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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연호 |
건헌建憲
1829년 2월 4일 ~ 1844년 9월 9일건헌 1년 2월 4일 ~ 건헌 16년 9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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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咸平
1862년 1월 1일 ~ 1888년 12월 31일함평 1년 1월 1일 ~ 함평 27년 12월 31일 |
대한 초대 황제
世祖 太皇帝 · 세조 태황제
世祖 太皇帝 · 세조 태황제

익평군 [1]益平君, 성원군의 종질이자 영종의 종손, 승헌대부
1826년 9월 26일 ~ 1844년 9월 10일가평 12년 8월 25일 ~ 광무 원년 9월 10일 구국도원수
1834년 11월 4일 ~ 1844년 9월 1일건헌 6년 10월 4일 ~ 건헌 15년 9월 1일 황제
1844년 9월 10일 ~ 1861년 7월 19일광무 원년 9월 10일 ~ 광무 18년 7월 19일 한국왕 [2]경나라에서 봉해준 작위
1844년 10월 8일 ~ 1861년 7월 19일광무 원년 10월 8일 ~ 광무 18년 7월 19일 출생
1809년 10월 4일경성 18년 8월 25일 · 공주부 안성군 즉위
1844년 9월 10일 (35세)광무 원년 9월 10일 · 경복궁 근정전 사망
1861년 7월 19일 (51세)광무 18년 7월 19일 · 경복궁 강녕전 본관
전주 이씨 휘
희성 · 喜聲 → 요 · 繇 자
강재 · 康哉 부모
장조 무황제 / 성경장황후 형제자매
2남 2녀 중 장남 황비
장경태황후 능묘
헌릉 · 憲陵 묘호
세조 · 世祖 시호
문헌무열의명효흠태황제文憲武烈義明孝欽太皇帝 예장禮壯 | |||
대한 초대 황제
世祖 太皇帝 · 세조 태황제
世祖 太皇帝 · 세조 태황제

익평군 [1]승헌대부
1826년 9월 26일 ~ 1844년 9월 10일가평 12년 8월 25일 ~ 광무 원년 9월 10일 구국도원수
1834년 11월 4일 ~ 1844년 9월 9일건헌 6년 10월 4일 ~ 건헌 15년 9월 9일 황제
1844년 9월 10일 ~ 1861년 7월 19일광무 원년 9월 10일 ~ 광무 18년 7월 19일 한국왕
1844년 10월 8일 ~ 1861년 7월 19일광무 원년 10월 8일 ~ 광무 18년 7월 19일 출생
1809년 10월 4일경성 18년 8월 25일 · 공주부 안성군 즉위
1844년 9월 10일 (35세)광무 원년 9월 10일 · 경복궁 근정전 사망
1861년 7월 19일 (51세)광무 18년 7월 19일 · 경복궁 강녕전 본관
전주 이씨 휘
희성 · 喜聲 → 요 · 繇 자
강재 · 康哉 부모
장조 무황제 / 성경장황후 형제자매
2남 2녀 중 장남 황비
장경태황후 능묘
헌릉 · 憲陵 묘호
세조 · 世祖 시호
문헌무열의명효흠태황제文憲武烈義明孝欽太皇帝 예장禮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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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초대 황제 세조 태황제의 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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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위천평 이설지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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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민수 국근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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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수안 망전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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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곡화약
인도차이나 영향력 확대 시암과 대남 사이에 지속적인 영토갈등이 발생하자, 대한의 중재로 시암의 수도 반곡에서 국경을 확정하고 화친을 도모하였다. 광무인도지역
인도 영향력 확대 영령 인도에서 인도인들이 항쟁을 시작하니 방갈랄국 번왕이 이를 도와 막와이 황제를 구하고 조정을 다시 세워 영길리에 대항했다. 그러나 이내 영군이 도착하자 그들의 압도적인 화력에 패퇴하여 방갈랄 일대에서 전쟁이 계속되었다. 번왕이 성상께 원병을 요청하자 친히 대군을 보내어 남방의 난리를 평정케 하고 둘 사이를 중재하여 난리를 잠재우고 평화를 세웠다. 캘커타 조약으로 방갈랄은 북서쪽으로 델리와 맞닿은 영토를 영국에 반환하였고 막와이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막와이 황제는 방갈랄에서 지내게 되었다. 갑진약조
중화 질서로 복귀 경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북적을 황토고원으로 내쫓으니 장성 이남에 평화가 만연하니 천자께서 산해관 동북쪽을 성상께 내리고 한왕에 봉하셨다. 이에 성상께서도 성대하게 조공을 바치고 사신을 보내어 만년화평을 결의했다. 백력화약
북만주 완충지역 확보 대한의 지원을 받은 몽고와 북려국은 북만주에서 노서아를 몰아내고 나라를 세우자 대한은 이를 승인하고 조공을 받았다. 노서아의 사신이 이를 따졌으나 노서아는 크림전쟁에서 지고 있었고 머나먼 극동이라 어찌하지는 못했다. 포와입공
태평양 영향력 확대 소립원 제도(오가사와라 제도)에 사람을 보내어 개간하도록 하였고, 하와이(포와도) 왕의 원조 요청을 받고 보호령으로 삼았다. 임술화약
대남국 보호 대남이 서반아 선교사를 처형한 사건을 계기로 서반아와 불란서는 대남에 선전포고하고 병력을 파견했다. 성상께서도 사신을 보내어 군을 물리도록 설득하였으나 실패했다. 이에 성상은 조공국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를 보내 주둔하도록 했다. 불란서는 이를 무시하고 군사행동을 지속했으나 이내 대패하고 화친을 청했다. 따라서 남월은 불란서, 서반아에 개항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포교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게 되었다. |
광무대한국제(사불이치)
황권 축소 · 헌법 제정 선왕의 잘못으로 계묘정난이 일어나 종사를 그릇칠 뻔 했으니, 황권을 천심민심에 돌려주고 의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제 군주가 정사를 논하지 않고도 종사를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황제는 이제 일부 고관대작의 인사와 조약의 성사, 군의 출병만을 명할 것이다. 내치와 정무는 대신이 처리하도록 하라. 광무경국대계
국토개발확대 고종의 연희 유신이후 150년이 다되어 국토 강산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만민이 광명 속에 사는 것은 아니다. 발전이 더딘 부를 중심으로 경제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이행토록 하였다. 관립가옥
공공주택 임대 도시로 이주하는 백성이 늘어남에 따라서 가옥의 수가 부족해지자 조정이 주도하여 집을 지어주고 헐값에 임대해주는 후생정책을 펼쳤다. |
광무삼군개혁
군제 최신화 의료병, 포병, 공병, 척탄병, 수병과 같은 전문병 양성을 중심으로 군사 교육을 개혁했으며, 징병 중심의 군사 체계에서 모병 중심으로 변혁하여 병력 수를 다소 줄이는 대신 화포, 군함과 같은 병기를 늘려 외환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사통지업
교통기반 확장 백력으로 가는 경백로, 심양으로 가는 경심철로, 동래로 가는 경동철로, 나주로 가는 경라철로, 인천으로 가는 경인철로 등을 건설하고 복선으로 확장하였으며, 열도에도 평궁과 산구를 있는 평산철로과 평궁과 강호를 잇는 평강철로 청산과 강호를 있는 청강철로 등의 건설을 독려했다. 심양과 막주를 잇는 요동철로도 광무 때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 |
以德爲天平 以說止戰火덕으로써 천하 만물에 평화를 가져오고 말로써 전쟁을 멈춘다.
|
君舟民水 國根是民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라
나라의 근본은 국민이다. |
天下雖安 忘戰必危천하가 비록 평안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 |
조선 틀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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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초대 황제 광무제의 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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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곡화약
인도차이나 영향력 확대 시암과 대남 사이에 지속적인 영토갈등이 발생하자, 대한의 중재로 시암의 수도 반곡에서 국경을 확정하고 화친을 도모하였다. 광무인도지역
인도 영향력 확대 영령 인도에서 인도인들이 항쟁을 시작하니 방갈랄국 번왕이 이를 도와 막와이 황제를 구하고 조정을 다시 세워 영길리에 대항했다. 그러나 이내 영군이 도착하자 그들의 압도적인 화력에 패퇴하여 방갈랄 일대에서 전쟁이 계속되었다. 번왕이 성상께 원병을 요청하자 친히 대군을 보내어 남방의 난리를 평정케 하고 둘 사이를 중재하여 난리를 잠재우고 평화를 세웠다. 캘커타 조약으로 방갈랄은 북서쪽으로 델리와 맞닿은 영토를 영국에 반환하였고 막와이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막와이 황제는 방갈랄에서 지내게 되었다. 갑진약조
중화 질서로 복귀 경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북적을 황토고원으로 내쫓으니 장성 이남에 평화가 만연하니 천자께서 산해관 동북쪽을 성상께 내리고 한왕에 봉하셨다. 이에 성상께서도 성대하게 조공을 바치고 사신을 보내어 만년화평을 결의했다. 백력화약
북만주 완충지역 확보 대한의 지원을 받은 몽고와 북려국은 북만주에서 노서아를 몰아내고 나라를 세우자 대한은 이를 승인하고 조공을 받았다. 노서아의 사신이 이를 따졌으나 노서아는 크림전쟁에서 지고 있었고 머나먼 극동이라 어찌하지는 못했다. 포와입공
태평양 영향력 확대 소립원 제도(오가사와라 제도)에 사람을 보내어 개간하도록 하였고, 하와이(포와도) 왕의 원조 요청을 받고 보호령으로 삼았다. 임술화약
대남국 보호 대남이 서반아 선교사를 처형한 사건을 계기로 서반아와 불란서는 대남에 선전포고하고 병력을 파견했다. 성상께서도 사신을 보내어 군을 물리도록 설득하였으나 실패했다. 이에 성상은 조공국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를 보내 주둔하도록 했다. 불란서는 이를 무시하고 군사행동을 지속했으나 이내 대패하고 화친을 청했다. 따라서 남월은 불란서, 서반아에 개항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포교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게 되었다. 광무대한국제(사불이치)
황권 축소 · 헌법 제정 선왕의 잘못으로 계묘정난이 일어나 종사를 그릇칠 뻔 했으니, 황권을 천심민심에 돌려주고 의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제 군주가 정사를 논하지 않고도 종사를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황제는 이제 일부 고관대작의 인사와 조약의 성사, 군의 출병만을 명할 것이다. 내치와 정무는 대신이 처리하도록 하라. 광무경국대계
국토개발확대 고종의 연희 유신이후 150년이 다되어 국토 강산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만민이 광명 속에 사는 것은 아니다. 발전이 더딘 부를 중심으로 경제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이행토록 하였다. 관립가옥
공공주택 임대 도시로 이주하는 백성이 늘어남에 따라서 가옥의 수가 부족해지자 조정이 주도하여 집을 지어주고 헐값에 임대해주는 후생정책을 펼쳤다. 광무삼군개혁
군제 최신화 의료병, 포병, 공병, 척탄병, 수병과 같은 전문병 양성을 중심으로 군사 교육을 개혁했으며, 징병 중심의 군사 체계에서 모병 중심으로 변혁하여 병력 수를 다소 줄이는 대신 화포, 군함과 같은 병기를 늘려 외환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사통지업
교통기반 확장 백력으로 가는 경백로, 심양으로 가는 경심철로, 동래로 가는 경동철로, 나주로 가는 경라철로, 인천으로 가는 경인철로 등을 건설하고 복선으로 확장하였으며, 열도에도 평궁과 산구를 있는 평산철로과 평궁과 강호를 잇는 평강철로 청산과 강호를 있는 청강철로 등의 건설을 독려했다. 심양과 막주를 잇는 요동철로도 광무 때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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