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servative and Unionist Party
정식 명칭 보수연합당
통용 명칭 보수당 (Conservatives)
슬로건 Build Back Better.
더 나은 재건.
창당일 1834년 (보수당)
당명변경 1912년 (보수연합당)
전신 토리당
이념 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영국 연합주의
왕실유지론
친유럽주의[1]
유럽회의주의[2]
스펙트럼 중도우파
대표 데이비드 캐머런 / 5선 (53-57대)
귀족원 264석 / 786석 (33.6%)
서민원 427석 / 650석 (65.7%)
상징색 파랑(#0087DC)
당원 수 172,437명 (2022년 11월)

보수연합당(Conservative and Unionist Party), 통칭 보수당(Conservative Party)노동당과 함께 영국의 두 주요 정당 중 하나이다. 2020년 총선에서 승리해 현재 집권당이다. 보수당은 2010년부터 영국의 집권당 지위를 유지 중이다. 보수당의 스펙트럼은 중도우파에 걸쳐있으며, 일국보수주의자, 대처주의자, 전통보수주의자를 포함한 다양한 이념적 파벌을 포함한다. 현재 보수당은 264명의 귀족원 의원, 427명의 서민원 의원을 의회에서 보유 중이며, 연마다 보수당 회의를 개최한다.

보수당은 1834년 토리당에서 설립되었으며, 자유당과 함께 19세기를 양분한 두 정당 중 하나였다. 1912년 자유연합당과 합병하여 현재의 보수연합당이 성립되었다. 1920년대에 노동당은 보수당의 주요 경쟁자가 되었다.

2010년 보수당은 자유민주당과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2015년 총선 이후 보수당은 단독과반을 달성하며 단독정부를 구성했다. 2020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1931년 이후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하며 압도적 다수당이 되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수상은 2005년 대표로 취임하여 현재까지 17년간 직무를 수행 중이며, 그중 12년은 총리로써 재임했다. 이는 보수당의 상징 마가렛 대처 전 수상을 뛰어넘는 기간이다.

보수당은 역사적으로 보호주의를 주장했지만 1980년대부터 규제 완화, 민영화, 시장화를 포함한 자유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했다. 보수당은 또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독립뿐만 아니라 통일된 아일랜드를 반대하는 영국 연합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자치권 이양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수당은 대영제국의 지속과 유지를 지지했다.

보수당은 유럽연합에 대해 다양한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유럽회의주의자와 친유럽주의자가 공존하고 있다. 보수당은 캐머런 내각이 실시한 2016년 국민투표에서 EU에 잔류하기로 결정한 후 지도부는 "Britain Stronger in Europe"이라는 슬로건을 선보이며 강력한 친유럽주의적 입장으로 선회했다. 역사적으로 사회보수주의적 접근방식을 취했지만, 2014년 연립내각에서 동성혼의 합법화, 2016년 전투병과에 여성 복무 허용, 의료용 대마초 합법화 등의 사회정책을 펼치며 사회 정책은 더 자유로워졌다. 독립적인 핵무기 정책과 NATO 회원국에 대한 상호방위 약속을 포함한 강력한 군사적 역량을 선호하기도 한다.

현대 영국의 정치사에서 많은 부분은 도농갈등을 나타냈다. 보수당의 투표 및 정치자금의 기반은 역사적으로 유주택자, 사업자, 농부, 부동산 개발업자 및 중산층, 시골 및 교외 유권자였다. 그러나 2016년 EU 국민투표 이후 보수당은 유럽연합 노동자의 이동의 자유로 인한 피해를 이야기하며 전통적으로 노동당을 지지했던 중소 도시지역의 노동계급 유권자를의 심리를 자극했다.

역사

에드워드 히스 (1965-1975)

에드워드 히스 총리

에드워드 히스의 1970-74년 내각은 영국을 지금의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 EEC에 가입시킨 것으로 유명하지만, 당시 보수당 우익은 1973년부터 2년간 지속된 경기침체로 쇠퇴하는 영국 제조업 종사자들의 파업을 통제하지 못할 것임을 우려해 반대했다. 또 결국 EU로 발전된 EEC에 가입했기 때문에, 영국의 EEC에서의 회원자격이 EU로 그대로 유지되는지는 보수당 내에서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히스는 1970년 6월 집권했고, 다음 총선은 1975년 중반에야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탄광 파업으로 인한 국가비상사태 선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1974년 2월 총선을 실시했다. 하지만 총선의 결과는 노동당보다 불과 4석을 더 얻는 수준으로 교착되면서, 히스는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자유당과의 협상에 실패한 이후 총리직을 사임했다. 결과적으로 해럴드 윌슨과 노동당이 연립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줬다. 1974년 10월 보수당이 정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노동당이 과반수를 넘기면서 끝났고, 히스의 시대 역시 함께 끝났다.

마가렛 대처 (1975-1990)

선거에서의 패배는 보수당에 대한 히스의 통제력을 약화시켰고, 마가렛 대처는 1975년 지도부 선거에서 그를 해임했다. 1970년대 영국은 20% 이상의 높은 인플레이션이 10% 미만으로 떨어졌다. 실업률이 상승했고, 1978-79년 겨울은 "불만의 겨울"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파업소동이 지속되었다. 대처는 1979년 총선에서 "공약의 전시"에 집중하기보다는 당의 철학에 집중한 연설로 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총리로서 대처는 국유화, 강력한 노동조합, 많은 규제, 높은 세율 및 보편적 복지국가를 용인하는 정치권의 흐름 "포스트워 컨센서스"의 기반인 온건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대처는 국민보건서비스를 직접 건드리지 않았고, 이미 시행 중인 냉전 정책을 지지했지만 언제든 그것을 수정하기 위한 준비를 갖춰놨었다. 오래된 포스트워 컨센서스를 대체하기 위해 대처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영국과 미국 지식인들의 사회적, 경제정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대처주의라고 알려진 이념을 구축했다. 대처는 너무 많은 사회민주주의 정책이 영국 경제를 잠재적으로 쇠퇴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대처 내각은 국유산업의 민영화와 노동조합의 권한 축소를 기반으로 하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자유시장적 접근방식을 취하는 경제적 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또 대처는 노조의 기존 활동방식이 야비한 파업을 통해 임금을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해, 수익성이 없는 사업을 계속해서 공적 자금을 통해 수혈해 경제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대처의 가장 크고 성공적인 정책으로 평가받는 공공주택 세입자의 주택매입 지원책이었다. "거주권"은 1940년대 후반에 등장했지만 보수당의 지지를 얻기에는 포스트워 컨센서스에 대한 너무 큰 도전이었다. 대처는 정치 입문 초기부터 이 아이디어가 1920년대에 등장한 "재산소유 민주주의"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지해왔다. 일부 지역 보수당에서는 1960년대 후반, 수익성 있는 지역의 공공주택 판매 계획을 실시했고 1970년대까지 많은 노동계급 유권자들이 할인된 가격에 집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대처의 노력은 새로 유주택자가된 유권자들의 보수당 투표 유인을 높였다.

대처는 1983년과 1987년, 보수당을 압도적 다수당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의 지도력과 공공주택 세입자의 주택매입 지원책과 같은 정책으로 지지자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최고 수준에 도달한 높은 실업률과 강도높은 경제 개혁, 파업데 대한 강경대응으로 사회의 특정 분야에 대한 지지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실업률은 1979년에서 1982년 사이 두 배로 증가했는데, 이는 주로 대처의 인플레이션 대책이 통화주의적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영국 경제는 북해 유전을 통한 세수를 통해 부족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초 보수당이 인기가 없던 시기는 노동당의 위기와 겹쳐 양당이 모두 고전한 시기였다. 사회민주당은 1981년 설립되어 20명 이상의 노동당 탈당파가 가세했으며, 이들은 자유당과 연합해 1982년 초 SDP-자유당 동맹은 여론 조사에서 보수당을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 6월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전하고, 영국 경제가 회복되면서 보수당은 빠르게 여론조사에서 1위를 탈환했으며 결국 1983년 총선에서 압도적 과반수로 승리했다.

대처는 이제 새로운 노동당 지도자가 취임한 이후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만났다. 노동당은 새 대표를 선출하고 다음 선거에서 반드시 보수당 내각을 끝장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대처의 두 번째 내각에서 보수당과 노동당의 지지율은 계속해서 엎치락 뒤치락했다. 게다가 SDP-자유당 동맹 역시 때때로 1위를 차지하는 등 대처 내각은 꾸준한 위협을 받았다. 1987년 6월 총선 당시 경제는 낮은 인플레이션과 낮은 실업률을 유지했으며, 보수당은 이전 선거보다는 적은 의석을 확보했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과반수를 확보해 두 번째 연속 선거 승리를 이룩했다.

사퇴하는 마가렛 대처 총리

1989년의 인두세 도입은 대처의 정치적 몰락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1989년 여름, 대처는 1986년 이후 처음으로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에 뒤쳐졌고, 이후 보수당의 애매한 위치는 199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해 하반기까지 노동당은 보수당보다 최대 16%p 앞섰고, 총리가 되려는 노동당의 키녹을 막기 위해서는 보수당이 새로운 카드를 선보여야 했다. 게다가 경제는 또 다른 경기 침체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런 당 내외의 긴장 상황은 결국 보수당의 마이클 헤셀틴 의원의 리더쉽 도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몇 달 후인 1990년 11월 28일 대처는 총리직에서 사임해 새로운 보수당 지도자가 당을 규합해 선거에 나서게 되었다. 또 당시 대처의 인기는 낮은 편이었기 때문에 선거를 이길 수 있을 확률도 더 높아졌다.

존 메이저 (1990-1997)

정치적 암흑기 (1997-2005)

데이비드 캐머런 (2005-)

정책

역대 선거결과

총선거

유럽의회 선거

각주

  1. 데이비드 캐머런 현 총리, 존 메이저 전 수상 등 보수당 지도부
  2. 보리스 존슨 등 비주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