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와 동지들(Roma et socii, Ῥώμη καὶ ἑταῖροί)은 제이위키의 창작자 블파가 제작한 세계관으로, 합작 세계관이었던 해뜨는곳의 십자가가 해체된 이후 블파가 창작한 국가들을 이 세계관으로 이동하였고, 더불어 일부 국가를 신설하여 개설하였다.

로마와 동지들은, 현대까지 살아남은 로마 제국이라는 If로 구상되었다. 전 유럽의 유일한 보편 제국, 세계관은 재에 가려진 옛 영광을 파내고 재조명한다. 로마가 굴복당하지 않았더라면, 역사가 바뀔 수 있다면? 로마는 어떻게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가? 이 세계관에서는 이러한 지점을 재조명한다.

특징

로마와 동지들에서 동로마 제국은 13세기까지 현실 역사와 동일하다. 4차 십자군으로 인해 중앙 정부가 붕괴되면서 수도권과 유럽 영토는 라틴 제국과 베네치아를 위시한 십자군 국가들(프랑코크라티아)이 장악했고 이피로스와 트라페준타, 그리고 니케아에서 라틴인들과 가톨릭 십자군을 배격하며 중앙정부 회복을 위해 나선 지방정권들이 난립했다.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지 57년만에[1], 요안니스 4세 라스카리스의 섭정이자 공동황제였던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공성군을 파병하였을 때, 베네치아 함대의 후퇴를 통해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통해 로마인의 도시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라스카리스를 폐위시키고 유폐한 지 30여년이 흘러 미하일의 아들인 안드로니코스 2세에 이르러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제국을 온전히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 여기서부터는 가상역사와 첨가되어 있습니다.)
1287년, 28세의 젊은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가 친라스카리스파 계열 소아시아 권세귀족이었던 콘스탄티노스 11세 암피클리토스에 의해 폐위됐다. 찬탈로 시작한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요안니스 4세가 그러했듯이, 안드로니코스 2세 역시 눈알을 지지는 형벌을 당하고 유폐된 것을 마지막으로 찬탈로 끝났다. 1282년 무리한 원정과 교회통합 건으로 중앙 교회의 반발을 산 미하일 8세가 허망하게 전쟁터에서 병사한 지 5년만의 일이었다.

새로 등극한 암피클리토스 왕조는 라스카리스 왕조의 신흥 지지자였다. 1225년의 요안니스 3세 재위기에 처음 등장했는데 당시 가주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부인 테오도로스 암피클리토스였다. 그는 니케아 제국의 신흥귀족이자 후임자인 요안니스 3세와 동년배로, 제국 변경에서 룸의 팽창을 저지하는 실적을 세우며 고공행진했고, 황제와 전장에서 친밀감을 다졌다. 메가스 이테리아르키스(Megas Hetairearches)를 역임했던 테오도로스는 1233년을 지나 1235년 즈음에 들어 쿠로팔라티스(Kouropalates), 메가스 스트라토페다르키스(Megas Stratopedarches) 등의 고위 관직까지 올라 황제를 보좌하여 제국군을 이끌면서, 암피클리토스를 고위 귀족가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부친인 요안니스 암피클리토스는 아버지 테오도로스가 요안니스 3세의 신임받는 지휘관이었던 관계로 일찍이 요안니스 3세의 아들 테오도로스 2세의 친우로 군사 부분 말고도 개인사에 있어 돈독한 우정을 지녔다. 요안니스는 정치적인 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황제가 추진하는 정책의 실무를 맡아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이외에 팔레올로고스 가문을 경계했던 테오도로스 황제를 도아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고난에 빠트렸는데 이는 훗날 팔레올로고스 가문과 적대관계에 놓여 암피클리토스 왕조가 궁지에 몰리고 제위를 찬탈하기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다.

1258년 테오도로스 2세가 발작으로 요절하고, 어린 외아들 요안니스 4세가 즉위하자 요안니스 암피클리토스는 미하일 8세를 위시한 팔레올로고스파들에 밀려 님페온 외곽으로 물러났고, 암피클리토스 가문은 지방귀족으로써 소아시아의 방어에만 집중할 뿐 한동안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1282년 미하일 8세가 원정 도중 전장에서 병사하자, 암피클리토스 가문은 안드로니코스 2세 시대 중앙정계로 다시 불러들여졌다. 부황의 정책 방향을 틀고 대사면을 선포한 안드로니코스 정부의 정책 기조에 발맞춰 그 선두에는 미하일 황제를 파문한 아르세니오스파와 친라스카리스의 암피클리토스 가문이 있었다.

1285년 요안니스가 사망한 뒤 가주가 된 콘스탄티노스 암피클리토스는 이미 1282년에서부터 안드로니코스 2세의 휘하에서 여러 정책 실무에 다시 참여하기 시작했다. 우연하게도 안드로니코스 2세와 사실상 또래였던 콘스탄티노스는 그의 충실한 2인자로 활동하면서 제국 내에서의 입지를 넓혔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요안니스와 달리 1286년부터 가문을 위한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용병과 해군 병력 다수를 해체시킨 안드로니코스 2세의 통치에 반발하면서, 점차 안드로니코스와의 관계를 훼손시킨 콘스탄티노스는 1287년 새해에 이르러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여전히 소아시아의 최대 지주이자 가장 많은 사병을 가느리는 암피클리토스 가문에서, 젊은 가주는 황가에 충성하기보다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붕괴를 선택했다.

콘스탄티노스 암피클리토스는 1287년 4월 3

이집트가 로마 제국에 복속된 것은 현실과 동일하나, 방계인 파벨라노스 가문이 왕조로써 군림하던 시절 쌓은 부를 통해 여전히 이집트에서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보존할 수 있었고, 7세기에 지속된 정치적 혼란과 이슬람 세력의 발흥으로 동로마 제국이 이집트 지역에 대한 통치력을 거의 잃자 파벨라노스 가문이 로마와 함께 이슬람 세력을 방어해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통치권이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일대로 쪼그라들면서, 이집트는 로마로부터 자연스레 독립하게 되었으며 신흥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국체를 보존한 만큼 오늘날까지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아프리카의 지도국으로 군림하였다.

아비시니아(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으로는 에티오피아)는 기존이 군주정이 유지됐지만 현실에서와 같이 제국이 아닌 왕국이라는 점이 다르다.

소속 국가

  • 로마 제국
    세계관의 대표국.

  • 이집트
    콥트 정교회의 거점국이자, 아프리카의 기독교 강대국.

  • 루스 차르국
    동북유럽의 강대국.

  • 아비시니아
    동아프리카의 대국이며, 이집트 교회와 함께 아프리카 교회의 양대산맥이 위치한 국가.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후손인 자그웨-솔로몬 왕조가 통치하고 있다.

소속 문서

(작성 예정.)

  1. 126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