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카이저라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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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David Lloyd George
약력 국민자유당 대표 (1919-1921)
영국 총리 (1916-1919)
전쟁장관 (1916)
군수장관 (1915-1916)
재무장관 (1908-1915)
상무청장 (1905-1908)
출생 1863년 1월 17일
대영제국 랭커셔 (만 72세)
상태 실종 (생존 추정)
소속 캐나다 자치령 (카이저라이히) 영국
정당 자유당 (1890-1916) (1921- )
국민자유당 (1916-1919)
주요 사건 대전쟁
영국 내전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는 고위공직자이자 정치인으로,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영국의 총리였다. 19세기 후반부터 대전쟁 이전 시기에 저명한 웨일스 정치인이자 자유당 인사였던 로이드 조지는 전쟁을 겁내는 기성 정치권을 거부하면서 반독일 언사로 개전 초기에 국민적 관심을 받았다. 1916년 미국의 중재 제안에도 불구하고, 로이드는 한 쪽이 나가 떨어질 때 까지 싸우는 "녹아웃 전략"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1916년 말, 정치적 승부수를 통해 H. H. 아스퀴트 총리를 사임시키고 총리의 자리에 올랐지만, 프랑스의 붕괴와 함께 전쟁에서 승리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게 되며 정치적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전후 로이드는 1921년까지 외면 받는 국민자유당을 이끌었고, 이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영국 혁명이 시작된 후, 로이드는 유럽 대륙으로 도망친 것으로 의심받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의 정확한 생사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로이드 조지의 유산은 학계에서 그를 재평가하며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웨일스인 중 처음으로 영국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생애

유년 시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1863년 1월 17일 멘체스터 촐튼온메드록의 웨일스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조지는 런던과 리버풀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같은 해 3월 아버지의 건강 악화로 가족들과 함께 부친의 고향 펨브로크셔로 돌아왔지만, 이듬해 6월 폐렴으로 사망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조지(1828-1896)는 농장을 팔고 아이들과 함께 카너폰셔에 있는 그녀의 고향인 랜스텀디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구두공이자 목사인 남동생 리처드 로이드(1834-1917)와 하이게이트로 불리는 오두막에서 함께 살았다.

조지는 지역 성공회 미션스쿨인 랜스텀디 국립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교사 밑에서 교육받았다. 조지의 삼촌인 리처드 로이드가 1917년 2월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삼촌의 성을 추가하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보통 로이드 조지(Loyd George)로 불렸으며, 때때로 조지로 불리게 되었다. 이 때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해 스스로는 "공작"이라고 불리는 것을 희생하며 빈민과 서민을 위해 살았다고 주장했지만, 영국 역사가들은 로이드 조지의 어린 시절이 그가 밝힌 것처럼 가난한 삶에 가까웠던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독실한 복음주의자로 자랐지만, 젊은 시절에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세속주의자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 조지는 부동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헨리 조지 뿐만 아니라 파비안 협회보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파비안 협회보는 계속해서 그의 청년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85년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주변 마을에 지사를 설립하기 전까지 포트마독에서 사무 변호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에 자유주의가 대두되면서, 조지프 체임벌린의 '무허가 개혁정책'에 매료되어 1885년 총선에서 그의 선거운동을 위해 뛰기도 했다. 아일랜드 자치법 문제에서 조지는 체임벌린의 '연방 해결책'이 옳다고 생각해 그를 지지했다.

1888년에는 지역 농가의 딸인 마거릿 오웬스와 결혼했고 같은 해에 다른 웨일스 청년 자유당원들과 함께 월간지 우드곤 리딧을 창간했다. 1880년에는 매장법 개정안에 의해 매장할 권리를 부여 받았지만, 성공회 성직자들에 의해 무시된 권리인 교구 매장지의 자기 종파적 의식을 통한 매장권을 확립하는 소송에서 승소하기도 했다. 당시 금지된 침례교 매장의식은 로이드 조지의 조언에 따라 시작되었다. 성공회는 이들을 무단침입으로 고소했고, 지역 판사는 판결에서 배심원의 판결을 오입해 결과적으로 성공회에 유리한 판결이 나왔다. 이를 발견한 로이드 조지는 이러한 판결이 본질적으로 토지 소유 계급인 토리당의 편의를 봐주기 위함임을 깨달았다. 로이드 조지는 항소를 제기하여 런던의 퀸스벤치 지방법원에서 승소했다. 이 사건은 웨일스 전역에서 환영받음과 동시에 그의 체급을 단번에 키워주었다. 결국 1888년 12월 27일 카나본 구의 자유당 후보로 공천되었다. 당시 조지는 아일랜드 의회당을 모델로 한 별도의 웨일스 국민당을 창당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북웨일스 자유 연맹의 통합을 위해 일했다.

정계 입문

1890년 4월 10일 보수당 의원 에드먼드 스위튼햄이 사망한 후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로이드 조지는 18표 차이로 카나본 구의 자유당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웨일스에서 성공회의 국교 지정을 폐지하는 정책과 금주 개혁과 웨일스 자치법을 추진하기 위한 자유당 의원 모임에 참여했다. 그는 첫 당선의 29년 후인 1919년까지 동일한 지역구에서 의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하원 백벤치 의원들은 급여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변호사로도 계속해서 활동하며 자신과 성장하는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런던에 '로이드 조지 앤 컴퍼니'를 개업했다. 크리체스에 있는 형제와 계속해서 협력 관계를 유지하던 그는 1897년 '로이드 조지, 로버츠 앤 컴퍼니'로 사명을 변경하고, 번창하던 자신의 사무실을 아서 리스 로버츠의 변호사 사무실과 병합했다. 이 시기에 그는 영국 정부의 우간다 계획에 관한 협상에서 테오도르 헤르츨의 법률 고문으로 일했는데, 이 협상은 터키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촌을 설립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동시에 그는 금주 개혁과 영국 성공회의 국교 해제와 같은 웨일스 및 자유주의적 어젠다에 대한 캠페인을 벌였다. 또한 제2차 보어 전쟁에 대한 격렬한 반대 입장을 보이기도 해서 점차 사람들에게서 "리틀 잉글랜더"로 취급받고 있었다. 한편 조지는 대영제국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제국주의자로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그는 영국이 '인종적 오만'보다 인권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1902년 영국 성공회 학교의 지원금 문제 때문에 교육법 개정안에 반대하였고, 법안이 가결되는 동안 자유당을 규합하는 모습을 보여 사람들이 그를 자유당 내각의 미래로 보게 끔 만들었다.

입각 및 예산 편성

1905년 로이드 조지는 상무청장으로 헨리 캠벨배너먼 경이 주도하는 자유당 신생 내각에 입각했다. 1902년 교육법을 폐지하는 것이 그의 취임 이후의 최우선 과제였다. 로이드 조지는 교육위원회 위원장인 어거스틴 버렐과 함께 교육법 개정안 폐지를 주도했고, 완전히 새로운 교육법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새 교육법 개정안은 압도적 찬성으로 하원에서 통과되었으나, 상원에 의해 세부 법안을 난도질 당해 좌초될 위기에 처한다. 이 기간 로이드 조지는 장외에서 선거로 선출된 권력인 하원의 의사를 귀족정인 상원이 무력화 시키려하고 있다며 상원을 비난하는 대중 연설을 수차례 감행했다. 상황이 상원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로이드 조지는 에드워드 7세에게 불려가 질책까지 받게 된다. 당시 캠밸배너먼 수상은 추밀원장 프랜시스 놀리스에게 "로이드 조지의 행동은 의회에서 더 건설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일반 대중을 위한 투쟁 정신이 그를 이끌고 있다"며 로이드 조지를 옹호했다. 그러나 어떠한 타협도 불가능한 상황이 지속되자 결국 법안은 새 교육법 개정안은 폐기되었다. 한편 로이드 조지의 행동 덕분에 교육위원회에는 웨일스를 위한 별도의 부서가 만들어졌다. 상무청장으로서 그의 주요 업적은 철도 파업을 중단시키고 노사 분쟁을 해결하는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 꼽힌다.

로이드 조지는 캠벨배너먼 수상의 서거 이후 계승된 애스퀴스 내각에서, 수상으로 자리를 옮기며 공석이 된 재무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상무청장직을 유지하는 동안 런던항만청을 설립하거나 면허법 개혁하는 등 전통적인 자유주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입법을 계속했다. 물론 이런 그의 자유주의 드라이브에 제동을 건 첫 시험대는 1908년-1909년 해군 예산에 대한 것이었다. 1906년 총선에서 자유당은 군비 감축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로이드 조지는 이를 강력히 지지했지만 보수당의 정치운동에 의한 압박은 꽤나 강력했기 때문에 결국 8척의 드레드노트 건조 예산을 포함한 해군 예산이 채택되었다. 동시에 그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의한 표적이 되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지지를 공언하고 다녔지만 실제로 여성 참정권을 위한 입법 활동을 벌이지는 않았다.

1909년 로이드 조지는 증세를 주장하며 토지를 매각할 때 대금의 20%의 세금을 부과하고, 미개발 토지와 광물에 대해서는 상속세를, 3000파운드 이상의 고소득자에게 슈퍼소득세를 제정했으며, 사치품과 술, 담배에 까지 세금을 물려 새로운 드레드노트를 건조할 예산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복지 제도에도 예산을 돌릴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자금을 확보하게 되었다. 토지 소유주들은 새로운 세금과 복지 정책에 강력히 반대했는데, 높은 세율도 있었지만 부의 재분배가 가져올 보호무역에 대한 사람들의 간절함을 감소시킬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예산안은 보수당이 장악한 상원에 의해 거부될 것이 분명했고, 이는 결국 하원-상원 간의 권력 분쟁을 불러와 헌법 위기를 촉발했다. 그러나 1910년의 총선에서 자유당이 다시 한 번 승리하면서 1909년 예산안이 통과되었으며, 하원-상원의 서열은 1911년 의회법을 통해 상원의 입지를 크게 줄이는데 성공했다.

비록 노령연금과 같은 복지 정책이 애스퀴트 총리의 이름으로 도입되었지만, 로이드 조지는 자유주의 개혁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정책에 큰 공로가 있었다. 로이드 조지는 자신이 상정한 1911년 국민보험법을 통과시켜 질병과 실업급여 제도를 만드는 것에도 성공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새로운 사회적 안전망 확충을 추진했고, 종종 40명의 하원 백밴치 노동당 의원들과 함께 법안의 통과를 위해 힘쓰기도 했다. 영국의 이러한 사회 개혁은 복지 국가의 시작이었고, 빈곤에 대한 보다 급진적인 해결책에 의존하려는 노동자들의 욕구를 약화시키는데 성공했다. 1909년 이후 자유당은 그의 지도 아래 최저임금제도를 농장의 노동자들에게 까지 확대하는데 성공한다.

1913년 로이드 조지는 법무장관 루퍼스 아이작스와 함께 마르코니 스캔들에 연루되기도 했다. 마르코니 스캔들은 마르코니 컴퍼니에 정부에서 추진하는 핵심적인 사업의 수의 계약을 체결하도록 유도한 후 마르코니에 투자해 거액의 부당 이득을 챙겼다는 비리 의혹이었다. 그는 하원에서 "그 회사"의 주식 따위는 산 적이 없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실제로 주식을 샀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14년까지 영국 성공회는 개신교, 특히 칼뱅주의 감리교보다 웨일스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지받지 못했다. 로이드 조지는 영국 성공회의 웨일스 국교 지정 해제를 지속해서 요구해왔고, 1914년 웨일스 교회법을 통과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웨일스는 종교의 자유를 위해 6명의 웨일스 주교가 영국 상원에서 의석을 가질 권리를 박탈당하고, 1662년에 체결된 교회 재산권 또한 포기했다.

대전쟁과 군수 및 전쟁장관 시절

영국 정계의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로이드 조지 역시 대전쟁의 발발에 큰 충격을 받았다.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후통첩이 있기 전날 그는 하원에서 "경제"에 포커스를 맞춘 연설을 하면서 최근 영국-독일 관계가 수년 전보다 더 좋았다고 발언하며 안심할 것을 당부했다. 그해 7월 말 맨체스터 가디언의 기자 C. P. 스콧에 영국은 임박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당시 내각은 전쟁에 참여할 것인지 말 것 인지로 내분이 이어지고 있었다. 로이드 조지는 대부분의 각료들이 영국의 전쟁 참여를 꺼리는 모습이 보이자, 8월 1일 각료회의에서 애스퀴스 총리에 대해 "하급공무원 같은 사람"이라고 공격하며 입장을 선회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날 그는 내각에서 쫓겨날 것을 염려하고 있었으나, 벨기에가 프랑스로 진격하려는 독일군에 대해 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닌 전쟁을 택하자 천운이 따랐다고 생각한다. 그는 영국 역사의 중대한 변곡점에서 개입주의자 거물로 정치권에서 위상이 급부상했고, 더 많은 평화주의자 각료들이 약소국의 권리를 위한 명분 있는 전쟁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로이드 조지는 대전쟁이 발발한 첫 해에 재무장관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1914년 11월 17일 통과된 예산은 국제무역의 감소로 인한 낮은 수입을 반영해야만 했다. 영국이 최근 겪은 두 전쟁인 크림 전쟁과 보어 전쟁은 대부분 예산안 내에서 추가 지출 없이 해결되었다. 그러나 로이드 조지는 3억 2100만 파운드의 국채 발행을 지시했다. 로이드 조지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초고소득세와 소득세의 급격한 인상, 그리고 소비세의 인상을 통해 연간 6300만 파운드의 추가 재정을 조달하도록 도왔다. 1915년 5월 4일, 그가 마지막으로 제출한 예산안에서 전쟁 준비에 대한 상당 부분이 주류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주류의 국가 전매를 주장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일랜드 국민당과 보수당에 의해 반대되었고, 결국 포기되었다.

개전 초기, 로이드 조지는 군수 장관으로 탁월한 행정력을 발휘해 국민적으로 영웅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를 통해 수상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육군성과의 오랜 다툼 끝에 그는 육군 장성들이 가진 군수 생산 권한을 회수했고, 월터 런치만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군수성을 순수한 군수 생산 담당 산업 부서로 확립했다. 두 사람은 행정력을 발휘해 군수품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린 것에 대해 자유당 내각의 동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1915년, 육군의 포탄이 모자라다는 "포탄 위기"가 발생해 여론을 실망 시켰을 때 여론은 상황을 반전 시킬 강력한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었다. 1915년 5월 출범한 제1차 거국 내각에서 로이드 조지는 군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군수성은 병무청의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군무원 노동문제를 해결했으며, 군수품의 공급체계를 획기적으로 일신했고, 생산량의 비약적인 증가를 불러왔다. 이 모든 것은 불과 1년 안에 이루어진 것으로, 군수성은 순식간에 국내에서 가장 큰 소비자이자, 생산자이면서 고용주가 되었다. 비록 영국 역사가들은 이것이 순전히 로이드 조지의 작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했고, 이런 현상은 단지 이미 진행 중인 개혁이 타이밍 좋게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1915년 초부터 로이드 조지는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전쟁에 더 깊숙이 발을 들여놓길 원했다. 이 때문에 계속해서 그리스를 전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발칸 반도에 군대를 파견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려고 해 제국 참모총장인 로버트슨 장군과 충돌했다. 로이드 조지는 같은 해 자유당을 분열시킨 징집법에 웨일스 사단을 설립하고 비순응적인 군 성직자들도 입대를 허용케 하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해 키치너 경을 설득해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이듬해 키치너가 사망하면서 로이드 조지는 전쟁의 전략에 관여하는 것은 제한적이었지만 전쟁장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전쟁장관으로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중재 제안을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기자들에게 "싸움은 반드시 한쪽이 녹아웃 될 때까지"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로이드 조지는 솜 공세에서의 제한된 승리에 실망해 9월 서부 전선을 방문한 페르디난드 포흐 장군을 비난하고, 로버트슨 장군을 러시아로 파견할 것을 제안함과 동시에 루마니아를 돕기 위해 살로니카에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로버트슨이 군복을 벗겠다고 장관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당시 주류 언론은 모두 헤이그와 로버트슨 장군의 전략적 안목이 민간인 장관보다 낫다고 주장했고, 로이드 조지가 대전략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서 공격했다. 그는 11월에 전쟁 전략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때까지도 전쟁장관인 로이드 조지는 전쟁 전략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1차 로이드 조지 내각 (1916-1917)

계획자나 조직자로서의 애스퀴스의 약점은 각료 사이에서도 점점 더 분명해졌다. 1916년 12월 애스퀴스는 전쟁의 향방을 주도하는 위원회에 자신을 참여시켜 달라는 로이드 조지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로이드 조지는 수상의 자리에 올랐고, 영국은 그가 강력한 리더쉽으로 전쟁을 지휘할 것을 요구했다.

1916년 12월 이후 로이드 조지는 보수당과 더 타임즈와 데일리 메일을 모두 경영하는 노스클리프 남작의 지지에 의존했다. 총리 외의 5명의 전쟁 내각은 3명의 보수당(각료 평의회 의장 겸 상원 의장 커즌 경, 재무장관 겸 하원 의장 보나르 로우, 로드 밀너) 의원과 비공식적으로 노동당을 대표하는 아서 핸더슨으로 구성되었다. 에드워드 카슨은 해군 제1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전쟁 내각에서는 제외되었다. 로이드 조지를 지지하는 소수의 자유당 의원들 중에는 후에 로이드 조지에 대한 자유당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크리스토퍼 에디슨, H. A. L. 피셔, 론다 경, 앨버트 스탠리 경 등이 있었다. 에드윈 몬태규와 윈스턴 처칠은 1917년 여름 내각에 이름을 올렸다. 이제 내각의 수반에 오른 로이드 조지는 오스만 제국의 파괴를 영국의 제1전쟁 목표로 삼고 싶었고, 취임 이틀만에 로버트슨에게 국민을 위해 예루살렘을 점령해오라고 말했다.

로이드 조지는 프랑스 파견 영국군을 프랑스 장군 니벨에게 종속시키려는 등 국내에서 장군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계산된 음모를 계속해서 꾸몄다. 그는 베르됭에서의 성공적인 반격과 함께 "자신이 남자임을 증명할 것"이라는 니벨의 48시간 내 독일 전선 돌파 약속 때문에 니벨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의 승부수는 니벨의 패퇴와 함께 좌초했고, 영국군 장성들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 선박이 큰 피해를 입자, 로이드 조지는 글래스고의 선주였던 조지프 맥레이 경 휘하에 해운부를 설립했다.

2차 로이드 조지 내각 (1918-1919)

대전쟁 이후

평가

학계의 평가

친독일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