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티나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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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제국 역대 황제
칭황건원 초대 건무제
화희
2대 숭익제
화훈


성조 건무제 화희
成祖 建武帝 和熙
파일:.jpg
군주 정보
묘호 성조(成祖)
시호 융운조극련정성광의
문무장익정태황제
(融雲祚極聯貞盛光義文武暲翼程太皇帝)
절일 만수광절(萬壽光節)
연호 건무(建武)
본관 현부(現部)
능묘 흥화릉(興華陵)
화희(和熙)
생몰기간 1801년 4월 12일 ~ 1863년 5월 1일
재위기간 선예국 국왕 (1831년 7월 13일 ~ 1855년 4월 12일)
대화제국 황제 (1855년 4월 13일 ~ 1863년 5월 1일)

성조 건무제(중국어: 成祖 建武帝)는 대화제국의 초대 황제이며, 선예국의 마지막 왕이다. 선예국과 대화제국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명군으로 손꼽힌다.[1]

극단적 군주주의자들이 부르는 명칭은 건무대제(建武大帝), 건무성제(建武聖帝)이며, 폴라티나비아 반도에 몇 안되는 제국주의 국가의 수장이었던 인물과는 대조되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한다.[2]

생애

성조의 어린 시절 휘는 혼(混)이었다고 하는데, "화평과 섞이리라."라는 의미로 어머니이자 선왕인 현종[3]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1826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31년에 현종이 숨을 거두자 3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왕위에 오른 성조는 폴리티나비아 반도에서 발생하던 수많은 외부적 혼란을 혁파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개혁파들에게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마침내 백성들의 의견과 일치해진 틈을 탄 개혁파는 4.9 정변을 일으켜 보수주의 세력들을 실각 시킨 뒤 13일, 성조를 명화궁으로 입궁시켜 건무(建武)란 연호를 사용할 것을 건의, 성조가 이를 채택함에 따라 본격적인 제국 성립이 시작되었다. 이후 개혁파들은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서 6월에 황제 칭호를 사용할 것을 성조에게 요청했고, 이 역시도 성조가 응하면서 대화제국이 성립되었다.[4]

황위에 오른 성조는 명목상의 친정을 선포하고서 개혁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정을 구성했고, 제국의 자주독립을 다시 한 번 표방코자, 건황문(建皇門)을 건립하기도 했다. 특히 성조는 정치 활동에 두드러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교육 제도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자신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교육 제도를 개편하기도 했다.

그외에 중추원 설치 이후 발생한 빈번한 사임, 교체 시기에 정국의 주도자로서의 권위와 정치력을 행사하여 안정적으로 운영토록 하여 초기에 어수선했던 제국의 분위기와 사회적 상황을 극복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해냈다. 제국 통합의 상징으로서 얼굴 마담 역할 및 지방 순행도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이는 개혁파 정부가 흐트러진 민심을 다독이기 위한 방법임과 동시에 성조 스스로가 여행을 좋아했던 성격이 맞물려서 시너지를 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65년, 65세의 고령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으며 그녀의 능을 흥화릉이라 명명지었고, 묘호도 제국 성립의 최고 공로자로서 성조(成祖)로 확칭되었다. 황위는 장녀인 헌종 숭익제에게 계승되었으나, 그녀가 2년여만에 요절하자 흥종 광성제가 즉위하게 되었다.

트리비아

위에서 말했다시피 보수적인 성향이었기에 외부 문물 수용에 대해서는 늘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교육 제도에 관심을 가졌던 성조는 교육 체계에 유한학(儒漢學)의 과목을 설치하여 백성들이 예절과 질서를 갖도록 하는데 치중하였고 이는 서구식 학제를 추구하던 문부성 대신 목고행(木高行)과 다툼을 벌였고, 이 때문에 한달 간 병치레를 핑계로 정사를 돌보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에 민혜영의 설득으로 절대군주를 형식화한 입헌 군주체제 도입과 외부 복식 차림을 윤허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간간히 봉건적 요소로 가득한 시나 표어를 쓰면서 이를 전국에 학생들에게 읽히게 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5]

성조는 사진 촬영이나 어진영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사진 촬영을 굉장히 꺼려 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궁중 화가가 평소의 성조의 모습을 그리는 일이 많았고 그녀 몰래 사진을 찍었다고 하는데, 한 번은 이러한 사실이 들통나면서 노발대발 화를 냈다고도 한다. 물론 그녀의 어진영과 사진은 그녀 사후 전국적으로 펼쳐져 프로파간다로서 사용되었다.

그녀의 사후 벌어졌던 일과는 달리, 당시 인화 왕국의 국왕이었던 무혜왕(務慧王)과 친분을 가졌다고 한다. 사적인 회담을 가졌던 일이 잦았다고 하며, 이러한 사적인 자리에서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스스로를 "황제 폐하", "국왕 전하"라고 3인칭 형식으로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성조는 보수적인 성향과는 달리 굉장히 느긋하고 장난기가 많았다고 한다.

각주

  1. 실상은 시대적인 상황과 함께 근황파와 개혁파 등 집권계층에게 동조하였고, 그들 역시 건무제를 프로파간다로 사용하여 강력한 군주로서의 이미지를 삼고자 노력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그의 어진영을 내걸면서 인신(人神)으로 추앙받게 되는 결과를 안게되었다.
  2. 물론, 보수적인 성향과는 반대로 근황파/개혁파의 집권층에게 전면적인 실권을 넘겨주었기에 큰 마찰은 불거지지 않았다.
  3. 대화제국은 철저한 모계 중심 사회였기에, 왕위 역시 장녀였던 성조에게 넘겨주었다.
  4. 제국의 성립은 단순히 개혁파들에 정변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닌, 백성들의 요구와 중산층을 대변하던 의정협회에 주장 등이 합치된 결과물이었다.
  5. 물론 개화파들의 만류로 금지되었기는 했으나, 사후 그녀가 썼던 시와 표어는 숭배의 대상물로서 재평가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