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티나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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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제국
大華帝國
Louis Empire (LE, EL)
국기
국장
역사 건무 건원 1855년 4월 13일
제국 성립 1855년 6월 11일
흥종 즉위 1865년 11월 3일
대화국 국례 반포 1873년 8월 18일
제1차 만민대전 참전 1888년 3월 4일
인화 왕국 정벌. 1891년 12월 6일
수도 화원(和原)
최대도시 민령부(旻寧部)[1]
면적 123,231 ㎢[2]
인물
황제
성조 건무제[3]
헌종 숭익제
흥종 광성제
철종 현화제
인종 의숙제
주요 인물[4]
민영훈
지현의
민혜영[5]
신연화
유예환[6]
윤주연
김동휘[7]
화폐 대화제국 원(圓)
법정 연호 민력 달력[8]
건원 달력[9]
상징 표어 광명화지(光明和地)
(뜻: 화할 세상을 밝게 하리라.)
국가 대화제국 조국가
인문환경 어림 인구 약 18,630,200 명
인구밀도 약 151명/㎢
공용어 화국어
국민어 화국어
종교 없음[10]
정치 정치체제 전제군주정(사실상 입헌군주정)[11]
황제 화예원(和叡源)
조정총리대신 신채은(信彩誾)
국방 군대 대화제국군
세부 정보
  1. 본래 명칭은 연주(沇州)였으나, 제국 성립 이후 지방 행정 개편에 따라 부(部)로 승격되면서 지금의 명칭으로 교체되었다.
  2. 본 면적은 인화 왕국을 제외한 본토 면적이다.
  3.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에 논의된 묘호는 "성종(成宗)"이다.
  4. 아래의 서술된 인물들은 1860년대에서 1890년대에 활약했던 이들이다.
  5. 중추원 초대 조정대신으로서 대화제국의 입헌정치에 대한 기틀을 바로 세웠다.
  6. 대화제국군 초대 참장이며, 이후에는 군무대신과 함께 조정대신을 역임하기도 했다.
  7. 대화제국에서 대화공화당을 창설하고 사회주의 계열의 인물들과 연대하여 공화정을 주창했으나, 실패하면서 근황파로 변모하였다.
  8. 세계 표준 달력이다.
  9. 대화제국에서 사용하는 달력이며, 황제의 연호를 이용한다.
  10. 제국은 공식적으로 종교를 채택치 않았으나, 제국민들 중에서는 화교(和敎)나 정교(貞敎) 등을 믿는 이들도 많다.
  11. 표면적으로 전제군주정을 채택하고 있으나 황제 산하에 중추원(中樞院) 등을 통해 독립적인 입법활동을 행사하고 있으며,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행정원과 사법원을 구성토록 노력하고 있다.

대화제국(중국어: 大華帝國)은 1855년에 건립된 전제군주정 국가로서, 공식 약칭은 대화(大華)이다. 화국(華國)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며, 건무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폴리티나비아 반도 지역에서 높은 국력을 보유하면서 자주권을 지킬 수 있었고, 제1차 만민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인화 왕국을 정벌하면서 제국주의적 면모를 보이기도 하고 있다. 현재 황제는 화예원, 조정총리대신은 신채은이다.

국호

대화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한층 강하게 표방하고자 사용된 의례상, 의전상 국호로서 대화제국의 국명은 "대화(大華)"이다. 대화라는 명칭의 어원은 과거 폴리티나비아 반도에 존속했던 신화국(新華國)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국을 선포하기 이전에도 국호에 "대(大)"를 사용하여 대화라는 명칭의 자주성과 원류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대화제국이라고 표기한 이유는 민족다운 자긍심을 참작한 측면의 일부라고 하는 학계의 추측도 있다. 왕국이었던 선국(先國)과는 달리 제국으로 격식이 높아지면서 수도를 명명한 관용스러운 별칭도 '황제가 존하는 제국의 수도'라는 점에서 "황경(皇京)"이라고도 한다.

제국의 성립

제국 수립의 배경

콘스틴바흐 사변폴리티나비아 대분열 이후 폴리티나비아 반도 일대가 수많은 중소 독립국으로 분열됨에 따라 주변 열강들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면서 국가의 자주성이 크게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강력한 국력과 자주성을 위시할 것을 염원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강화되면서 의정협회의 자주독립 및 제정 선포 주장에 힘업어 대화제국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제국 선포

1855년, (건무 원년) 4월 13일에 성조명화궁으로 입궁하면서 건무(建武)란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6월 11일에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하였다. 성조는 자주 의지를 폴리티나비아 반도 전역에 널리 표명하고 위협받는 국가 위신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제국을 선포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이에 국호를 대화제국이라 하고 황제를 칭하면서 즉위하였다. 이에 모딘스크 연방난안 공화국, 인화 제1 공화국를 비롯한 주요 열강과 폴리티나비아 반도의 수많은 중소국들의 승인 의사를 통해 대외적인 제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 제국임을 표방한 후에 성조는 건황문(建皇問)을 건립하여 대화국의 자주독립을 다시 한 번 실감토록 하였다.

성조는 이후 태현궁으로 환궁하면서 입법기관인 의정소(議政所)를 설치하고 원로대신 다섯 명과 더불어 박인혜, 민혜영 등과 함께 외국의 고문관들을 적극 도입하여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작업에 돌입하였다.

건무개혁

성조는 타 열강국을 따라 잡기 위하여 개혁을 모색하였다. 이에 의정소를 기반으로 하여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 등 일련의 개혁안을 추진했고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모딘스크 연방헬레티버 공화국 등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하여,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탄압하고 황제가 주도로 한 일방적 자본주의 사회 육성과 군사력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

중앙집권체제 국가의 확립을 위하여 기존의 의결부와 섭정원을 폐지하였고 황제의 친정을 통하여 대화국 대관제를 실시하였다. 이후 율례제를 강화하여 2관 8성의 모습을 뜬 중앙 행정기구를 수립하였고 구체적인 행정 기구의 세분화로서, 민부성과 농산성을 분리하고 형부성과 사법성의 개편 등 무수한 개변이 필요하여 제도가 안착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한, 입법 기구였던 의정소를 설치하고 폐지하기를 반복하였다가 1873년의 조정 제도의 발족으로 간신히 안착되었다. 입법부에 관해서는 박인혜를 중심으로 건무 초부터 중추원개설을 주장하였지만, 이러한 조정 제도를 발족시키기 위해선, 관제 개혁 및 국민 교육등의 부분에 미성숙으로 인한 시기 상조로서 "연예 민씨"와 "지원 박씨"를 중심으로 한 파벌 관료를 통한 개혁 체제가 유지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 더 자세한 내용은 중추원을 참조.

지방 행정은 각 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 목, 군, 현을 두었으며,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지방 행정관을 파견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이에 반발하던 지주들과 촌주들에게 재정적인 핍박안을 내놓는 등 스스로 지방 행정관에게 통치권을 반납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그외에 궁중개혁을 통해 궁녀와 시종 등에 궁중직을 폐지하였으며, 성조를 "열강식 개혁군주"의 이미지를 갖추도록 하여 의정소 심의에 참석하거나 중추원 개설 이후 입헌 정치에 미성숙기에 발생했던 빈번한 사임, 조정 교체 시기에도 정국의 조정자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토록 하였다. 그외에 사농공상의 신분 구별을 전면적으로 폐지할 것을 선언하였고 학제 개편, 민력 달력 채택, 사법제도 정비 등을 급격하게 개혁토록 하였다. 이에 많은 민중들이 반발하기도 했으나 징병령으로 소집된 제국군의 사회 질서 유지와 주요 정계 파벌들의 지지 아래 이러한 개혁은 끊이지 않고 추진되었고 이후에는 개혁의 정리가 이루어졌다.

경제 산업 분야에서는 부국강병, 자산흥업을 슬로건으로 내놓고 관영공장을 세워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을 시작하였고, 열강의 공업 기술을 도입하였다. 금융제도에서는 통화 단위로 "원(圓)"을 도입하였고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대화 중앙은행이 설립되는 등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