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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국가 및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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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한민국 북한
중국 중화민국 몽골[1]
다롄 홍콩 마카오
  1. 중앙아시아의 일부로 분류되기도 함.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
다롄 특별행정구
大连特別行政區
Dalian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특별행정구기 휘장
萬族協華 萬民共和
만족협화 만민공화
언어별 명칭
일본어 大連特別行政区 (だいれん とくべつ ぎょうせい く)
러시아어 Даляньский специальный административный район
조선어 대련 특별행정구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ᠪᡝᡤᡳᠩ ᡧᡝᠩᡯᡠ ᡤᡠᡵᡠᠨ
상징물
국가 의용군 행진곡
위치
역사
수도
오이소마치구 (大磯町 (おおいそ まち))
면적
1840.69km2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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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어 일본어, 러시아어, 한국어, 중국어, 만주어[1]
인구 9,563,700명 (2021년) | 세계 94위
인구 밀도 5,195.71명/km2
민족 구성 한족 33.4%, 만주족 30.1%, 조선인 18.2%, 일본인 9.4%, 러시아인 5.4%, 기타 3.5%
종교 국교 없음 (국가 무신론)
불교 63.2%
기독교 7.4%
기타 및 무종교 29.4%
군대 다롄 군경대
주둔군 중국 인민해방군, 중화민국 국군, 일본 자위대, 대한민국 국군, 조선인민군, 러시아군
하위 행정구역
21개 자치구
5개 군사주둔특구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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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 특수행정구
정치 체제 대통령 중심제(수반 직선제), 단원제, 제한선거제
입법부 다롄 입법회
민주주의 지수 7.42점 | 결함 있는 민주주의
(세계 37위, 아시아 4위)
행정부 수반
(행정장관)
요시오 도모유키
2018년 5월 15일 ~ 2022년 5월 14일
국제감독관 왕보청
쓰밍더
다니자키 사다카에
노영민
리용철
블라디미르 나데즈바
집권 여당 없음 (사실상 민주파)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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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시장 경제
GDP
(명목)
$4,179억 3,369만 | 세계 32위
1인당 $43,700
GDP
(PPP)
$4,781억 8,500만 | 세계 46위
1인당 $50,000
신용 등급 무디스 Aa2
S&P AA+
Fitch AA+
화폐 다롄 위안 (DLY)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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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형 SI 단위
시간대 GMT+08:00 (다롄 표준시)
무비자 입국 양측 모두 180일
ISO 3166-1
DL, DLR
도메인
.dl, .dlch, .大连
행정구역 한자 약칭
국제 전화코드
+850
여행 경보
특별여행주의보 전지역 (코로나 19)

개요

다롄 특수행정구(중국어: 大连特別行政區 (Dàlián tèbié xíngzhèngqū) 다롄 테볘씽쩡취[*], 일본어: 大連特別行政区 (だいれん とくべつ ぎょうせい く) 다롄 도쿠베츠 교세이쿠[*], 한국어: 대련 특수행정구, 러시아어: Даляньский специальный административный район 다롄스키 스페치시날니 아드미니스트라티브니 라욘[*],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ᠪᡝᡤᡳᠩ ᡧᡝᠩᡯᡠ ᡤᡠᡵᡠᠨ 다이고로 코호토이 치항가이에젠 구룬[*])는 중화인민공화국특별행정구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3개 행정구역중 가장 그 규모가 크다.

상세

수도는 오이소마치 (大磯町 (おおいそ まち)), 인구는 총 956만 3,700명.

인구가 1,000만명에 육박하며 1,800km2에 달하는 면적으로 인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3개 특별행정구역중에서 가장 그 규모가 크다. 또한 한국, 일본, 러시아 모두에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만큼, 다른 특별행정구에 비하여 중국의 힘이 강력하게 미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다롄은 중국의 영토이면서도 중국의 영토가 아닌, 일종의 조계지로 작용하게 되었다. 1950년대 한국전쟁, 국공내전 등 수많은 정치적인 내전과 전투로 인해 다수의 정치 망명객들이 다롄으로 흘러들어왔다. 중국에게 반환된 현재에도 홍콩, 마카오와 달리 한일러 3개국의 강력한 감시 하에 민주적인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본래 군사도시로 발전된 도시였으나 1950년대 종전 이후에는 한국, 소련, 일본, 중국, 대만, 북한 등 6개국이 모두 맞닿아있는데다가 거대한 부동항까지 끼고 있다는 이점 때문에 홍콩과 마찬가지로 동북아시아의 경제적 허브로 자리잡았다. 현재도 다롄은 국제적인 금융과 무역의 허브로서, 동북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을 통틀어 소득 수준이 가장 높은 지역중 하나로 꼽힌다. 게다가 6개의 각자 다른 문화를 가진 국가들이 공동 통치하였기 때문에, 각자의 문화가 서로 융합되어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는 빈부격차와 민족간의 갈등, 중국의 패권 확대로 인한 정치적인 위기 등은 다롄에게 있어 최근들어 사회적인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상징물

국기

국가


다롄은 중국에 속해있는 지역인만큼, 국가 역시 중국의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사용하고 있다. 다롄 스포츠팀의 국제 경기나, 국기 의례때 항상 의용군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의용군행진곡은 단순한 국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데, 이는 다롄 인구의 약 40% 가량을 차지하는 중국 민족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낼 목적으로 이 노래를 자주 부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이후 다롄 내에서 중국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악화되자, 중국에 반대하는 일부 민주파 지지자들은 홍콩 시위대의 준 국가인 "영광이 다시 오길"을 자주 부른다. 물론 중국 본토 내에서는 이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홍콩 보안법을 다롄에게도 적용해 의용군행진곡 제창을 거부하는 시민들을 체포하는 방안을 시도한 적도 있다. 물론 이는 한국과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반대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역사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다롄 지역을 받아냈으며,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다롄 지역을 본토에 편입하는 대신 조차지로 삼았다. 이후 1923년, 다롄 조차지는 해체되고 다롄은 일본 본토로 흡수되었으며 이후 만주 및 중국으로 향하는 전진 군사 기지로 사용되었다. 1945년, 소련의 만주 진공으로 다롄이 소련에게 넘어간 이후, 2년간 다롄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로 남았다. 그러나 군사 경제적 요충지였던 다롄의 소련 점유에 미국이 반기를 들고 나섰고 이에 따라 1947년 중국, 한국, 일본, 러시아 4개국이 공동 통치하는 특별 행정 구역이 설립되었다. 이후 중국과 한국이 분단되며 통치국은 6개까지 늘어났다. 2005년, 일본의 통치 99년을 맞아 다롄은 중화민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러시아 연방, 일본국의 동의 하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로 중국에게 반환되었다.

다롄 일치시기

1906년부터 1945년까지 다롄은 조선, 대만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다롄은 일개 도시 수준의 규모였기 때문에 일본제국의 급속한 근대화 정책의 수혜를 받은 경우에 속해, 조선과 달리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낮다. 일본의 통치 기간동안 다롄의 주요 도시, 거리명이 전부 일본식으로 바뀌었고, 이는 현재도 다롄의 제1언어가 러시아어나 중국어가 아닌 일본어가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일본과 같은 수준의 경제 개발 정책이 시행되어 다롄은 만주 제일의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만주인 귀족들이 1912년 신해혁명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한 것 역시 다롄의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모두가 다롄 일치시기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건 아니다. 일본은 조선계/화계 범죄조직과 결탁하여 매우 부패한 행정을 보인데다가, 치안유지법으로 조선인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들을 탄압했으며 중일전쟁이 지속되면서 강도 높은 수탈 정책이 시행되어 1940년대 다롄의 경제는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다롄 일치시기에 대한 평가는 미묘하며 다롄의 교육과정에서 일본의 경제 발전 자체는 인정하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 폭력의 형태가 들어간 제국주의적 발전이었다는데에 동의하고 있다. 다만 중국의 침략 행보가 가속화됨에 따라, 영국의 식민통치가 재평가받는 홍콩과 마찬가지로 다롄 내에서도 일본제국의 통치가 나았다는 여론이 점차적으로 힘을 얻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2]

러일전쟁과 다롄 조차지의 성립

1904년, 러시아는 조선 및 만주의 영유권을 두고 일본과 분쟁을 겪은 끝에 러일전쟁을 겪는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일본은 보란듯이 러시아를 꺾고 만주 전체의 영유권을 장악하였다. 본래 뤼순과 다롄 지역은 러시아가 부동항 확보를 위하여 애지중지하던 곳이었지만, 패전국인 러시아는 이 두 곳을 지킬 수 없었고 결국 뤼순과 다롄은 일본제국군에 의해 점령되어 일본군의 주요 주둔지로 거듭났다.

하지만 일본의 본토에서 멀었던 다롄과 뤼순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에는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이 지역에 조차지를 설립하여 한족들의 반발을 최대한 줄이면서, 국제적으로 눈치도 보지 않고, 군사적 및 경제적인 이점은 확실히 챙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1906년 1월 1일을 기하여 뤼순과 다롄을 통합한 다롄 조차지가 성립되게 된 것이다.

조차지의 해체와 본국 편입

1910년 조선의 멸망 이후,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의 탄압과 기근을 피해 비교적 기회가 열려있는 다롄으로 몰려들면서 다롄은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거점이 되었다. 1906년 다롄 인구중 조선인은 단 1.4%만을 차지했지만 1917년에는 27.3%를 차지했다. 이는 일본 정부에게 있어서 상당한 부담감을 주었는데, 왜냐하면 다롄 지역의 조선인들은 범죄 조직을 형성해 일본 정부의 권력을 넘어서는 경제 정치적인 흑막이 되었을뿐더러 그 막대한 조직력을 통하여 수많은 조선인 무장 단체들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조선에서 대규모 반일 폭동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더이상 조선인 조직들을 두고볼 수 없다고 판단, 조선인 범죄 조직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일본 군경과 조선인 조직간의 전쟁이 일어났으나 정작 전쟁은 조선인 조직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단순한 독립 조직이 아닌 이권 추구 단체로서의 면모가 더욱 강하였던 조선인 범죄 조직은 일본 정부의 회유에 잘 넘어가지 않았고 도리어 다롄 조차지의 일본인 공무원들이 조선인들에게 매수되어 미적지근한 대처를 보이는 일이 잦았다. 이로 인하여 1922년 일본 정부는 결국 다롄 조차지의 조선인 범죄 조직 소탕을 포기해버리고 무장 단체와 연락만 하지 말라는 경고만을 날릴 수 밖에 없었다.

일본 정부는 다롄 조차지를 그대로 놔두는것보다는 직할령으로 하여 보다 위협이 되는 조직들을 잘라내는게 도움이 될것이라고 판단했다. 조선인의 비율이 너무 높았던 다롄에는 이미 범죄 조직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독립 단체들이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 정부는 1923년 12월 12일을 기하여 다롄 조차지를 해체하고, 대일본제국의 직할령으로 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다롄이 대일본제국의 직할령으로 전환된 이후 일본 정부는 조직들을 때려잡는게 아니라, 그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무장조직과 연을 끊으면 더욱 큰 보상과 이득을 주는 것으로 리스크를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판단에 불과하였으므로 다롄의 암덩이와도 같던 범죄 조직들을 소탕하기는 커녕 더 키워버리는 악수가 되었다.

중일전쟁 당시의 다롄

대만, 조선과 마찬가지로 만주 사변과 중일전쟁 등을 겪으면서 다롄은 대일본제국군의 전진 기지로 적극 활용되었다. 전진기지로 활용되는 면에 있어서, 다롄은 조선 및 대만에 비해 훨씬 그 강도가 심하였다. 부동항으로서의 입지, 거대 도시인 다롄의 존재 등이 그 이유였다. 이 기간동안 반발하는 조선인과 중국인 수천명 이상이 학살당했고, 수많은 다롄 시민들이 강제 징집되어 중일전쟁 전선에서 억지로 싸워야했다. 또한 다롄의 몇 안되는 농지들은 전부 대일본제국군의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한 농업 지대로 사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롄의 쌀 부족 사태는 심화되었으며, 아사자와 피난민이 속출했다. 1937년 당시 다롄의 인구가 120만명 가량이었는데, 1944년 기준 인구는 102만 3천여명으로 인구의 거의 15%가 식량 문제로 도시를 도망치듯 떠난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1945년 소련의 진공 작전과 지속되는 식량 문제로 인해 1945년 9월 종전 이후 소련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인구는 90만명대 초반으로 줄어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노년층들은 일본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을 가지고 있으며 대다수의 다롄인들도 한국인만큼은 아니지만 일본 제국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사회상

여러가지 논란이 있긴 하지만 다롄은 일치 시기 동안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1912년 청나라가 붕괴되면서, 다롄으로 만주족 귀족 출신 망명객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다롄에서 새출발하며 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했다. 또한 일본에서 건너온 사업가들도 다롄에서 활동하면서 다롄의 경제는 1910년대 만주족 귀족 출신의 부호와 일본인 신흥 상인들이 주도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1910년대 이후 경제 성장은 매우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제국 최대의 항구중 하나로 부상한 뤼순항과 다롄항을 중심으로 일본인 조계가 마련되었고, 일본인 조계는 작은 요코하마나 작은 나가사키라고 불릴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다롄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내지 일본인보다도 더 잘 살았고, 1925년 다롄 도심에서 전차가 개통하였으며 1927년에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다롄점이 개장했다. 당시 전 중국 대륙에서 홍콩 다음으로 잘사는 도시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반면 일반 민중들은 이런 경제적 성장의 혜택을 거의 입지 못했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실제로 대일본제국 대장성의 조사에서 1930년 다롄의 빈층은 부유층의 한달 소득에 32%정도의 소득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다롄은 전형적인 20대 80 사회로, 극소수 일본인과 만주인 귀족들은 부유한 삶을 영위하였으나, 대다수의 조선인, 중국인, 만주인들은 굶주렸다. 이들은 조선계 범죄조직에 가입하며 한탕을 노렸으며 범죄조직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은 1930년대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32년 있었던 뤼순 항만 노동자 대파업은 다롄의 사회주의 운동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일본은 치안유지법을 발동해, 1933~35년 사회주의 조직 궤멸 작전에 나섰으며, 이로 인해 중일전쟁이 시작될때 즈음 다롄 내 노동자 운동은 주춤하게되었다.

이마저도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발발하며 다롄이 대대적으로 수탈당함에 따라, 이런 모습도 1940년대 들어서는 퇴색되게 된다.

일본의 패전과 소비에트령 다롄의 성립

1945년 8월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진행한다. 1945년 8월 19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4일 이후 소비에트 연방군에 의하여 다롄 지역이 해방되었으며 이 지역은 과거 일본의 조차지였던 관계로 소련이 군정령을 설치하고 해군과 육군을 주둔시켰다. 소련 정부는 다롄 군정령의 군정사령관으로 로디온 말리놉스키를 임명하였다.

소련의 군정령이 시행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수많은 일본인 관료들과 부호들은 다롄에서 탈출하려고 하였으나 소련 해군이 항구를 접수한 시점에서 의미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일본인 관료 및 친일파들을 무작정 처벌하기보다는 A급 전범만을 처벌하였고 96.4% 이상의 기존 일본인 관료들이 다롄 군정령의 공무를 맡았다. 이는 소련 정부가 인구가 200만에 달했던 다롄의 행정 공백 상태에 대한 우려와, 다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일본인과의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일본인 전범 처벌에 실패했다는 비판이 존재하지만 다롄이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빠르게 극복하는게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4개국 공동 통치령

소련은 다롄을 직접적인 소련의 영토로 흡수하려고 하였으나 미국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미국은 다롄이라는 요충지는 일본과는 구분되어야하고 만주와도 구분되어야한다면서, 미국과 소련이 공동 관리하는 공동 경비구역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거부하였으며, 대신 소련, 중국, 한국, 일본이 공동 통치하는 조계지로 둘 것으로 제안하였고 맥아더 극동사령관이 이를 동의하면서 1947년 4개국 공동통치령 다롄이 설립되었다.

물론 한국과 일본은 당시 미국, 소련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국가는 중국, 소련, 미국 3개국이었다. 1948년, 한국이 독립하였음에도 다롄에는 미군이 주둔하며 실질적으로는 미국이 한국의 이름으로 다롄을 통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6개국 공동 통치령으로의 전환

1950년 6.25 전쟁으로 일시적일것으로 예상되었던 한국 분단이 고착화되었으며, 중국 역시 1949년 국공내전으로 중화민국이 국부천대를 감행하며 4개국중 2개국의 다롄 통치가 외교적 분쟁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미국의 도움으로 다롄 지역을 실질통치해야함을 주장했지만, 이 지역을 실제로 통치하는 것은 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이었기 때문이다.[3] 고로 중화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소비에트 연방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4년 협상을 벌였다. 일본과 한국, 북한, 대만은 회의에 불참하였다.

1954년 9월 1일, 미국, 소련, 중국은 하얼빈 조약을 통하여 4개국 공동통치령을 한국, 북한,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일본이 공동통치하는 6개국 공동통치령으로 전환함을 공표하였다. 이로서 4개국 공동통치령은 6개국 공동통치령으로 전환되었다.

화선쟁패항쟁

1949년 국공내전 종결 이후, 중국의 급변하는 정치 환경을 피해 수많은 중국인들이 다롄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그중에서는 삼합회 역시 끼어있었으며 삼합회는 금세 그 조직력으로 다롄 내 최대 지하 조직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다롄을 통치하던 시대부터 다롄 지역의 뒷거리를 장악해왔던 조선계 범죄 조직들에게 삼합회의 유입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을 비롯한 한반도 내의 여러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조선계 범죄 조직은 크게 남한계로 구성된 맹회와 북한계로 구성된 총련으로 구성되어있어 삼합회에 대항해 큰 힘을 내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면서 베트남 난민들이 다롄으로 흡수되었고, 베트남 삼합회가 중국 삼합회에 유입되면서 조선계 범죄조직들의 불안감이 커졌다. 결국 1971년 9월 총련맹회는 일시적인 공동 전선을 펼쳐, 삼합회에 대항하는 뒷거리 전쟁인 화선쟁패항쟁(華鮮爭霸抗爭)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5,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다롄의 치안이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고 봐도 좋을만큼 악화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삼합회는 사실상 전멸하였고 총련과 맹회는 1949년 이전의 패권을 되찾아 양강 구도를 구축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다롄 내 치안 공백의 위험성을 느낀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치안 안정을 목적으로 경찰 병력을 강화하고 군대와 경찰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무장 조직인 다롄 군경대를 설치하면서 일본, 한국, 대만과의 외교적 충돌이 발생했다.

1983년 다롄 반정부 투쟁

위기는 1981년 다롄 정부가 기존의 다롄 손중산 국제공항의 2번째 활주로를 공사하려는데에서 시작되었다. 다롄 손중산 공항은 홍콩 카이탁 공항과 더불어 중국 대륙의 최대 허브 공항이었고, 그만큼 늘어나는 활주로를 확충하기 위하여 손중산 공항을 확장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문제는 다롄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던 손중산 공항을 확장하는데에는 그만큼 애로사항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롄 정부가 조선계 범죄 조직들을 이용해 손중산 공항의 2번 활주로가 지어질 위치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강제 퇴거시키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은 조선계 조직이 주민들을 강제 퇴거시켰다는 소식이 퍼지자, 가장 반발한 것은 중국계 한족 주민들과 만주족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안그래도 조선계 범죄 조직의 각종 행패로 인하여 조선인들이라면 학을 떼던 상황에서, 조선계 조직들이 정부의 지원까지 받는다는 소문이 돌자 폭발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초반에는 조선계 범죄 조직들을 타도하려는 민족 갈등의 성향이 강했던 폭동은 점차적으로 다롄 정부의 무책임한 경제 정책을 타도하는 반정부 집회로 발전하였다. 다롄 내에서 전체 예산의 8%만이 서민 복지를 위해 사용되고 있었으며, 1980년대 성장하던 다롄 경제와 반비례해 일반 주민들의 삶은 점점 안좋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정부가 단지 공항 하나를 증축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적법한 보상은 해주지 못할망정 범죄 조직까지 동원해 내쫓는 모습을 보이자, 만주족과 한족 뿐만 아니라 다롄 전체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비판이 일었고 이는 큰 규모의 반정부 투쟁으로 이어졌다. 한국, 일본, 대만, 소련 등 다롄을 통치하는 각국 정부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조성되었다. 결국 이는 다롄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며 강제 퇴거된 주민들에게 보상을 해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다롄은 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는데, 가장 두드러진 점은 이전까지 6개국 식민 통치나 다름 없던 다롄이 비록 제한적이긴 하나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1984년 제1회 다롄 입법회 선거가 치뤄졌고 여기서 구성된 제헌 다롄 입법회는 여러 서민 복지 정책과 민주적인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런 정치적인 변화는 장기적으로 다롄이 6개국의 통치에서 중국으로의 반환이 이뤄지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회상

일본인들의 권력과 경제적 주도권은 이 시기에도 유지되었으며, 만주계 역시 일치시기에서 더 올라가 청나라때부터 쌓아놓은 재산을 통해 경제적으로 번성하였다. 경제적 발전은 일치시기와 마찬가지로 급속하게 이루어졌고 홍콩, 마카오와 함께 중국의 3대 미항이자 최대 발전 도시라고 불려졌다.

하지만 그만큼 어두운 면도 많았다. 다롄은 냉전 시기 동아시아를 구성하는 6개의 국가가 접경한 만큼, 6개 국가의 정보부는 물론이고 영국과 미국의 정보부까지 개입하여 그야말로 국제 첩보의 장이라고 불렸다. 또한 화선쟁패투쟁을 통하여 다롄의 뒷거리를 완전히 장악한 조선계 범죄조직들은 정부 기관과 거의 대등한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막대한 자금력와 인력, 조직력을 통해 밤의 다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첩보 기관이 낮의 정부를, 마피아가 밤의 정부를 장악한 상황에서 정부의 청렴도는 급격하게 하락했으며 암살과 정치 공작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문화적으로는 홍콩, 마카오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문화에 여러 이국적인 문화가 융합되어 제3의 문화가 나타나는 양상을 보였다. 주로 사용되는 언어는 일본어였지만, 조선계, 만주계, 중국계, 러시아계 주민들이 공존하여 만주 문화, 조선 문화, 중국 문화, 러시아 문화, 일본 문화가 골고루 섞어가며 이색적인 모습을 풍겼다. 다롄의 발전이 정점에 다른 1980년대에는 높은 고층 건물에 일본어, 만주어, 러시아어, 한국어, 중국어 등 각종 언어로 쓰인 네온사인 간판이 조화를 이루면서 마치 미래의 도시와 같은 모습을 풍겼다.

상술했듯이 서민층에게 이런 경제적 발전의 수혜는 매우 조금만이 돌아갔기 때문에 불만이 컸으나, 1984년 설립된 다롄 입법회를 통해 기존의 군정에 가까웠던 다롄은 민주정으로 변했고 따라서 복지 정책 역시 시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민들과 부자간의 빈부격차 문제는 정부의 부패 문제로 인하여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아, 2005년 중국에 반환될때까지 다롄의 가장 큰 사회적인 문제로 존속했다.

중국으로의 반환

다롄 내에서 한족은 약 35%정도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 만주계까지 합칠시 중국인 인구는 60%에 달했다. 홍콩의 94%에 비해서는 적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다롄이 언젠가는 중국으로 반환되어야한다는 여론에 불을 지피게 되었다. 냉전 시기에는 일본과 한국, 대만 정부가 다롄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통해 정당하게 할양된 지역이라며 결코 반환할 수 없다는 주장을 견지했으나, 1990년대 냉전이 끝남에 따라 대만, 중국, 한국, 일본, 러시아, 북한 정부가 협의하예 다롄을 6개국의 조계지에서 중국의 영토로 반환하는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본래는 일본과 한국, 대만 측에서도 다롄을 중국에게 넘기는데에는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2003년 홍콩에서 일어난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는 대만, 일본, 한국에게 있어서 다롄측을 보호해야할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동시에 다롄을 사실상의 식민지이자 제2의 본토로 삼아 압박하려던 중국의 기존 계획을 실행하게 어렵게 하였다. 또한 대만, 한국, 일본이 합동전선을 펼쳐 홍콩과 같은 불평등 조약은 있을수 없다고 못을 박으면서 다롄의 중국 반환은 홍콩에 비해 훨씬 기존 주권국의 권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2004년,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대만, 러시아, 북한, 한국, 일본은 다롄을 중국에게 반환하는데에 합의하였으며, 이 요코하마 조약을 통하여 2005년 5월 11일 다롄은 99년만에 중국으로 반환되게 된다.

현대

중국에게 통합된 이후 다롄은 경제, 사회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원래부터 경제적으로 발전되어있었지만 톈진, 베이징, 상하이, 인천, 평양, 서울 등 동북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을 전부 잇는 물류의 중심이자, 중화권 금융의 허브로서 더더욱 빠른 속도의 경제적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 한국, 대만의 급속한 경제 발전과 더불어, 기존의 일본-만주계 자본 뿐만 아니라 한국, 대만, 중국의 자본 역시 2000년대 이후 다롄에 유입되며, 다롄은 전례 없는 경제적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홍콩과는 달리 주변에 선전이나 광저우와 같은 이렇다할 대도시 역시 없어 앞으로도 다롄이 만주 지역에서 가지는 경제적 헤게모니는 큰 이변이 없는 한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중국의 지속적인 패권 확장으로 인하여 다롄의 민주주의는 풍전 앞의 등화와도 같으며, 중국은 홍콩, 마카오에서 시행되고 있는 강력한 중화 동화 정책을 다롄에서도 똑같이 적용하려고 하여 일본, 한국, 대만 정부의 큰 반발을 샀다. 또한 코로나19, 중국의 동북공정, 대만-중국 분쟁, 센카쿠 열도 분쟁 등 수많은 대외적인 분쟁은 다롄 내의 여러 민족들의 사이가 멀어져 사회적 분란을 일으키는데 일조하여, 2010년대 이후 다롄의 주요한 고민이 되고 있다.

2020년 다롄 정치 위기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다롄 내부에서 반중 감정이 매우 드세졌다. 2012년 조사에서 다롄 시민들의 63.3%는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인으로 밝혔지만, 2020년의 조사에서는 21.6%로 대폭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2020년, 다롄 내에서 높아지는 반중 감정에 대항하기 위하여 중국은 홍콩 보안법을 다롄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 및 일본 외교부가 이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이는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다롄에 행사하는 내정간섭은 지속되어, 한일만과 중러북의 외교 대립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2020년 새해 민주파 시민들은 중국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으나, 이를 다롄 경찰이 무장 진입하면서 큰 논란이 일어났다. 다롄 내부에서는 불필요하게 중국을 자극했다는 의견부터, 정당한 시위였다는 의견, 집회를 탄압한게 잘했다는 의견 등 각 민족 및 정치성향별로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면서 2020년 다롄 정치 위기로 발전하였다. 결국 다롄의 치안청장인 황스천이 사퇴하기에 이른다. 이 여파로 제13회 다롄 입법회 총선거에서 민주파(친한일만파)가 총 60.1%를 득표해 건제파(친중러북파)의 35.3%를 크게 앞질렀다. 이 과정에서 다롄 뒷거리 세력을 양분하고 있는 민주파 성향의 맹회와 건제파 성향의 총련이 격돌해 양측에서 4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중국에 대한 혐오 감정은 더욱 커졌으며 이는 다롄 내에 거주하는 조선계, 일본계, 만주계 시민들이 중국계 시민들을 공격하는 인종 혐오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다롄 문제는 한중일러북만 6개국 외교 갈등의 뇌관으로 작용하게 된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 아베 신조 총리, 차이잉원 총통은 중국측의 시급한 민족 분열 및 정치 위기에 대한 해결책 강구를 요구하였다.

지리

다롄의 지역 구분

면적은 1840.69km2로, 중국의 3개 특별행정구중 가장 그 면적이 넓다. 마카오에 비하여 그 면적이 60배나 넓으며 홍콩과 비교해봐도 그 면적 차이가 2배 가까이 된다. 이 때문에 인구밀도는 5195.71명/km2로 꽤 낮은 편이고 신한도 관구에는 농토도 상당히 많다. 물론 대다수의 인구는 다롄 관구뤼순 관구에 몰려사며 이 때문에 다롄이나 뤼순 시가지에는 홍콩에서 볼 수 있는 높고 빽빽한 아파트들이 들어서있다. 신한도는 비교적 최근 개발된 신도심, 교외 지역이기 때문에 뤼순이나 다롄에 비해 집값도 싸고 여유도 많지만 다롄 구시가지의 집값은 그야말로 동아시아 최고라고 할만하며, 종종 홍콩 섬이나 도쿄의 치요다구, 서울의 강남구와 비견되곤 한다.

이 때문에 다롄 정부는 1957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다롄과 뤼순 인근의 지역들을 간척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그것보다는 신한도 관구에 인구를 분산시키려 하고 있다. 이 정책은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며 1976년 전체 인구의 88.4%가 다렌과 뤼순에 몰려살았던것에서 74.5%정도로 줄였다. 그럼에도 다롄과 뤼순 지역의 집값 문제는 해결이 안되어서, 5평짜리 구식 아파트를 구매하려면 무려 한화 18억원정도의 돈이 든다. 이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월세살이를 해야하며 그것조차 없는 빈곤층은 아예 무허가 주택을 짓거나 노숙을 하기도 한다. 신한도는 사정이 낫지만 이 지역 역시 집값이 만만치 않다.

크게 보았을때 다롄의 지리는 다롄의 중심지에 속하는 다롄 역사지구와, 196~70년대 다롄의 성장기 시기 지어진 다롄 신시가지(이상 다롄 관구 소속), 일제시대 군용 도시로 사용되었다가 1970년대 재개발된 뤼순 관구, 그리고 1990~2000년대 본격적으로 개발된 신한도 관구로 구성되어있다.

다롄 역사지구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름 일본어 大連歴史地区 (だいれん れきし ちく)
한국어 대련 역사지구
영어 Historic Centre of Dalian
국가·위치 중화인민공화국 다롄 특별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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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 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7년
등재기준 (ii), (iii), (iv), (vi)

흔히 다롄 구시가지라고 하면 이 지역을 뜻한다. 1970년대 이래 다롄 신시가지가 너무나도 빠른 성장을 이뤄, 각종 영화에 등장하였기에 구시가지 쪽은 인지도 면에서 밀리지만, 본래 다롄이라고 하면 이 지역을 뜻했다. 이 지역은 청나라 시기부터 도시가 들어서있었고 이후 일본의 통치를 받으며 일본풍의 건물들이 속속 들어섰다. 1940년대, 다롄이 4개국 공동통치령으로 전환된 이래, 다롄 구시가지는 여전히 중심지의 기능을 하였으나, 다롄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다롄 신시가지가 개발되었고, 저층에 오래된 건물들이 많았던 다롄 구시가지는 관공서들만이 남고 사람들과 기업은 떠나가 점차 쇠락하는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 청나라 시대의 고건축물과 일본의 근대식 건축물이 어우러진 구시가지의 모습은 관광객들의 이목을 끌어, 다롄 최대의 관광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일본과 중국 내에서도 유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일본 제국과 청나라 시대의 가옥 형식들이 잘 보존되어있어,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았고 따라서 1987년 다롄의 처음이자 유일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이후 1990년 다롄 입법회의 법안을 통하여, 다롄 구시가지는 공식적으로 다롄 역사지구라고 불리게 되었고 1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관계로 현재 다롄에 위치한 10층 이상의 건축물들은 전부 1980년대 이전의 건물들이다.

주요 관광지로는 1932년 건립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신사인 다롄신궁과 구 다롄 총독부 건물로 사용되었던 다롄 입법회 건물 등이 있다. 이 지역은 여러 관공서가 들어서있어, 실질적으로 다롄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오이소마치구는 정부청사를 포함해 수많은 관공서들이 위치하여 다롄의 행정적 중심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로 다롄 역사지구에 거주하는 몇 안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공무원들이다.

청나라와 일본제국의 건물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건물들과 항구가 탁 트여다보이는 경관, 자동차 진입 제한으로 인한 깨끗한 공기와 조용한 분위기 때문에 다롄 사람들에게 선호되는 거주지이지만, 집값은 그에 비례해 다롄에서 최고를 자랑한다. 이 때문에 다롄 역사지구에 거주하는 사람은 매우 적을 뿐더러(26만 4,000여명) 그마저도 공무원이거나 일제 시대때부터 다롄 역사지구에 살아온 부호들 뿐이다. 다롄 역사지구의 집값은 그야말로 세계에서 최상위권으로, 애초에 매매로 나오는 집도 굉장히 드물이지만 일단 매매가 되었다라고 하면 다롄의 복잡한 부동산법 및 높은 수요로 인하여 집값이 한평당 10억원 이상을 호가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다롄 신시가지

다롄 신시가지의 모습

다롄이라고 하면 이 지역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래 다롄의 신시가지는 현재의 다롄 역사지구에 밀린 배후 지역으로, 공장들이 주로 들어와있던 모래밭이었다. 하지만 다롄의 구시가지가 점차 낡아가고 1950년대 이후 다롄이 폭발적인 대성장을 겪음에 따라, 다롄 구시가지의 배후 지역이었던 이곳의 지가가 높아지고 고층 아파트와 빌딩이 들어서면서 1970년대 이후에는 도리어 구시가지로부터 다롄의 중심지 지위를 빼앗았다.

세계적으로 가장 물류량이 많은 항구중 하나인 다롄항을 끼고 있는데다가 다롄의 최중심부에 위치하여있는 천혜의 위치로 인해 급속도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군수 공장이 빼곡했던 1940년대의 모습은 1950년대 후반 거의 사라졌고 1970년대에는 거대한 고층 빌딩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있어 중화 대륙 내에서 가장 번성한 지역중 하나로 손꼽혔다. 특히나 1980년대 다롄의 최전성기에는 만주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러시아어 등 각지의 언어로 적힌 네온사인 간판과 용적률은 신경쓰지 않은, 빽빽하고 높게 치솟은 건물, 그리고 그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다롄 전철과 시민들의 모습 등이 시너지를 일으켜 마치 미래의 도시와 같다고 여겨졌다. 1980년대 다롄의 모습은 여러 미디어믹스물에서 모티브로 사용되었으며, 이 모습은 1990년대 이후 신시가지의 개발이 주춤하고 LED가 네온사인을 대체하면서 또다른 모습으로 변하였다.

1980년대에 비해서는 나아진 편이지만 이 지역의 집값은 중국 최상위권이다. 3~5평짜리의 닭집같은 아파트가 일상화되어있을 정도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 지역은 너비가 367.19km2에 불과한데, 다롄 신시가지에 사는 인구는 무려 423만 6,000명으로, 인구밀도가 전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지역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기업들의 사옥들도 여럿 들어서있다. 아파트와 유리 궁전들의 야경이 무척 아름다워서 요코하마, 홍콩, 하코다테, 구마모토 등과 함께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미항으로 불린다.

뤼순

희전사

다롄 신시가지와 역사지구의 서쪽, 즉 요동 반도 맨 끝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 지역에는 262만 4,0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다롄 구시가지와 마찬가지로 역사가 오래된 지역도 있지만 이 지역은 다롄 시가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군사 기지로 발전하였기에, 역사적인 건축물들은 대부분 전쟁을 겪으면서 헐리고 남은 몇몇의 건물만이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중이다. 예로부터 이 지역은 군사적인 요충지로, 애초에 러일전쟁이 일어난 이유부터 뤼순 지역을 두고 일어난 러시아와 일본의 싸움이었을정도로 유서깊은 해군 주둔지였다. 그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일본 해상 자위대가 여전히 이 지역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을 정도이다.

군사 도시였던 이곳이 본격적으로 개발된건 1950년대 후반의 일로, 다롄 신시가지가 개발된 때와 그 시점이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춘것은 1970년대이다. 그 이전까지는 다롄 중심지에서 밀려난 빈민들과 상이군인들이 거주하여 빈민촌이 드넓게 펼쳐져있었다. 1968년부터 1973년까지 5년에 걸쳐 다롄 정부는 이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쳤으며, 이후 빈민가와 옛 건물들을 전부 철거하고 계획도시를 건설하여 다롄 구시가지/ 신시가지에 이은 제3의 중심지로 이곳을 개발시켰다.

다만 이는 료준구나카지마구 정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로, 우메다구, 니시세이켄구, 기시쿠라구는 여전히 미개발된 지역도 있어서 최근에야 개발된 신도시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오히려 낮은 집값과 말끔한 외양 때문에 홍콩의 신계와 마찬가지로 배드 타운으로 각광받아, 1990년대 뤼순의 인구가 다시 한번 폭증하는데 크게 일조하기도 하였다.

주요 관광지로는 희전사가 있는데, 이곳은 뤼순 전투에 참여한 노기 마레스케 장군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신사이다. 재미있게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조선인 독립운동가인 안중근을 기리는 신사도 있는데, 이는 안중근이 이 지역에서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노기 마레스케와 안중근 모두 다롄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신한도

243만 9,000여명이 거주하며, 비교적 최근 개발된 배드타운 겸 신도시 지역이다.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기 전에나 받은 이후에나 농촌 지역이었고 북쪽의 유쿠아메구를 제외하면 변변한 도시조차 없었다. 실제로 1976년 인구 조사에서 전체 다롄 인구중 겨우 12%정도만이 이 지역에서 거주했고, 다롄의 모든 지역중 중국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하지만 198~90년대 이후 다롄 신시가지와 뤼순의 인구 수용 능력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1988년부터 대대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인구가 100만명을 넘어섰고, 2020년대인 현재에는 인구 증가 속도가 매우 빨라 조만간 뤼순 관구의 인구를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신도시인만큼 농지도 많아서 다롄에서는 잘 보기 힘든 전업 농부들도 많이 보인다. 또한 지나치게 복잡하고 시끄러운 다롄 시내를 떠나, 아예 조용하고 물 맑은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는 노인들에게도 각광받는 거주지이다. 집값도 다롄, 뤼순에 비해 낮아, 지갑 사정이 여이치 않은 직장인들이 이곳에 많이 거주한다. 2000년대에는 늘어나는 인구수에 대비하여 관광 시설, 유흥 시설이 적다는 문제점이 재기되었으나, 2010년대 이후로는 신시가지나 뤼순만은 못하더라도 높은 생활의 수준을 누릴 수 있을만큼은 유흥 시설이 많이 들어섰다.

다롄을 통틀어 가장 관광할 곳이 없는 곳이다. 그도 그럴것이 청나라, 일제시대에는 쭉 농촌 지역이었던데다가, 개발 자체도 겨우 30여년 전에야 이뤄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는 중국어 화자들이 꽤나 많아서[4] 신한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두고 "명예 중국인"이라고 놀리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인지 선거를 해보면 가장 친중파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지역이 바로 다롄인데, 건제파가 전멸한 제13회 다롄 입법회 총선거2020년 다롄 구의회 선거에서도 신한도에 속하는 히시카가와구유쿠아메구에서만큼은 건제파가 앞섰다.

이런 불명예스러운 별명 및 관광 시설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본토에서 떨어져있는 작은 섬인 쇼도시마구는 한국의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다롄인들에게 이색적인 관광지로 꼽힌다.

행정구역

다롄 특수행정구
21자치구 5군주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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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의 행정구역은 총 21개의 자치구와 5개의 군주둔특구로 나뉘어져있다. 다롄의 지역 구분은 크게 3개로 나뉘어지는데, 다롄 관구, 뤼순 관구, 신한도 관구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임의적인 구분일 뿐이며 실질적으로는 21개 자치구가 최고 단위 행정구역이다.

21개의 자치구는 구의회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다. 구의회는 전적으로 지역구 의원들로만 구성되며, 의석수는 인구에 비례해 약 10,200명당 1석이 배정된다. 구의회에서 과반을 차지한 정당에서는 구청장을 선출하며, 구청장이 약 3년간 구정(區政)을 이끌게 된다. 구의회는 3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구의회 선거로 선출되며 가장 최근의 선거는 2020년 다롄 구의회 선거였다. 보통 구의회 선거는 입법회 총선거와 같이 치룬다. 단임제인 다롄 특수행정구 행정장관 직과 달리, 구청장은 몇번이고 연임이 가능하다.

일반 구와 달리 군사가 주둔하여 민간인의 거주 및 출입이 통제된 지역도 존재한다. 이 지역은 총 5개이며 각각 러시아 연방군, 중국 인민해방군, 중화민국 국군, 대한민국 국군, 일본 자위대가 주둔하고 있다. 이 지역의 통제권은 전적으로 해당 지역에 주둔하는 군에게 있기 때문에, 같은 다롄에 속하지만 사실상 다른 나라나 다름이 없다.

정치

행정장관


다롄 특별행정구 행정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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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 입법원

중국과의 관계

경제

통화

사회

민족

중국인

만주인

조선인

일본인

러시아인

종교

문화

주요 시설

영화

스포츠

외교

다중 관계

다일 관계

다러 관계

다한 관계

다북 관계

기타

대중 매체에서

각주

  1. 이중에서는 일본어가 가장 많이 쓰이며, 전체 화자의 86.4%가 일본어를 할 수 있다. 다른 언어를 일상어로 쓰는 화자더라도 다른 민족이나 공적인 자리에서 대화할때는 보통 일본어를 사용한다.
  2. 2003년 일본 식민통치에 대한 의견: 부정적 22.5% / 중립적 57.1% / 긍정적 20.4% → 2021년 일본 식민통치에 대한 의견: 부정적 16.4% / 중립적 31.1% / 긍정적 52.5%
  3. 미군이 주둔하던 한국령 다롄은 1952년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멸망하여 북한의 영토로 간주되었다.
  4. 다롄 신시가지 내에서 중국어를 일상어로 쓰는 인구 비율은 4.3%인데 반해 이 지역에서는 30.3%나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