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연합
대동아 연방
東北亞聯合
大東亞聯邦

19521960
 

국기 국장
수도 신징新京, 한성漢城
정치
공용어 만주어, 한국어, 중국어
정부 형태 입헌군주제, 국가연합
대한국 군주大韓國君主 이강(1952-1955)
이우(1955-1960)
만주국 군주滿洲國君主 계운제(1952-1960)
입법 동아평의회東亞評議會
역사
연합 성립  
 • 한만우호조약 1952년 4월 18일
 • 동아전쟁 1952년 8월 - 1954년 6월
 • 연합 해체 1960년 5월 3일
지리
면적 1,355,237㎢
내수면 비율 3.0 %
인구
1955년 어림 78,630,000 명
동아 영토복합체 계보
東亞領土複合體系譜
동아합중국
東亞合衆國
1911-1936
동아제국
東亞帝國
1936-1951
동북아연합
東北亞聯合
1952-1960
아시아합중국
亞細亞合衆國
1988-현재

동북아연합(중국어: 東北亞聯合)은 1951년, 동아제국(東亞帝國)이 패망한 이후에 만주국(滿洲國)과 대한국(大韓國)간의 한만우호조약(韓滿友好條約)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 국가연합(國家聯合)으로서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에 대한 권리와 책무를 이행한 승계국가(承繼國家)임을 자청했다.[1]

동아전쟁(東亞戰爭, 1952-1954)의 발발 과정에서 미합중국(美合衆國)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몽골 전선(蒙古戰線)과 일본 내전(日本內戰)의 동북아연합군(東北亞聯合軍)이 동원되었다. 이후에는 중국내전(中國內戰, 1955-1965)으로 중화민국 연합정부(中華民國聯合政府)가 공식적으로 해체됨에 따라 상임이사국(常任理事國)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2]

동아전쟁 종전 이후에는 만주국대한국의 자치권을 각각 확대하고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를 유지 및 이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연합 설립 초기에 제정되었던 국기와 국장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이후 새롭게 출범한 '대동아연방'(大東亞聯邦)은 만주국대한국의 대등한 지위의 연방으로 구성된 것이었으나, 만주국 쪽의 인구와 경제력이 집중되었으며, 연방 내부의 실권조차 만주국 쪽에서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전부터 대한국 내에서는 분리 독립에 대한 열기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대한국의 분리 독립 요구가 더욱 거세지자 양측 연방 정부는 분리 독립 국민투표 협상이 개시했으며, 이에 1960년 2월 11일 실시한 분리 독립 투표로 70.4%의 분리 독립 지지를 받으면서 대한국의 독립이 확정되었으며, 1960년 5월 3일에 공식적으로 연합은 해체되었다.

동아제국의 패망과 한만 관계

1951년 8월 9일, 소련(蘇聯)은 소련-동아 중립조약(蘇聯-東亞 中立條約)의 무효를 선언하고 대동선전포고를 선언했다. 곧이어 대대적으로 만주(滿洲)와 외몽골(外蒙古)을 침공했다. 당시 동북관군(東北關軍)의 정예 병력이 동남아시아(東南亞細亞)에 주둔해 있던 탓에 겨우 징용 인원만 유지하던 동아제국군(東亞帝國軍)과 동북관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무장해제되었으며, 동아제국의 괴뢰 정권인 신강왕국(新疆王國)과 몽강제국(蒙疆帝國)은 제대로된 저항도 하지 못한채 붕괴되었다. 그 결과 소련군(蘇聯軍)은 만주, 몽골, 한반도(韓半島)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소련은 이때 하얼빈(哈爾濱), 뤼순(旅顺) 및 러시아 제국(Pоссiйская Имперiя) 당시 조차지(租借地)를 유지하려고 시도했던 북만주(北滿洲)를 옛 러시아 제국의 영향권이었던 점을 이유로 재획득하려고 하였다. 또한 전 만주 점령지에 포함되어 있는 외몽골내몽골을 통합하여 몽골인민공화국(蒙古人民共和國)으로 소련의 위성국화 및 편입시키려 했으나 무산되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소련은 결국 만주는 물론 모든 조차지까지 포기하게 되었다.

중화민국 연합정부는 불법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던 만주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으나, 동아제국 패망 이후에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동북임시정부(東北臨時政府)의 주석으로서 만주 지역의 경제개발을 주도해 '동북왕'(東北王)으로 칭송받던 가오강(高崗)과 봉천당(奉天黨) 출신의 라오수스(饒漱石)를 중심으로 한 분리주의 운동이 태동되면서 제동이 걸렸다. 특히나 전쟁 이후 연성 독립론(聯省獨立論)으로 군벌들의 독립 요구가 극심했던 중화민국 연합정권은 중만조약(中滿條約)을 통해 어쩔 수 없이 만주국(滿洲國)의 주권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이후 1952년 2월에 만주국은 형식적으로 아이신기오로 푸이(愛新覺羅溥儀)를 군주로 앞세운 사회주의 입헌군주국(社會主義立憲君主國)이라는 국가 형태로 수립되었다.

대한국(大韓國)은 동아제국(東亞帝國)에서 실질적인 전범행위를 적극 저질렀던 전범국으로 인정되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내용에 따라 양주군(楊州郡)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가 설치되었다. 허나 미합중국의 내정 통치를 곱게 보지 못했던 승전국들은 극동위원회(極東委員會)의 결의에 따라 최고사령부의 한국 국내 정책에 대한 관여를 일절 금하는 한편, 명목상의 최고사령관과 민정 장관을 통한 간접 통치를 실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각주

  1. 소련미국을 상대로 국가승계(國家承繼)를 인정받았으나, 과거 동아합중국동아제국의 소속국이었던 주변국들에 의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2. 허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승국 대우를 받았던 다른 상임이사국과는 달리, 전범국(戰犯國)을 계승한 국가라는 점에서 명분적 문제와 더불어 협소한 국제 영향력 등을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후 1960년 연합이 해체되면서 아시아 합중국(亞細亞合衆國)이 상임이사국 지위를 승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