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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大韓
국기 국장
天下之所可畏者。唯民而已。
천하에 두려워할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상징
국가 애국가
국화
무궁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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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정변 광해군 10년 8월 24[1]
임오혁명 연잉군 38년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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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한성
최대 도시
한성
면적
약 25만 km²
내수면 비율
약 3%
접경국
중화민국, 관동 공동통치령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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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51,000,000명
밀도
약 200명/km²명/km2
민족 구성
대한인
공용어
대한어
공용 문자
국문(國文)
종교
국교
민본주의
분포
유교, 불교, 도교 외.
군대
대한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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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 도
5개 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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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민본집중제 결사주의
국가 원수 (대왕)
인안대왕(仁安大王) 이강(李堈)
정부
요인
영중추부사
허균(許筠)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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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결사주의
화폐
공식 화폐
문(文)
ISO 4217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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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LD
'
국가 코드
'
전화 코드
'


개요

동아시아의 주요 3국은 각각 종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삼국 중 가장 오래된 용인 허균이 영중추부사 직위에 올라 국가를 운영하며 <조선혁명론(1923, 신채호)>에 의하면 이전의 봉건적 국가에서 벗어나 용에 의해 혁명하게 되는 것으로 동아시아는 근대화되었는데, 이러한 균형이 조선에서는 더 빠르게 나타나 현재의 형태에 올랐다고 평가된다.

서구적 사회주의의 기타 잇키나 동서양의 혼합을 만들어낸 쑨원과 다르게 고전적인 동양의 주의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허균 또한 서학을 조선에 처음으로 수입한 인물이나 허균의 자유주의적 사상 하에서 천주교의 자기중심적 사상은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은 동양적인 철학으로 이끌어졌다.

특히나 허균은 국가원수 혹은 대리인을 존중하는 경향이 강하여 학살과 같은 과도한 대응까지만 가지 않는 한에서 서학의 박해를 방관하였다.

쑨원의 경우 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하고 기타의 경우 천황을 도구로 활용하는 것과 대비되는 모양새이다.

상징

국호

대한(大韓)은 엄격하게 국호를 성문화하여 정하지 않았다. 조선이 천자국을 선포하며 삼한의 후예이므로 국호를 한(韓)으로 정하였으나, 이러한 것이 명확한 헌법의 체계로 고정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대한, 대한제국, 대한국, 한국, 한나라, 한조 등의 다양한 명칭이 활용되나, 외교 관계에서 대한을 국호로 대표하고 국내의 문서에서 대한을 기본으로 활용하는 바, 사실상 정식 국호는 대한이라 할 수 있다.

국기

대한의 국기는 이씨 왕조의 어기를 기반으로 한다.

민간에서는 흰 배경에 팔괘와 간단한 태극을 그려낸 깃발을 사용하기도 하나, 외교적 상황에서는 어기를 기반으로 활용한다.

융희대왕이 토대를 잡아 반포를 준비중인 국제에서는 민중의 깃발을 국기로 결정해두고 있으나, 현재는 어기를 국기로 활용하고 있다.

국장

명확한 국장은 없다. 그러나 우표 등에서 활용하는 태극을 실질적 국장으로 삼아서 활용하고 있다.

국새

무오정변 이후 허균의 개혁안에 따라 세종의 정음을 활용해 국새를 만들었다.

이러한 전통에 이어 칭제 이후에도 국새는 정음으로 적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역사

무오정변

광해군 10년 8월 24일, 허균의 정변이 성공해 조선은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했다.

대한의 역사는 해당 개혁 인해 이전과 크게 급변했다. 성리학적 질서에 따라 다른 종교를 억압하던 기조는 해제되어 사상/종교의 자유가 실현된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민본주의가 더욱 강화되었으며 교육 체계를 바탕으로 이전에 신하들이 국왕을 견제하던 것을 더욱 확장해 민중이 대소신료와 국왕을 견제할 수 있는 체계가 자리잡았다.

성문화된 법안은 아니나 장기적으로 수 세기에 걸쳐 강화된 조선의 교육은 중국과는 독립된 국가 운영 방침을 형성하고 빠른 민족의 형성을 불러와 근대화를 앞당겼다고 평가받는다. 독재 체계임에도 국민들을 계몽시키고 자신에게 맞서도록 성장시켰던 허균의 모습이 짙게 드러난다.

임오혁명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에 의해 장종(莊宗) 당시 세자가 피살당하여 경종 독살설 등으로 여러 추문이 돌던 상황에 악화를 들이부었다. 환국 등으로 인해 계급제 사회에 대한 비합리성을 민중이 인식하게 되면서 이러한 사회를 타파하고자 하던 운동이 실질적으로 부상했다.

유교를 국교에서 박탈한 후에도 기본적으로 남아 있던 조선인의 유학적 문화는 임오화변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중을 중심으로 퇴폐한 지배 계급을 개혁하는 일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허균이 작성한 조선혁명론에 기반을 둔 학자들과 다양한 학문을 접한 양민 지식인층의 반란은 진압되지 않았고 혁명은 발발했다.

연잉군은 유폐되었으며 행사하지는 않았으나 권한을 가지고 있던 허균 또한 권한을 박탈당했다.

마침내 조선이 민본 국가가 되는구나.
蛟山 許筠(교산 허균)

자연 환경

인문 환경

행정 구역

정치

사법

헌법

광무대왕 고종 이형(李㷗)과 융희대왕 순종 이척(李坧)으로 이어지며 고종의 개방정책과 흥선군에 대한 반발로 형성된 광무 자유주의를 통제하기 위해 홍범(洪範)이 작성 중에 있다.

광무대왕이 설치한 홍범상정소(洪範詳定所)에서 작성을 시작하여 고종 19년 임시로 광무 홍범을 발표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광무 홍범은 대략적인 수사만이 존재하여 실질적 효과는 전무하다.

광무 자유주의 시대에 급진파에게 광무황제가 피살된 이후, 새로 작성된 융희 홍범은 작성 후 발표되지 못하였으며 인안 홍범이 작성 중에 있다.

경제

군사

대한은 정규군인 대한군과 민병대 창의군(倡義軍)으로 나뉜다.

창의군은 중앙에서 관리하며 관의 허락 하에 지방 유생이나 지식인 등이 격문을 돌려 모집한다. 그러나 임오혁명 등 관의 허가 없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창의군은 그 뜻을 파악하고 동참과 불참을 결정한다.

  1. 양력 10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