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광무유신)/역사

개요

대한국 (광무유신)의 역사

칭제건원과 광무유신

광무제 고조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조는 연호를 광무로 개정하고 이후 국호를 대한으로 제정하였다. 뒤이어 10월 12일, 옛 남별궁 터에 건설된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한국사 최초의 황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제국을 선포한 고조는 구본신참의 기치 아래 '광무유신'이라고 불리는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반도의 이권을 두고 벌어지는 일본과 러시아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 결국 1904년 일본의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대한국은 이미 전쟁 발발 1개월 전, 공식적으로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동맹조약을 강요하며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그러나 전쟁 종결을 위해 채결된 포츠머츠 조약을 통해 한국의 중립국 지위가 인정받게 되면서 일본의 시도는 무산되었고, 한국은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 원할하게 개혁을 진행해나갈 수 있었다. 중앙은행의 설립과 전국적인 토지 조사를 통해 재정을 확충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도로와 철도, 공장을 설립하였으며,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세웠다. 또한 프랑스 고문단을 초빙하고 징병제를 도입하는 등 군제 개혁을 진행하였으며 중국과의 분쟁지역이였던 간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 병력을 파병하는 등의 성과를 내었다.

105인 사건

그러나 이러한 개혁들은 강력한 전제군주정 체제 아래에서 진행된 것이였다. 1899년 개화 지식인들에 주도 하에 설립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의회설립과 정치개혁을 주장하였으나 황제와 보수파의 방해로 인해 좌절되었다. 독립협회 해체 이후 여러번의 재건 시도는 실패하였고 1913년 비밀결사 신민회의 회원이었던 안명근이 친위사단 장교들과 정변을 모의하던 사건을 계기로 개화적인 지식인들이 대거 체포당하는 '105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입헌군주제 운동은 침체기에 들어갔다.

3.1 운동과 융희헌정

3.1 운동

1919년 1월 21일, 광무제 고조의 붕어 이후 순종 융희제의 즉위가 이루어졌다. 융희제는 지식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제정치를 고수하였고, 작년부터 시작된 스페인 독감의 유행과 조정의 무능한 대체는 민심을 크게 악화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신교계가 주축이 되어 민권과 입헌정치를 요구한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시위는 한성을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나 황제와 수구파 대신들은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탄압을 가했다. 그러나 친위 사단의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시위 진압에 대한 불만이 퍼져나갔고, 참령 신팔균을 중심으로 한 비밀조직 '유신동지회'가 탄생하였다. 이들은 5월 21일 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축출하고 민영환을 의정으로 한 개화정부를 출범시키게 되었다.

융희제 순종은 태생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데다 독살 사건까지 겪은 탓에 제대로 된 정무를 수행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역설적으로 이는 국무대신들과 의회 주도의 입헌정치를 가능케 하였다. 순종은 1926년 52살의 나이에 요절하게 되지만, 그의 뒤를 이어 위한 태시제 영종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인물이었고 입헌 정치를 지지하였기에 이러한 기조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한편 의회가 설립되면서 정당들 또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회 민원선을 기준으로 원내에 입성한 정당들은 윤치호가 이끄는 헌정당과 자유주의 성향을 띄는 이승만-박용만의 자유당, 보수적인 관료들과 유림들의 충군당, 천도교의 진보당 등이 있었다. 1924년 2회 민원선과 함께 민영환이 의정대신을 사직하고 헌정당의 총재 윤치호가 의정대신으로 임명되면서 최초의 정당내각이 수립되었다.

대공황과 경제혼란

광무유신 이래 지속된 식산흥업 정책은 2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광업과 방직업을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상공업은 근대적 자본가와 노동자 계층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20년대 후반부터 점차 경기가 침체되면서 노동자와 소작농들의 처우는 열약해졌으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가 널리 퍼져나갔다.

1929년에는 국내 최초의 대규모의 파업이자 노동투쟁인 원산 총파업이 일어났고, 곧이어 미국 발 대공황까지 일어나면서 대한의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윤치호의 뒤를 이어 취임한 의정대신 박영효는 자본가와 대지주의 편에 서 노동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고, 1930년엔 보안법을 제정하여 급속도로 퍼져나가던 사회주의 사상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경제 악화의 책임을 지울 수는 없었고 결국 1931년 선거에서 야당이던 자유당에서 과반의 의석을 내주며 대한국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자유당 정부는 소작료 인하와 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힘쓰며 보통선거법을 통과시키는 등 자유주의적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복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는데 1933년 국제연맹의 일본 규탄 성명에 대한 찬반을 놓고 의정대신인 이승만과 내부대신 박용만과의 갈등이 발생한 것이였다. 이로 인해 자유당 정부는 분열되었고, 의정 이승만은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실시하지만 과반 확보에 실패하여 정권을 다시 내놓게 되었다.

새로 들어선 의정 안창호의 헌정당 정부는 여러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5회 민원선 이후 새로 떠오르던 여운형의 인민당과 자유당이 연립정부를 출범시킴으로써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2차 세계대전과 항일투쟁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우 사건을 발단으로 중국과 일본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반도 주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자 이승만 정부는 중립을 고수하는 한편 군비를 증강시키며 국방력 강화 정책을 펼쳤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되었고, 일본은 대소전을 위해 한반도의 점령이 필수적이라고 판단. 한국 영토에 대한 자유로운 이용권을 요구하였다. 정부는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결국 1941년 7월 28일, 일본의 침공으로 한일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군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2개월만에 전 국토를 점령하였다. 이후 영종 황제와 정부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하였고, 국군 패잔병들과 민중들은 의병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국토를 점령한 일본은 군정을 실시하였고, 친일 인사들을 포섭하여 괴뢰정부 수립을 준비하였다. 1942년, 의정 윤치호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정부가 세워졌다. 괴뢰정부는 식량과 자원의 공출을 실시하고 연합군에 선전포고를 하는 등 일본의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종혁 장군이 이끄는 대한 광복군을 중심으로 13도 전국의 의병들은 연합하였고, 미 OSS의 지원하에 한성진공작전을 계획한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이 예상보다 앞당겨지는 바람에 이 작전은 패망 이후 실시되었다. 또한 노동당 출신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은 매국노와 일제 고위층에 대한 암살 활동이나 주요 시설에 대한 파괴 공작을 수행하며 일제에 맞섰다.

전후 정치와 자유당 독재

일본의 패망 이후 망명해있던 황제와 정부대신들은 귀환하였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후 1946년 제7회 민원선의 실시와 함께 미소 양군은 철수하였다. 소련군의 주둔 기간 동안 좌익 세력은 정부의 탄압 없이 이북 지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고, 새로 창설된 한국공산당은 40석이 넘는 의석을 차지하였다. 좌익의 약진에 위협을 느낀 자유당은 같은 우익정당인 헌정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하였고, 이에 반발한 인민당이 공산당과 연대하면서 좌파와 우파간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1948년, 공산당 급진파에 의해 인민혁명군 사건[1] 이 일어나면서 공산당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1950년 치뤄진 선거에서 자유당이 단독과반을 확보하며 압승하게 되었다.

자유당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입법하여 좌익세력을 탄압하였고, 중국 대륙 공산화에 대항하여 미 군사고문단 초빙과 원조협약 체결을 통해 국방력 강화에 나섰다. 이러한 정책들은 1952년 발발한 간도사변[2]으로 인해 전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1954년 민선에서 압승을 거두는 등 자유당의 승승장구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50년대 후반부터 경제가 침체되었고, 자유당 인사들의 비리 스캔들이 터지면서 위기에 직면하였다. 결정적으로 1958년 민선에서 내부대신 이기붕 등에 의해 부정선거가 자행되었음이 밝혀지자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자유당 정부는 붕괴하고 이승만 의정은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군사정변과 군부정권의 수립

다시 치뤄진 선거 결과 조봉암이 이끄는 인민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조봉암 정부는 현대적인 입헌군주제로의 개헌과 국가보안법 폐지, 토지개혁 등 여러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반공 정책 폐기와 군축으로 인해 우익과 군부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중립화 정책을 표방함으로써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정치갈등의 심화와 데모, 파업의 폭증으로 사회의 혼란은 가중되었고 결국 1959년 육군참모총장이였던 이범석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에 의해 조봉암 정부는 붕괴하였다

  1. 공산당원인 김일성, 김책 등이 좌익 성향의 장교와 하사관, 사병들을 포섭하여 인민혁명군을 결성해 군사반란을 꽤한 사건.
  2. 중화인민공화국이 간도 지역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국지전으로,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의 침략을 저지함으로써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