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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國
대한국
국기 국장
표어 광명천지
국가 애국가
수도 경성부 북위 37.568889° 동경 126.976667°
정치
공용어 한국어, 한국 수어
황제 이현
영상 홍준표
역사
개국 1392년 8월 5일
 • 익종경장 1839년 10월 4일
 • 홍범 제정 1871년 5월 15일
지리
면적 290,500㎢ (75위)
내수면 비율 0.4%
시간대 UTC (UTC+9)
DST 없음
인구
2016년 어림 121,571,582명
2015년 조사 121,515,399명 (12위)
경제
GDP(PPP) 2016년 어림값
 • 전체 5조 742억 $ (3위)
 • 일인당 39,254 $ (29위)
명목 4조 9429억 $ (2위)
HDI 0.901 (18위, 2016년 조사)
통화 대한국 양 (KRY) (화폐 단위:¥}
기타
ISO 3166-1 410, KR, KOR
도메인 .kr / .한국
국제 전화 +82


대한국(大韓國, 영어: State of Korea, 약칭으로 한국(韓國), 대한(大韓))은 동아시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국가이다. 서쪽으로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제국이, 동쪽으로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이 있고, 남쪽으로는 남해를 사이에 두고 대만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만주국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경성부이며, 국기는 태극기, 국가는 애국가, 공용어는 한국어이다. 공용 문자는 한자와 언문이다.

대한국은 급진적으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인 익종경장으로 부국강병에 주력한 결과 근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두 차례의 한·순 전쟁과 한·러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영주·남유구를 흡수하는 한편 타이완·만주·제를 경략하였다. 1940년대 오월에 침략에 대응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참전하여 승리하였다. 이후 김일성의 난을 겪었지만 한강의 기적이라는 높은 경제 성장을 구가하며 1980년대에 세계적인 일류 선진 강국으로 거듭났다.

국호

정식 국호는 대한국(大韓國, State of Korea)으로, 익종경장 이후 천자국임을 선포함에 따라 천조만이 가질 수 있었던 외자 국호를 선포하였다. 또한, 한(韓)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삼한을 아울러 이어 받는다는 의미이다. 자부심차게 부르는 별칭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인데 식민제국 시절에 두루 사용되었고 현재에는 과거에 건설한 식민제국을 일컫는 역사적 용어로 주로 쓰인다. 다만, 외국과의 스포츠 경기 관람 시 등 이따금씩은 제국이라고 호명할 때가 있다. 줄여서 한국(韓國)이라고 하며, 정식 국호에 정치체제를 표시하지 않은 것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전통이다.

역사

근세 전기

세종대왕은 수리시설 증대로 수자원을 확보하고, 개량한 수차와 우수한 벼 품종을 보급하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서를 배부하는 한편, 이앙법을 장려하여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였다.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자 인구밀도도 증가했고, 그에 따라 상품작물의 재배가 등장하고 상·공업이 진흥되는 등 산업의 총체적인 분야에 전방연쇄효과(前方連鎖效果)가 나타났다.

산업 발전에 따라 국부가 증대되었다. 마침 관세가 도입되어 세입도 확연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여유를 바탕으로 조정은 기반 시설 건설, 광산 개발, 국방력 강화에 나서게 되었다. 한편, 명의 쇠퇴로 제한이 없어져 은화·동화 등을 주조할 수 있었다. 여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유황을 채굴하여 화약 병기를 개발하고, 야금술 등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

세종대에 얻은 4군 6진에 삼남인들을 지속 이주시켜 이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또한, 여진을 우리나라에 종속화시켰다. 제주도에 중앙 권력이 미치게 하고, 영주, 벽랑 등 남방도서들을 본격적으로 개척하였다. 유구와 대마도를 복속하기도 하였다. 강성해진 국력과 명의 쇠락에 기초하여, 외왕내제 체제가 중종대에 이르러 공고화되었다.

근세 후기

조정은 국초(國初)부터 여진과 왜의 침략에 대비하여 강한 군사력을 다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삼포왜란의 경험과 히데요시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한다는 통신사의 증언을 계기로 일본에 대한 방비를 강건히 하였다. 일본군은 조총을 앞세워 쳐들어 왔다(임진왜란, 1592). 하지만, 이순신 제독의 보급로 차단과 북방군의 남하에 고전을 겪었다.

일본군은 마침내 신립에게 격멸 당하여(조령 대첩), 우리나라와 강화하기로 하였다. 이후 도요토미 씨가 몰락하고 에도 막부가 수립되어, 한·일 양국은 국교를 재개하게 되었다.

애신각라 씨는 여진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운 후 내부 사정을 타개하기 위해 한반도를 침략했다(정묘호란, 1627). 한성부로 직행한 3만 호병(胡兵)은 서북군과 동북군에게 퇴로가 차단 당했고, 삼남군과 경사군이 조총 등 신무기를 동원하여 후금군을 격퇴하였다. 후금은 멸망하고, 해서 여진의 엽혁나랍 씨가 만주국을 건국하였다.

효종대에는 헨드릭 하멜이 제주에 표착한 사건을 계기로 네덜란드와 군산에서 제한적인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나전칠기·도자기·홍삼·차·화문석 등이 서구에 소개되었고, 네덜란드를 통해 천리경·의학 같은 서구문물이 유입되었으며, 구황작물이 도입되어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영·정조대에 탕평책을 실시하여 정국이 안정되었으나 붕당이 해체되고 척신들이 득세하여 정조 사후 세도 정치가 발현하게 되었다. 김조순은 뛰어난 정치가였지만, 그 아들 대부터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국정 농단이 벌어졌다.

익종 시대(1834~1860)

1832년, 영국 상선 로드 애머스트 호가 개항을 요구하였다. 장동김씨 정권은 이에 응하여 부산항을 개방하였으나 사실상 그 이익은 교역 주관 기관인 순도서(巡渡署)를 장악한 세도 정권이 독점하였다.

한편, 네덜란드와의 무역 창구로 자리잡고 있었던 군산항을 중심으로 호남, 그리고 영국에의 개항장이 된 부산항을 중심으로한 영남에서 선진 문물에 감화된 선비들이 개화파를 형성하는데, 각각 호남학파와 영남학파가 탄생하였다. 장동 김씨 정권의 이익 독점 행위에 분노한 유사(儒士)들은 세도 정권을 본격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화세족(京華世族)이 조정을 장악한 형국에서, 벼슬길이 막힌 지방 사림은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고, 이는 장동김씨 정권 타도로 폭발하게 되었다. 1830년대 중반, 개화파 유생들의 공론은 '타도 세가(勢家)'였다.

호남학파와 영남학파는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개화를 이끌어 갔는데, 1839년 몰락한 양반 출신의 상인인 사마용(司馬龍)의 주선으로 양남동맹(兩南同盟)이 결성되고, 양남만인소(兩南萬人疏)가 성공하면서 세도 정권은 몰락하고, 임금 중심의 새 정부가 들어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였다(익종경장, 1839).

익종은 경장 공신들의 주청에 따라 1842년 연호를 경덕(景德)으로 고치고 새로 환구단을 건립한 뒤 황제에 즉위하여 천조(天朝)인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신 정부는 유럽과 미국에 견양사(遣洋使)를 비롯한 사절단을 파견하여 신문물을 습득하게 했다. 신분제를 철폐하고, 도시개조사업과 철도 부설을 전개했다. 또, 금본위제로 통화 개혁을 하는 한편, 문란해진 조세 제도 및 병역 제도를 바로 잡았고, 상공업을 장려했다. 또, 근대식 학교를 세우고 다양한 서양 문물을 도입하였다.

도(道)를 폐지하고 전국을 40여 개의 군(郡)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그간 중앙 행정력이 미치지 않았던 영주 지역에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할령으로 했다. 유구를 일본과 분할하여 남유구에 유구 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대만까지도 통치권에 편입하였다.

헌종 시대(1860~1871)

근대화에 성공한 한국은 영토 확장과 대외 진출에 힘을 쏟았다. 만주국에 대해서는 1860년 한·만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개항시키고, 보호국으로서의 만주국의 지위를 공고화하여 이를 경략했다. 철도를 부설하여 만주에서 생산된 철강 등의 자원을 한반도로 수송했고, 이는 근대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1964년에는 제(齊) 칭타오 앞바다에 군함 경동호를 보내 무력시위를 벌이고, 교주 조약을 맺어 개항시켰다. 한국은 한·만수륙무역장정과 교주 조약 체결을 계기로 순과 마찰을 빚었다. 순과의 갈등이 깊어지자, 한국은 군비를 확장하고 꼼꼼하게 전쟁을 준비하였다.

한국인 상인이 순나라 경내에서 살해당한 것(연경 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으로, 당시 박규수 황각(黃閣)은 순에 국군을 파견하여 한·순전쟁을 일으켰다(1871). 전쟁은 근대적인 신무기를 동원한 한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맺은 제물포 조약으로 한국은 순에게 본래 순의 제후국이었던 제의 순으로부터의 독립을 확보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다. 한·순전쟁의 승리로 한국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였다.

고종 시대(1871~1919)

러시아는 만주를 탐내어 한국과 갈등을 빚었다. 한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여 전쟁 대비에 힘을 쏟았다. 백성들의 반러 감정은 들끓었으며, 동일하게 러시아의 남하를 주시하던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마침내 한국은 해삼위에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한·러전쟁을 일으켰다(1881년).

대한해협에서 이순선 제독의 활약으로 러시아 발틱 함대를 크게 무찔렀다(동해대첩). 이외에도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가 한국 쪽으로 기울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의 중재로 한국과 러시아는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만주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되었고, 화북에서의 우선적 이익 확보를 보장받았다. 이후 한국은 만주국을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제와 갑신조약(1884)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식민지로 만들어 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유럽 상품을 대신하여 아시아 시장에서 면직물 등의 한국 상품이 우세하게 되어 무역은 앞도적인 수출초과가 되었다. 또한, 유럽 지역으로 군수품을 수출하여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무기 수출국이 되었다. 유럽에 선박이 부족해지면서 세계 제3위의 해운국으로 거듭나는 등 해운업과 조선업도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나아가 제철업과 화학 공업까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렇게 공업 발전이 이루어져 경기 호황이 지속되자, 농산물의 수요가 늘어 농촌 경제도 크게 성장하였다. 농촌의 주택들이 현대식으로 개량되고, 마을 길이 정비되고, 전기가 설치되는 등 농촌에서도 경제 발전의 혜택을 누리기 시작하였다.

순종 시대(1919~1926)

산업화와 대외 팽창을 거치며 국가가 부강해지고 민중의 정신적 수준이 향상되었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반부터 순종 황제 때까지 정치·사회·문화 각 방면에 걸쳐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융희 데모크라시). 그 결과 정당 정치가 근대화되었고, 보통 선거 실시로 민주 정치가 진일보하였으며, 사회주의 운동도 본격화되었다.

교육과 학문 면에서도 큰 변화가 있어, 의무 교육과 대학 교육이 확대되었고 자유 분방한 예술 활동이 보장되었다. 민본주의가 제창되고, 정도전과 정여립이 재평가 받았다.

1920년, 국군이 개봉에서 순과 충돌하여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개봉 사건). 한국은 해군을 동원하여 천진항을 포격하고, 연경을 점령하는 등 전면적인 공세에 나섰다(제2차 한·순전쟁). 압도적인 전력 차로 승리한 한국은 전후 처리를 위해 순과 군산 조약을 체결하여 화북에서의 이권을 확보하였고,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다(1922). 제2차 한·순 전쟁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은 순은 결국 1924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멸망하고, 대순 사회주의 연방이 수립되었다.

무종 시대(1926~1970)

대공황의 영향으로 소비가 위축되고 생산이 급감하고 실업이 급증하는 등 내수기반이 붕괴되자, 한국은 심양 협정을 맺어 보호령과 식민지를 규합해 양(兩) 블록을 만들어 대처하였다. 그리고, 수입품을 규제하기 위해 높은 관세 장벽을 쌓게 되었다. 이러한 블록 경제로 잠시나마 안심할 수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경제 침체를 가속하는 요소가 되었다.

경제 침체로 인해 사회가 불안해진 오월에서는 장개석의 국민당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아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국민당 정권(국부)는 1941년 범중화주의를 내세워 중화민국을 선포하고 한국령 제·만주와 일본령 민을 침공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이 오월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이로써 동아시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오월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한·일 동맹이 결성되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한국이 산해관 대첩에서 오월군을 물리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후 한·일 연합군은 화북에서 오월군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제를 해방하였다(1943). 이어 복주 상륙 작전을 펼쳐 민을 해방하였다.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국민당 정부는 서쪽으로 파천하기 시작하였다. 한·일 연합군은 서안, 중경을 거쳐 성도까지 파천한 국민당 정부를 포위하고, 파촉 분지를 공습하였다.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고 포위가 장기화되자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에 대한 서촉 인민들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에, 국부군 서덕변 이급상장은 쿠데타를 일으켜 장개석을 실각시켰다(을유혁명, 1945년 8월 14일). 이어 장개석을 능지처사하였다. 국민당 정부를 통제하게 된 서덕변은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한·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만주에 공산 국가가 수립되자 국내에서는 공산주의가 빠르게 스며들었고, 김일성 등 공산당 계열 군인들은 소련과 순, 만주의 도움을 받아 반역을 모의하였다. 1950년 6월 25일, 공산당 반도(叛徒)들이 평양을 점거하면서 반란이 시작되었다(김일성의 난).

이승만 황각은 일단 황실을 모시고 파천한 후 미국과 일본에서 급파한 원군과 힘을 합하여 공산군을 물리쳤다. 순·만주의 개입으로 후퇴하기도 하였지만 우세한 전력을 바탕으로 반란군을 토멸하였다. 이후 반공주의가 확산하게 되었다.

이승만 황각은 장기 집권과 독재를 꾀하였다. 이승만 황각과 여당인 자유당은 총선거 승리를 위해 온갖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기해부정선거, 1960). 선거 당일부터 마산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 도중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4월 19일, 경성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부정 선거에 하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포졸들이 행진하는 시위대에 총을 쏘아 1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4월 25일에는 유림 대표들이 황제에게 이승만의 탄핵을 상소하였다. 마침내 다음 날 이승만은 영의정의 직책에서 물러났다. 기해의거는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부패한 장기 독재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한국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승만 황각 붕괴 후 실시된 총선거에서 민본당이 크게 승리하여 장면을 영의정으로 하는 의정부가 출범하였다(1960). 기해의거 이후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정치·사회적 요구가 터져 나왔다. 학생 운동은 물론 농민 운동, 노동 운동과 같은 대중 운동도 일어났다. 그러나 장면 황각은 대중의 각종 요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국민의 반발을 샀으며, 부패하고 무능하여 반정부 여론이 들끓었다.

1961년 5월 16일, 민본당 황각의 실정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수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무사들이 반공과 경제 재건을 '구국 공약'으로 내세우며 무신 정변을 일으켰다(경자정변). 무인 정부는 모든 정당, 사회단체와 국회를 해산하고 방국재건기무도감(邦國再建機務都監)을 만들어 군정을 실시하였다. 방국재건기무도감은 재상 중심제로 홍범(洪範, 헌법)을 개정하였고, 이어 승상에 박정희가 선출되었다.

박정희는 경제 부흥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제2차 세계대전과 김일성의 난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해결하고, 우리 경제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시켰다.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정책으로 한국은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매년 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 대국으로 거듭나갔다. 또, 산업 구조의 고도화가 추진되면서 무역 수지 흑자에 힘입어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게다가, 근면·자조·협동의 3대 원칙에 기초한 농촌 근대화 운동인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여 도시보다 낙후된 농촌을 개발하고 개선하고자 하였다. 새마을운동의 성과로는 하천정비·교량건설·수리시설확충·농경지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기틀 마련, 농어촌 전화(電化), 농가소득 증대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커다란 치적을 바탕으로, 박정희는 상국(相國)이 되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엄청난 권력을 누렸다.

한편, 박정희 황각(黃閣, 의정부)은 미국의 요청으로 국군을 월남에 파병하였다. 한국군의 참전은 동아시아에서 한국·미국·일본을 중심으로 한 반공 연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전쟁 기간 중 한국 기업이 월남에 진출하고 한국 상품이 수출되면서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다. 그러나 월남 파병으로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희생되었다.

혜종 시대(1970~2005)

박정희 황각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회를 해산하고 또다시 홍범을 개정하였다(임자변법, 1972). 변법 홍범은 재상을 어민공동회(御民共同會)에서 선출하게 하고, 승상의 연임을 제한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승상(상국)의 영구 집권이 가능해졌다. 또한, 승상에게 긴급 조치권이라는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다. 이후 변법 체제에 반대하는 시위와 개헌 청원 상소가 전개되자, 박정희 황각은 잇달아 긴급 조치를 발표하며 이를 탄압하였다.

1979년에는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유생들과 시민들의 만인소가 일어났다(부·마만인소). 박정희 황각은 비상계엄과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던 중 권력 내부의 갈등이 일어나, 박정희가 판상무원사 김재규에게 시해됨으로써 변법 체제는 막을 내렸다(순화방의 변)

순화방의 변 이후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아졌다. 하지만,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기미군란, 1979.12.12). 1980년 5월, 대학생들이 신군부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신군부는 이를 구실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였다.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조치에 맞서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었다. 신군부는 5월 18일부터 공수단을 투입하여 광주 지역의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이에 분노한 광주 군민들은 시민군을 결성하여 계엄군에 맞섰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광주군청에서 저항하던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광주항쟁).

민주화 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민주화를 주장하던 교수와 언론인, 교사 등을 해직하였다. 또한, 홍범을 개정하여 전두환이 선거원(選擧院)의 간접 선거로 임기 7년의 승상에 당선되도록 하였다. 전두환 황각은 민주화 운동을 강력히 탄압하는 한편, 과외 금지, 중·고등학생의 두발과 교복 자율화, 야간 통행금지 해제 등의 정책을 통해 국민의 마음을 얻고자 하였다.

1987년 승상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학생, 시민은 승상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6월 10일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를 규탄하고 개헌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전국에서 동시에 열렸다(정묘항쟁).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자, 황각과 여당은 이에 굴복하여 승상 직선제를 수용하였다(정묘민주화선언).

직선제 개헌 이후 실시된 승상 선거에서 야당의 분열로 여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노태우 황각은 경성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공산 국가들과의 국교 수립에 적극 나섰다. 또한, 당시 국회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 광주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고 전두환 황각의 비리를 조사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었다.

1990년, 노태우의 안국당, 김영삼의 위민당, 김종필의 신협화당이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합당하여 보국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총선거에서 승리하여 과반 의석을 차지한 보국당은 김영삼을 영의정으로 추대하였다. 문민 황각을 표방한 김영삼 황각은 금융 실명제를 도입하고, 지방 자치 단체장·의회 선거를 실시하여 본격적인 지방 자치를 복구했다.

1997년 총선거에서 민본당이 집권하여 김대중이 영의정에 선출되었다. 60년 만에 여·야 간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국민의 황각을 표방한 김대중 황각은 왕정이 복벽된 만주와 경제 협력 사업을 벌여 경제 성장을 도모하였다. 민본당이 재집권하고, 노무현이 영의정을 맡게 되었다. 참여 황각을 표방한 노무현 황각은 시민 사회와의 소통에 힘썼다.

상지재위(上之在位, 2005~)

2007년 총선거에서 보국당이 승리하여 이명박 황각이 집권하였다. 이명박 황각은 2008년 금융 위기에 성공적으로 대처하였고, 사대강 사업을 추진하여 녹색 성장을 주도하였다. 또한, 전통적 우방들과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뒤를 이은 박근혜 황각은 테러방지법을 제정하여 국제적으로 증가하는 테러리즘의 위협에서 우리나라를 지키려고 하였다.

2017년 총선거에서 보국당이 또다시 승리하여 홍준표 영의정이 집권하였다. 홍준표 황각은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서민에게 희망 기회를 준다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하였다.

정치

행정구역

국방

사회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