함대가 창설됨.
(도종 11년) 1837년, 이양선(異樣船) 비접촉 명령에 따라 천녕과 일본의 표류민 7명을 태운 미국 상선, 모리슨 호가 천녕 측 포대에 의해 포격을 받음.
(공종 3년) 1845년, 포경선 맨하탄 호(Manhattan)가 22명의 천녕 및 일본의 표류민을 구출하였으며, 선장은 이좌성(伊佐城)의 성주였던 윤덕우(尹德愚)와 대면했다.

내항의 진행

정청부(政廳府)의 원상(院相), 최화순(崔和恂)은 제임스 비들이 내항하기 직전에 출도 상관장(出島商館長)이었던 조지프 헨리 레빈슨(Joseph Henrij Levijssohn)이 감호관(監護官)에게 제출한 별단풍설서(別單風評書, 임금 혹은 원상에게 보내던 미공개 문건)를 전달받아 미국이 통상 체결을 목적으로 함선들을 파견할 것임을 파악했다. 이에 각찬(角粲) 나경윤(羅暻潤)과 태재선부괘(太宰船部掛)[2]로부터 조언을 받은 후 통상 교역에 대해 거부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후 태재주(太宰州) 전역에 성주(城主)들의 병력을 집결하여 해안 수비를 강화했고, 내항의 예상 지점이었던 평호도의 실무 관리들에게 대응책을 전달했으나 중간 전달책의 실수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기에 제임스 비들의 함선들이 접안을 시도했을 때는 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평호도의 접안이 실패한 후 녹아포 앞바다로 진입한 두 척의 함선은 신녕(新寧)의 기습 공격을 두려워하여 임전 태세를 취하고 상륙에 대비하여 주변 해안을 측량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독립기념일의 축포, 호령이나 신호를 목적으로 할 때나 사용하는 수십 발의 공포탄(空砲彈)을 발사하였다.

포격으로 인해 녹아포의 관인들과 일반 백성들은 이양선의 습격으로 오해하여 대응 태세를 갖추고 두 함선을 향해 대통(大筒)[3] 10문과 화란포(和蘭砲) 2문으로 포격을 시도했다. 이에 놀란 제임스 비들은 황급히 선원 일부를 상륙시켜 실제 공격이 아닌 축포(祝砲)의 일종이라고 해명했다. 관리들은 해명을 전달 받은 뒤 포고령을 내렸으며, 사실을 알게 된 지역 주민들은 함선에서 포격음이 울릴 때마다 불꽃놀이를 보는 것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정청부녹아포를 관할하던 향리(鄕吏)들을 통해 제임스 비들의 내항 목적이 조정 관할자에게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는 것임을 파악했다. 허나 제임스 비들은 향리의 의전 계급이 너무 낮다는 이유로 친서 전달을 거부했다. 뒤늦게 녹아 사도(鹿兒使道) 천희(千禧)를 보냈으나, 제임스 비들은 최고위 관리가 아니면 만나뵈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또 비들은 "친서를 전달할 고관을 보내지 않으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영월성(映月城)으로 향해 친서를 전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고서는 구주(九州) 북부 해안 일대를 측량하는 등 위협 태세를 갖추었다.

제임스 비들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은 정청부의 고관들은 "하루 빨리 양이(洋夷)들의 의견을 적당히 들어주고 퇴선시키자"는 견지를 내놓고서 국서(國書)를 수령하고 조정의 대답을 출도 상관장에게 전달할 것을 녹아 사도에게 훈령(訓令)으로 내렸다. 최화순은 끝내 비들 일행의 간속성(肝属城)의 진입을 허용하였고 어모방어사(馭謨防禦使) 조수휴(趙睟烋)로 하여금 경비를 삼엄하게 할 것을 지시하고 각찬 나경윤급간(級干) 하우흔(河羽欣)을 파견하여 회견 자리를 갖게 했다.

비들은 신녕의 개국을 재촉하였고,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의 친서와 제독의 신임장, 각서 등을 전달했다. 이에 나경윤은 "원상(院相)의 병중이 깊어 1년하고도 반년 정도의 유예 기간이 필요하다"는 의중을 전달하고 비들은 "대답을 듣기 위해 내후년 즈음에 다시 내항하겠다"고 대답했다. 회담 자체로는 문서 전달만 이루어졌으며, 외교적 협상은 전무했다. 전권대사(全權大使)를 겸임하던 신녕의 두 고관은 대답치 않았다. 신녕 측은 회견을 마치고 3일안에 퇴거하라는 요청을 했고, 비들은 그 기간 동안 항구 앞에 함포를 향하여 끝까지 충분한 무력 시위를 끝맞추고서야 유구국(琉球國)에서 잠시 휴식 시간을 거쳐 칠레(Chile)의 발파라이소(Valparaíso)로 뱃머리를 향했다.

한편, 공종(恭宗)은 제임스 비들의 내항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직접 녹아포로 시찰(視察)하였다. 이후 제임스 비들을 만난 뒤 직접 전열함(戰列艦) '콜럼버스'(USS Columbus)에 탑승하였으며, 퇴항할 즈음에는 임금의 개인 자산이었던 내장금(內藏金)을 지급하여 일부 관리들을 합승시켜 서양 문물을 체험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각주

  1. 녹아내항 이후 비들은 에도 막부와의 통상 교류를 위해 우라가(浦賀)에 입항했으나 일본 함선이 그의 상륙을 거부했으며, 막부의 답변을 전달하던 중 모종의 문제로 인해 무사(侍, 武士)들에게 뺨을 맞는 수모를 겪은 후 교섭을 중단한 뒤 회항하게 되었다.
  2. 출도평호도를 포함한 북부 해안 수비를 총괄하던 무관 직책.
  3. 대구경 조총 혹은 핸드캐논으로 활용한 화기의 일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