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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아노 1세
Maximiliano I
산티아나에스테 왕가의 문장
산티아나에스테 왕가의 문장
지위
산티아나의 초대 국왕
재위 1867년 8월 15일 ~ 1889년 10월 7일
즉위식 1867년 8월 23일
후임자 막시밀리아노 2세
신상정보
출생일 1832년 7월 6일
출생지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사망일 1889년 10월 7일
사망지 산티아나 산티아나 루드비티오
가문 산티아나에스테가
부친 프란츠 카를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
배우자 샤를로트 드 벨지크
자녀 막시밀리아노 2세
루디아 데 산티아나에스테
이사벨 데 산티아나에스테

막시밀리아노 1세(영어: Maximiliano I, 1832년 7월 6일 오스트리아 ~ 1889년 10월 7일 산티아나 루드비티오)는 오스트리아 제국(Kaisertum Österreich)의 대공이자 멕시코 제2 제국(Imperio Mexicano)의 황제였으며, 산티아나(San Tiana)의 국왕이었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f I.)의 동생으로 오스트리아 해군 소장을 복무하여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총독이 되었고 1863년 프랑스의 멕시코 제국 초청으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의 딸 샤를로트와 함께 멕시코로 건너가 1864년 6월 10일 오스트리아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멕시코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멕시코 황제 당시 막시밀리아노 1세는 인디언농민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가부장적인 온정주의로 자애롭게 통치하려고 했다. 그는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Pablo Juárez García)의 혁신적 개혁들을 지지해 대토지 소유자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강제노역제도를 철폐하기로 마음먹었으며 베니토 후아레스가 몰수했던 엄청난 교회 영지를 돌려주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 집단과 대립했다.

그러나 국고가 완전히 바닥나 있었으므로 일상적인 비용을 자신이 물려받은 수입으로 메워야 했다. 1865년 남북전쟁 종결 후 미국이 먼로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했고 이에 아내 샤를로트가 유럽으로 건너가 나폴레옹 3세와 교황 비오 9세에게 남편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1867년 3월 프로이센의 압박을 받은 프랑스 군대는 철수했다.

이에 막시밀리아노 1세는 황제 퇴위를 거부하고 왕당파의 총사령관이 되었으나 베니토 후아레스의 멕시코군이 들고 일어나 케레타로(Santiago de Querétaro)를 포위했고 결국 막시밀리아노 1세는 1867년 5월 15일 항복했다.

이에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와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그리고 유럽의 많은 군주들이 막시밀리아노 1세를 살려달라고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요청했으며, 이에 케레타로 인근 교회에서 총살형을 진행하려던 베니토 후아레스는 막시밀리아노 1세에게 24시간 이내에 멕시코를 떠날 것을 조건으로 망명을 허락하였고, 막시밀리아노 1세는 급하게 멕시코를 떠날 수 밖이 없었다. 이후 망명길을 떠난 막시밀리아노 1세는 산티아나의 정착하게 되었다.

산티아나왕당파(Royalist)들은 막시밀리아노 1세를 국왕로 옹립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유럽권 지지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에 많은 유럽의 군주들과 유명 인사들이 지지를 표하기 시작했고, 이에 독단적으로 연방제에 입각한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연방주의자(Federalist)들은 왕당파가 전유럽적 지지를 등에 업으면서 우세를 차지하기 시작하자, 이에 정치적 영향력의 상실로 이어질까 두려워 하던 이들은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지양하고, 연방주의(Federalism)의 실현을 위하여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간 권력이 나뉜 연방으로 정부를 구성하되,헌법에 중앙 정부의 권한을 명시한 뒤 이후 최소한의 지방 통치 권한은 주에 귀속되는 체계를 확립할 것"이라는 조건하에 막시밀리아노 1세의 왕위 추대를 묵인하였다.

이후 산티아나의 국왕으로 옹립된 막시밀리아노 1세는 처음에는 본래 가문명인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House of Habsburg-Lothringen"를 사용했으나, 산티아나 내부의 국민적 감정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가문명과 성씨를 "산티아나에스테"(House of San Tianaeste)로 바꿈에 따라 독립적인 왕가를 수립하게 되었다. 그뒤 헌법에 입각한 입헌군주제의 시행을 선포하여 스스로의 왕권을 축소시키는 등 과거 멕시코 제국에서의 오점을 반면교사로 삼고 산티아나의 국왕으로서 발 빠른 대처를 하였다. 그는 독립 직후부터 지속된 혼란한 내부적 상황에서 낙후된 산티아나의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열악한 농촌 환경과 교육 개선에 힘썼고, 오스트리아 제국 출신이었지만, 산티아나에서 민심을 얻지 못한 오스트리아계 섭정관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막시밀리아노 1세의 초기 치세에 진행되던 삼국 동맹 전쟁(Guerra de la Triple Alianza)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는데, 당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산티아나가 형식상의 참전과 함께 브라질의 막대한 양의 물자를 공급하여 경제 발전과 산업화를 꾀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이 전쟁 이후로 껄끄러운 관계에 있던 브라질 제국과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 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와 같이 세계에서 손에 꼽는 육류 생산 및 수출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유럽권 출신의 이주민(특히 이탈리아스페인 출신)들이 산티아나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산티아나의 수도였던 루드비티오(Ludvitio)는 경제적, 사회적 중심지로 발전하였다.[1]

특히 막시밀리아노 1세는 브라질 제국이 몰락을 지켜보았기에, 절대적인 군주권을 손에 쥘 시 왕가의 몰락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함에 따라, 의회의 결의안에 대한 거부권 및 내각의 승인하에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리로서 형식상의 입헌 군주로서의 기능을 강화했고, 새로 제정한 산티아노 왕국 헌법에 따라 또한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규정하면서, 군주권의 형식적 권리를 인정하도록 하여 왕실의 독단적인 정책 추진을 미연에 방지하여 왕권을 약화시키는 대신, 왕정파연방파의 두 정치 세력간의 관계에 중립적인 위치로서 이념적, 지역적 갈등의 조율자 역할을 강화했다.

혼란했던 산티아나의 안정화와 함께 의회 정치의 발현을 꾀하던 막시밀리아노 1세는 1889년, 갑작스런 패혈증으로 향년 51세로 숨을 거두었다. 산티아나의 왕위는 그의 장남이었던 막시밀리아노 2세(Maximiliano II)가 계승하였다.

각주

  1. 그 이전까지 과도 공화정 시기에는 사실상 리베네그로(Rivenegro)가 수도 역할을 했는데, 왕정 선포 이후까지 리베라 당의 거점지로서 기능했고, 이후에도 산티아나의 제2의 수도로서 자리매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