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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사건 薪島事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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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1975년 3월 6일 ~ 1975년 6월 1일 | |||||
장소 | |||||
조선공화국 평안북도 용천군 신도면 | |||||
원인 | |||||
중국의 신도 요구와 조선의 거절, 중국의 무력 침공 | |||||
교전 세력 | |||||
조선공화국 | 중화민국 | ||||
지휘관 | |||||
윤보선 유진산 최규하 정승화 장태완 |
장제스 옌자간 장웨이거 마잉주 | ||||
병력 | |||||
1천여명 | 4천여명 | ||||
피해 규모 | |||||
5명 사망, 32여명 부상 | 25명 사망, 100여명 부상 | ||||
결과 | |||||
중국군의 철수 조선의 신도 회복 | |||||
영향 | |||||
조선내 반중 정서 확대 조선의 탈중국 중립 외교노선 시작 |
개요
1975년 3월 중국이 압록강 하구의 조선 평북 용천군의 신도(薪島)를 침공한 사건.
그러나 국제 사회에서 강한 압박, 조선군도 외교적 해결책이 통하지 않자 무력으로 저항하여 중국군은 3개월만에 신도에서 철수하였고 사건이 마무리된다.
이 사건으로 중국의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가 크게 악화되었으며 유력한 동맹국이었던 조선도 탈중국, 친서방 외교노선을 천명하기 시작하면서 실익은 아무것도 없는 20세기 중국 정부 최악의 선택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