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 이 페이지는 다가오는 리워크와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현재의 게임 내 설정을 잘 반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게임 내 내용에 대한 변화를 완전히 바꾸려는 궁극적인 목표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내용은 또한 최종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약간의 사소한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대전쟁
The Weltkrieg
발발 1914년 6월 28일
종전 1919년 11월 6일 (실제)
1921년 11월 6일 (명목상)
장소 전 세계
결과 동맹국의 승리
교전국
동맹국 협상국
지휘관

대전쟁(Weltkrieg) 또는 세계대전은 1914년 여름에 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된 대규모 전쟁이다. 전투는 1919년 11월에 사실상 마무리되었지만, 전쟁은 2년 후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 전쟁은 협상국동맹국을 중심으로 세계 열강의 대부분이 참여하여, 6,100만 명의 유럽인을 포함한 7,100만 명 이상의 군인이 동원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다. 전선의 변화 없이 화력의 비약적 기술적 진보로 인해 천만 명 이상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대전쟁은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충돌이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암살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대영제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의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행보는 간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의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은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선전포고를 불러왔으며, 지난 수십 년간 체결된 동맹 조약들이 효력을 발하며 강대국들의 참전을 일으켰다. 강대국들의 식민지를 통해 전쟁은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역사

19세기에 강대국들은 유럽 전역에 걸쳐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기간 동안 노력했고, 그 결과 1914년 유럽 전역에 걸쳐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통한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유럽의 대규모 분쟁은 주로 독일 제국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치력이 빛을 발한 조약들 덕분에 피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러시아와 양면 전쟁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를 독일의 편에 서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카이저)로 즉위 하면서 비스마르크의 외교 균형은 점차 힘을 잃게 되었다. 카이저가 1890년 러시아와의 동맹 조약의 갱신을 거부하면서 2년 후, 프랑스와 러시아는 동맹국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 협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1904년, 영국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 1907년에는 영국과 러시아가 영국-러시아 협정에 서명했다. 이 3국간의 상호 동맹 체계는 3국 협상을 형성하게 된다.

독일의 산업과 경제력은 1870년 독일 통일과 함께 크게 성장했다. 1890년대 중반부터 빌헬름 2세는 영국 왕립 해군과 경쟁하기 위해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 장군을 주도로 하는 카이저 마리네 건설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며 양국의 건함 경쟁은 치열해졌다. 1906년 HMS 드레드노트의 진수와 함께 대영제국은 독일과의 해군 경쟁에서 큰 우위를 점하게 되었으며, 영국과 독일의 군비 경쟁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의 건함 경쟁을 유발 시켰으며, 결국 모든 강대국들은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분쟁에 대비한 장비와 무기의 생산에 초점을 맞춘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1908년부터 1913년 사이에 주요 강대국들의 국방 지출은 50%나 증가하게 되었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이자 보스니아 청년회 회원인 가브릴로 프린터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 대공을 암살했다. 이것은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영국 사이에 7월 위기라고 불리는 외교적 긴장을 불러왔다. 보스니아에 대한 세르비아의 간섭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키고자 오스트리아는 7월에 세르비아에 10개 조로 된 최후통첩을 전달하였으나 이전에 이미 거부된 내용 만을 되풀이하여 세르비아는 해당 요구 중 8개만 수용할 수 있다고 답했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동의 아래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동맹국이기 때문에 참전하였고,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맹이기 때문에 참전하였다. 서쪽에서의 독일의 벨기에 침공은 영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명분으로 이용되었다.

1914

동맹국의 전략은 항상 의사소통의 부재에 시달렸다.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침공을 지지하기로 했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한 해석은 달랐다. 이전에 논의한 배치 계획은 1914년에 변경되었지만, 실제로 양국 간의 훈련에서는 테스트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군 수뇌부들은 독일이 러시아에 대항하여 오스트리아의 북쪽을 막아줄 것이라 생각했으나, 독일은 프랑스로 전선을 넓히면서 오스트리아군이 러시아와 세르비아를 모두 상대하도록 유도하였다.

세르비아군은 8월 12일 이후 드리나 강과 사바 강의 남쪽에 있는 방어 진지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군과 세르 전투를 벌였다. 그 후 2주 동안 오스트리아군은 대공세의 실패와 함께 뒤로 후퇴하였다. 이것은 협상국에게 있어 전략적 첫 승리이자, 오스트리아의 속전속결 전략을 무너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전역에 상당한 병력을 배치해야 했으며, 러시아 전선의 약화를 불러오게 되었다.

대전쟁이 발발하자 독일군은 7개 야전군으로 구성된 슐리펜 계획을 수정하여, 중립국인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 내부로 신속히 치고 들어가 독일 국경 부근의 프랑스군을 포위하는 계획을 마련하였다. 이 계획은 독일군의 신속한 진격을 요구했지만 프론티어 전투(8월 14 ~ 24일) 등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계획대로 되나 싶었지만, 영프 연합군과의 제1차 마르네 전투(9월 5 ~ 12일)에서 패배하며 파리 동쪽으로의 독일군 진격이 좌절되었다. 이 전투의 패배는 곧 독일의 프랑스군 포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8월 7일 뮐하우젠 전투와 함께 시작된 프랑스군의 반격은 제한적이지만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게 되었다.

동부에서는 단 한 개의 야전군만이 동프로이센을 방어 중이었고, 러시아가 동프로이센에 공격을 시작했을 때 서부전선의 야전군이 동부전선을 막기위해 돌아오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독일은 제1차 탄넨베르크 전투(8월 17일 ~ 9월 2일)를 포함한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러시아 지역의 기반이 매우 낙후되어있어 진격 속도에 문제가 생기자 신속한 동부 전선 정리가 돈좌되었다. 독일군은 프랑스 전역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신 문제들과 영리하지 못한 지휘 때문에 조기에 승리를 거둘 기회를 잃게 되었다.

유럽 바깥에서는 아프리카와 태평양에 위치한 모든 독일의 식민지가 신속히 점령되었다.

1915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의 공세적 전투를 멈추고,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를 빠르게 무너트리는 전략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한편 협상국에서는 각각의 전선에서 동맹국의 방어를 돌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세르비아는 증강되는 오스트리아 병력을 막기 버거워졌고, 영국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보르포루스 해협을 장악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4월 22일, 제2차 이퍼즈 전투에서 독일군이 처음으로 염소 가스를 사용하며 알제리군이 후퇴해 협상국 전선에 6km의 구멍이 뚫리게 된다.

독일군은 재빨리 키치너드 숲을 장악하면서 이퍼즈에서의 전선 구멍을 확대시켰다. 서부전선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대규모 돌격을 감행했음에도 전선의 양상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독일보다 수 십만 이상의 사상자만 내게 되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갈리폴리 상륙작전도 실패하면서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이 사임하였다. 한편, 동부전선에서 동맹군은 러시아를 벨로루시까지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다만 러시아는 아직도 인력과 생산력, 군대가 많이 남아있었지만 사상자는 엄청났다.

1916

1916년은 양측 모두 새로운 공격 계획을 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독일은 프랑스군을 소모전을 통해 분쇄하기 위해 베르됭의 협상국 요새에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공세를 계획했고, 협상국은 솜므강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전략을 수정했다.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의 공세를 버티고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5월 31일의 제1차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과 독일은 모두 자신이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협상군은 발칸에서의 브루실로프 공세가 성공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면서, 서부전선에서 솜므 공세를 시작하게 된다.

솜므 공세는 처음으로 전투에 탱크가 사용된 전투였음에도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솜므 전투와 베르됭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거의 백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게 했다. 하지만 1916년 독일령 카메룬과 독일령 남서아프리카가 항복하면서,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파울 폰 레토우 보르벡이 지휘하는 군대가 유럽 이외에 유일하게 남은 독일군이 되게 되었다.

1917

1917년 독일 내부에서는 영국의 해상 봉쇄를 타파하기 위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다. 비록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대가를 치르긴 하겠지만, 독일 해상 봉쇄를 푼다는 목적은 달성한다는 목소리도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폰 베스만 홀웨그는 미국을 상대로 중립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카이저에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 시켰다. 따라서 17년 초의 해전 특징이었던 북해에서의 봉쇄를 그대로 두는 한편, 독일의 미국 스파이 활동을 파괴 활동에서 선전 활동으로 변경하며, 독일과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반전 운동을 촉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년 초에는 양측 모두 자신들이 전쟁에서 우세한지 확신하지 못했다. 독일은 영국의 봉쇄가 강화되고 생필품이 부족해지며 안정도가 급락하고 있었다. 폰 힌덴부르크는 수상에게 "군사적 상황이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고 보고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러시아군의 재집결과 공세는 많은 독일군이 동부전선에 묶여버리며 서부전선을 방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취약해지게 하기도 했다. 협상국의 솜므 공세로 독일의 전선은 과도하게 길어지고 취약하게 되었으며, 오스트리아는 브루실로프 공세로 더할 나위 없이 큰 타격을 입고 내부의 민족주의자들의 불만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 또한 아르메니아에 대한 러시아의 대공세로 후퇴하며 전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협상국도 다를 바가 없었다.

솜므 공세로 협상국은 수 십만 명의 목숨을 잃었으며, 대규모 돌격이 얼마나 무의미 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군대는 여전히 이손조 전선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병력의 증강으로 전선에 압력이 가해지고 있었다. 중동에서는 통제를 위해 영국군이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주둔해야 했으며,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1918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