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국
Deutsches Kaiserreich
국기 국장
Gott mit uns
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상징
국가 그대에게 승리의 왕관을
Heil dir im Siegerkranz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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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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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독일 내전 승리, 건국
1939년 2차 세계 대전 발발
1946년 2차 세계 대전 승리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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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베를린
최대 도시
베를린
면적
739,187.55㎢
접경국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보헤미아-모라비아-슬로바키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 제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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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68,370,000명
민족 구성
독일인(다수), 폴란드인, 소르브인, 덴마크인 등(소수민족)
공용어
독일어
종교
국교
개신교, 가톨릭
분포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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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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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외견적 입헌군주제(사실상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황제(카이저))
빌헬름 3세
정부
요인
황제대리
빌헬름 3세(1939년~1942년)
국가수상
루트비히 빌헬름 에르하르트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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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공식 화폐
굴덴, 마르크
ISO 4217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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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LD
'
국가 코드
'
전화 코드
'

개요

독일 제국(공식명칭은 독일 입헌제국, Deutsches Konstitutionelle Kaiserreich)은 1936년 독일 내전으로 건국 되어 1976년 제 3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멸망한 국가이다. 파시즘 몰락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으며 자국만의 독특한 입헌군주제인 빌헬르니즘을 내세워 한때 유럽을 장악하였고 현대 세계 정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라이히스팍트라는 범지구적 동맹을 세워 독일인의 결단력을 강화시켰으나 세계 각지에서 벌인 도 넘은 외교 깡패짓은 호사다마가 되어 제 3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으로 돌아와, 독일의 패망을 앞당겼다. 결국 독일 입헌제국이 멸망하고 독일 연방공화국이 세워지게 된다.

역사

내전 이전:히틀러의 독일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내세운 자유주의는 이미 군국주의에 무뎌진 독일인에게 별로 달갑지 않게 다가왔다. 국민들에게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저 협상국의 개로 여겨졌으며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 경제 대공황과 초인플레이션은 국민들을 고생하게 만들었다. 이런 참혹한 환경 속에서 히틀러와 같은 극단주의적 사상가들이 배출되는건 당연지사였다. 히틀러는 소규모 정당이던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속칭 나치의 수장이 되어 점차 독일 국회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결국 히틀러는 수권법을 통과시키며 총리를 넘어 총리+대통령을 합친 총통(퓌러)에 등극한다.

독일 내전

구 협상국 일원이던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국은 이런 독일의 행보에 큰 위협을 느꼈다. 이후 치뤄진 런던 회의에서 계속되는 나치 독일의 폭주에 대한 강경 대응을 예고했으며 또 다시 전쟁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독일 국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렇게 나치 독일의 지지도가 점점 떨어지는 와중 또 다른 세력인 1차 대전 시기의 장교 출신들이 반대로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련한 전투 경험으로 연합국의 공격에 대응할 능력이 있었으며 또한 국민들에게 제국 시절의 위상을 되찾겠다고 선언하여 큰 호감을 샀다. 이에 히틀러는 자신의 정권이 위협받는 것을 멈추기 위해 옛 장교들을 숙청시키려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되려 브릴론으로 도피한 장교들이 단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시민들과 국내 정치인들이 가담하여 독일 내전이 일어났으며 이 전쟁에서 장교 세력이 승리하였다.

내전 이후:빌헬름 3세의 독일

장교들은 내전 이후 잠깐동안 독일 군국주의 과도정부를 세웠으며 곧 네덜란드에 망명해있던 황제 빌헬름 2세가 귀환해 독일 입헌제국을 세웠다. 비록 황제는 빌헬름 2세였지만 실권은 장교들과 황태자 빌헬름 3세가 쥐고 있었는데, 빌헬름 3세는 총리로 취임하여 헌법을 창시하고 아버지의 권력을 제한했으며 대신 자신의 권력을 누렸다. 그렇다고 빌헬름 3세가 무능한 독재자는 아니었으며 3대 경제 정책으로 독일 내전 이후 다시 침체되던 독일의 경제를 회복시켰다. 한편 괴뢰 정부를 세울 것을 기대하고 독일 내전에서 반란군을 지원한 영국과 프랑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곧 독일에 온갖 내정간섭을 시도하였지만 빌헬름 3세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 결국엔 실패하고 만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적 간섭 시도는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반영, 반프 감정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독일 정부도 앞장서서 두 나라를 외교적 범죄국가라며 맹렬하게 비난했다. 또한 경제를 어느 정도 회복한 독일이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영역을 더욱 넓혀가면서 연합국 세력은 긴장하기 시작했고 국민들의 사기가 더욱 높아졌다. 이렇게 외부적 요인으로 시작된 독일의 극단적인 행보는 1938년 피렌체 사건으로 잘 나타난다. 피렌체 사건은 독일을 저지하려 했던 연합국과 연합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던 독일의 충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바로 독일이 이탈리아가 연합국과 교섭하는걸 포착하고 이탈리아에 군대를 보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결국 무솔리니가 프랑스로 망명하고 이탈리아는 독일의 동맹이 되었다. 이에 연합국이 바로 대치를 시작했지만 독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가리아, 터키와도 동맹을 맺었으며 마침내 1939년 9월 1일 연합국의 보호를 받던 폴란드를 침공하며 사실상 전쟁을 자의적으로 시작한다. 결국 연합국은 이제서야 군대를 보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