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신동아


데스티니634 창작세계관
[ 펼치기 · 접기 ]


신 동아시아
新東亜細亜
파일:신동아배너.png
부제 わが祖国
나의 조국
시작일 2024년 3월 17일
작가 데스티니634
장르 일뽕, 정치, 외교, 대체역사
저작권 ×

개요

신동아시아(新東亜細亜)는 "임진왜란을 일본이 승리했다면?"에서 시작해 역사가 개변된 데스티니634의 세계관이다. 2024년 3월 17일 최종기획됐고 곧 연재될 예정이다.

역사

임진왜란

첫 분기점은 1587년, 이순신이 녹둔도 전투에서 여진에 의해 전사하면서 시작된다. 이에 따라 조선 수군은 실제 역사와 같은 활약을 할수 없게 되었다.

1592년, 일본 전국을 통일한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대륙 정벌의 야망을 품고 그 발판으로서 조선 침략을 획책했다. 전국시대에 단련된 일본군의 전투력과 기술력은 평화에 젖었던 조선군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불과 2주만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휘 아래 한성까지 일본군이 진출한 가운데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의 활약으로 전라도를 사수할 가능성이 보였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의해 옥포에서 대참패를 당하고 일본은 조선수군을 무력화여 전라도를 해상 봉쇄하게 되었고 결국 전라도 또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점령되자 일본은 해상보급, 그리고 전라도에서의 현지조달까지 충족하였다.

이어 가토 기요마사가 평양성을 공격하자 선조는 다시 의주로 도주했다. 이로서 고니시는 한성을, 가토는 평양을, 모리 가쓰노부는 전라도를 취하게 된다. 같은 시기 4군 구로다 나가마사는 함경도를 공격하여 두만강까지 돌파했다.

이 시점에서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미 주요 지역이 모두 넘어간 판국에 명에선 반대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만력제는 자식의 나라 조선을 도우지 않을수 없다는 의지를 보이며 이여송을 필두로 대조선 원군을 파병하기 시작하였다.

명군의 전격적인 개입에 선조는 일본군을 몰아낼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는 빗나갔다. 이미 곡창지대와 바다를 모두 장악한 일본은 하삼도 지방에 의병 토벌을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겨둔 채 평양성으로 올려보냈다.

이에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은 서로의 명운을 걸고 2차례나 평양성에서 충돌했으나 놀랍게도 두번의 평양성 공방전에서 일본군은 조명연합군의 모든 병력을 격퇴했다. 도요토미눈 이 때야말로 명을 정복할 적기라고 판단,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북으로 진격해 요동을 노리라고 명령하였다.

1593년 겨울, 조선 반도는 사실상 전 지역이 일본군의 통제 하에 들어섰고 선조는 북경으로 망명하였으며 가토와 고니시가 양 축을 맡은 요동정벌군은 요동을 향해 발진했다. 요동까지 퇴각한 이여송은 황제에 상주하여 천하 각지에서 징발한 원군을 얻은 한편 조선군 패잔병들까지 규합하여 방어를 준비하였으며, 이 전투가 바로 1593년 1월의 요동성 전투이다.

반면 일본 측의 정요군(征遼軍) 역시 면밀히 진용을 갖춰 진군했다. 일본은 조선의 현지 부역자(지역 유지 또는 차별받던 공상 계급)을 이용하여 조선인들을 일본군에 징병하였다. 이렇게 일본에 징집된 약 20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인 병사 보호를 위해 선봉에 서 총알받이로서 참전했다. 정예한 고니시와 가토의 군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전투 결과, 역시 중국은 중국이었다. 일본군은 요동을 초토화하고 조총까지 선보이며 공세를 퍼부었으나 명군의 홍이포 앞에서 조총은 큰 메리트가 없었다. 거기다 겨울 요동의 추운 날씨까지 겹치자 일본군은 도저히 요동성을 떨어트리지 못하고 1593년 3월에 압록강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명 측의 피해도 결코 만만하지가 않았다. 당장 일본군에 의해 요동지역의 민호가 크게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이요 명군의 전사자는 절대적인 수치로 따지면 일본군보다도 많았다. 이 때문에 명나라도 퇴각하는 일본군을 섣불리 뒤쫓지 못한 채 대강의 대전투는 끝났다.

북경의 저택에서 신하들과 함께 사실상 유폐 생활 중이던 선조는 요동성 전투의 결과를 듣고 만력제에게 명이 다시 조선으로 진격하여 사직을 찾아 달라고 상주하였으나 명 조정 내에선 일본과 조선을 내주는 선에서 화의를 맺자는 의견이 높아졌다.

당시 만주에서 여진족도 날뛰던 통에 명나라는 일본의 위협만이라도 제거해야 했고, 결국 1593년 5월 도요툐미의 화친 제안을 명나라가 받아들이며 북경의 조선 소조정은 배제한 채 일명 간 강화협상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조선을 일본의 것으로 인정한다면 중화 강역을 침범하지 않겠으며 태합이 일본국왕으로서 책봉받겠다고 제안해왔다.

명나라는 이에 조공책봉을 주장했으나 일본이 조공 책봉은 거부하면서 양국 간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명 조정 내에서의 빠른 강화론이 받아들여지면서 "조공은 없는 책봉"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사실상 일본의 모든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진 채로, 1594년 2월에 심유경이 직접 교토를 방문하며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에 책봉하는 조서를 낭독하고 평화 관계를 선언하며 전쟁은 끝났다.

1594년 ~ 1600년

조선의 땅은 각 다이묘들에게 분봉되었다.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즉 경성(게이조)을 포함하는 알짜배기 땅은 고니시 유키나가에 주어졌고, 충청도와 전라도, 제주도는 모리 가쓰노부, 평양을 포함하는 평안도는 가토 기요마사, 함경도는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주어지며 크게 4명의 다이묘의 영지로 나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 4인은 열도 본토에 자신들의 영지가 있었으므로 조선 땅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에 4명은 곧 본토로 돌아갔는데, 고니시는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 남부를 고토 스미하루에게, 대구를 포함한 경상도 북부를 마쓰라 시게노부에게, 강원도를 아리마 하루노부에게, 경기도 및 경성을 소 요시토시에게 나눠주고 돌아갔다. 당연히 가토, 모리, 구로다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조선에 대한 초반 통치는 그야말로 처절한 탄압이었다. 의병 제압을 명목으로 조선 전역에서 대토벌 작전을 벌였으며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조선인들의 세율을 60-70%까지 올린 등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그나마 고니시가 나눠주고 간 영지에서는 나름 정상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이곳에선 기술자를 우대하였고, 노비를 해방시킴은 물론 세율도 조선 사정에 맞도록 적용하였다.

이러는 와중 1598년, 본토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노리를 남기고 죽고 말았다. 이에 임진왜란에도 불참하며 암약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가에 반기를 들면서 도쿠가와의 동군과 도요토미가의 서군이 맞붙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댜.

이때 고니시와 구로다는 서군에, 가토와 모리는 동군에 가담하자 당연히 조선의 다이묘들도 각자 주군의 의중에 따라 상대를 공격하였고, 조선에서도 내전이 시작됐다. 이때 무단통치에 억눌려 있던 조선인들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하면서 각지에서 민란까지 벌어지자 서군 vs 동군 vs 의병이라는 희대의 혼파망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중앙집권적 질서와 토지권이 붕괴하였고 생활양식 자체가 변했다.

이후 본토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동군이 승리했고, 서군에 가담한 고니시는 처형, 구로다는 폐적을 당하자 자연히 조선에서도 서군 세력은 급격히 몰락했다. 대부분 서군 다이묘들은 할복하였고 병력은 와해, 동군은 경성과 부산, 대구 등을 장악했다. 의병들도 곧 중과부적으로 동군에 의해 무너지며 조선은 약 1년여간의 혼란 끝에 안정을 맞이했다.

에도 시대

▲ 18세기 중반(1760년대)경 에도 막부의 강역.













1603년 본토에서 에도 막부가 들어섰다. 에도 막부 성립을 전후로 조선에서의 통치는 상당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앞선 10년간 다이묘들의 독단에 의한 통치는 조선의 심각한 민심 이반과 파괴를 불러왔기에 도쿠가와는 먼저 조선에 있는 다이묘들의 가족을 인질로서 에도에 올려보내게 하여 막부에 복종하게 했으며, 막부가 정한 표준 법 등을 조선에도 적용케 하여 다이묘들의 무단통치는 종식되었다.

도쿠가와는 무단통치를 폐기하고 유화책을 펼쳐, 일본어의 점진적 보급 및 조선어 허용, 일선간 통혼의 자유화 등 동화정책을 실시하는 한편으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사농공상 체제 하에서 천대받던 공상(工商) 계급. 즉 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계층을 주로 포섭하였다. 특히 도공이 대표적이다.

에도 막부는 공상계층을 우대하여 이들을 사무라이와 동급으로 대우함으로서 조선 지배에 있어 이들의 지위를 높여주고자 했다. 심지어 일부는 다이묘의 최측근이 되기도 했던 등 이들은 일본 치하 조선에서 최소한 이전보다 높은 대우를 받자 급격히 친일 성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사대부들은 각자의 처신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 먼저 에도 막부는 10년간 다이묘들의 사대부 무조건적 탄압은 중단되었다. 막부는 조선에서 유학의 영향력을 알고 있었고 일본에 협조하는 경우에 한해서 그 지위를 사무라이와 동급으로 취급해주었고 조선 유학과 일본의 미약한 유학이 합쳐저 "일본식 유학"이 탄생했다. 이것은 중화사대주의와 타 학문 배척 등 조선 유학의 특유의 문제점을 배제한 채로 새로운 형태로 탄생했다.

다만 협조를 거부하는 양반층은 모조리 농민과 동급으로 강등시켜버렸으며 가옥 및 자산을 몰수해 사무라이나 신흥 지배층 공상계급에 배분했다. 이에 따라 평민(平民)으로 전락한 몰락 사대부들은 대가 지날수록 특권의식을 상실하고 농사를 지으며 평민사회에 동화되었다.

이런 에도 막부의 정책 아래서 조선의 통치는 1610년대만 되어도 눈에 띄게 안정되었다. 특히 경성과 부산, 평양 등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진입하고 조선인과 피를 섞는 등의 형태로 서서히 동화가 촉진되었다.

또한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을 철폐하여 신토와 불교를 진흥했다. 서원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신사와 사찰로 채워졌던 것이다.

한편, 1616년에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합하고 금나라(후금)을 선포해 명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먄 실제 역사와 다르게 임진왜란의 조기 종결로 국력을 보존한 명나라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이때 명은 일본의 에도 막부에 일본국왕 책봉을 받은 번국으로서 후금과의 전쟁에 군대를 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시종일관 핑계를 대며 참전을 거절했으며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이 패배하자 아예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명의 책봉을 스스로 던져버리며 명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1621년 요동은 함락되게 된다.

한편 이때 북경에 있던 이공(李公)[1] 이혼은 명일관계가 틀어지자 조선 수복의 적기로 보고 1620년 명 조정에서 황제를 설득했으나, 명은 일본과 불필요한 마찰을 빛고 싶지 않다며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사실상 마지막 조선 수복의 골든타임을 놓쳤다.[2]

그러나 후금 또한 요동 함락 이후엔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였고, 명과의 지리한 대치가 계속되다가 1636년에 명과 금은 전쟁을 중단하고, 명이 금의 형의 나라가 되는 것으로 요동을 넘기며 양측의 전쟁은 중단되었으며 만주에는 중국과 분리된 독립국으로 거듭났다. 명나라는 멸망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했다.

1672년에 일본에서는 남방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1672년 일본은 류큐를 복속하는 한편 대만에 개척사를 파견하게 된다. 이제 조선이 사실상 완전히 일본의 안방이 되면서, 에도 막부는 명과는 금나라를 통해 가로막혀 있는 판국에서 남방의 섬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막부가 파견한 개척사는 대북(다이호쿠)의 인근에 있는 대만 섬 북쪽에 상륙하였고 점차 개척지를 넓혀 1690년대에는 대만의 서부 지역 대부분에 일본인 거주지를 건설했다.

비록 대만 전역을 지배하에 넣지는 못했으나, 18세기에 가면 에도 막부의 대략적 판도는 혼슈 + 조선 + 대만 서부 + 홋카이도 남부 하코다테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18세기 초를 즈음하여 조선은 사실상 완전히 정체성이 일본으로 편입되었으며, 애초에 혼혈로 인해 순수한 조선 혈통은 남아나질 않게 됐다. 이런 상태로 에도 막부가 지솓되다가, 시대는 근대로 넘어오게 된다.

여담으로 1732년부터는 여송[3]에도 개척사를 파견했다. 대만이 안정화되자 일본은 대만 남쪽에 또다른 섬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여송이라 이름 붙여진 그곳을 탐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송은 대만과 달리 상당한 수의 원주민이 있었고 막부는 여송의 경우 사탕수수 재배를 위한 식민지로서 경영하기로 결정하고 개척사를 통해 여송일본부(呂宋日本府)라는 식민기관을 세워 여송 북부를 장악했으며 점차 그 면적을 확장시켰다.

근대화

이렇게 아시아의 판세는 명이 제1대국, 일본이 제2대국으로서 금나라를 사이에 완충지대로 두고 각축하는 체제가 17-18세기간 이어졌다.

명나라는 무려 500년을 이어가며 천조라고 불릴 만큼 그 상징성이 강력했다. 하지만 그 내부는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17세기의 부패하고 무능한 명나라 황실이 사실상 그대로 19세기까지 집권했다는 소리였다. 유교에 매몰된 명의 성리학자들은 실용을 알지 못했으며 단지 무식하게 공자의 가르침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19세기에 들어오자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유럽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다. 동아시아의 양대 강국이던 명나라와 일본 모두 각각 강남의 1개 공행 항구와 나가사키만을 개방하며 쇄국을 고수해오고 있었다.

당시 명나라의 상하이, 닝보 등을 위시한 강남 지역에 영국발 아편이 퍼지자 명 강명제(康明帝, 주성연, 가공인물)의 칙임을 받고 파견된 임칙서가 아편을 단속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대하여 영국이 강력하게 항의했으나 명은 아편 단속 방침을 바꾸지 않자 1840년 제1차 영명전쟁 혹은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했다.

아편전쟁은 1842년까지 지속됐으나, 명나라는 영국의 압도적인 기술력 앞에 굴복해 강남의 여러 항구를 개항하고 홍콩을 할양했다. 당연히 이러한 소식은 당시 에도 막부에도 들어갔으나 막부는 일단 쇄국 유지를 결정하고 문을 더욱 걸어잠그게 되었다.

그러나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에도 만으로 군함을 끌고와 통상을 요구한 쿠로후네 사건이 벌어지면서 일본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후 막부는 1854년에 쇄국을 포기하고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을 맺게 된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500년간 이어진 모순과 부패, 백성의 비참한 생활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였다. 장소성에서 기독교 신자 홍수전이 "창천이사 황천당립(蒼天已死 黃天當立)"[4]을 구호로 내세우며 기독교 신정국가를 추구하는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미 명의 천명이 다했다는 홍수전의 선동은 민중의 지지를 얻었고, 명은 초반 남경을 뺏기는 등 궤멸적 피해를 입었다.

한편 미국과 일본의 조약은 1858년에 미일수호통상조약으로 격상되었고 일본 내에서는 무력하게 서구에 이권을 내주는 막부에 대한 반발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명나라는 1860년 제2차 아편전쟁마저도 패배해 완전히 종이호랑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제 서구 국가들은 중국을 굴복시키고 아시아의 또다른 강자인 일본에게로 눈을 돌렸다.

1864년, 명나라는 서구의 지지를 받아 태평천국을 진압했으나, 더이상 일어서지 못할 만큼 큰 타격을 받았고 멸망의 길로 향하게 되었다. 지방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었으며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장군들은 북경에서 권세를 잡고 권신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정유현(鄭裕賢) 등. 이들 권신은 명나라의 부패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어갔다.

일본은 미국을 시작으로 하여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이탈리아 등 서양과 교역을 맺었다. 경직된 사회인 명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은 신문물을 접하자 개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갔고 토막운동이 활발해졌다. 1867년 막부가 천황애게 실권을 돌려준 대정봉환이 있었고 1868년 왕정복고의 대호령, 메이지 유신이 선포되었다.

비록 막부 세력의 잔당이 홋카이도로 도주하여 저항한 보신전쟁이 있었으나 1869년 제압되고, 1871년엔 번을 폐지한 뒤 폐번치현이 이뤄지고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한 등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아직 미개척된 대만괴 여송의 잔존 지역을 완전히 편입했다. 이 시점에서 일본은 명나라와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만주의 경우 1866년 러시아의 교역 요구를 거절하자 침공을 당해 연해주를 내준 굴욕적 조약을 맺었으며, 러시아에게 강제로 문호가 열렸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만주에서는 척화비를 세우고 서구와 어떠한 교역도 거부하기 시작하는 등 외세를 배척했고 개화가 늦어졌다.

근대

  1. 작중 명이 조선 멸망 후 망명해온 조선 왕가의 수장에게 준 지위
  2. 사실 1620년 시점에서도 이미 조선은 일본인화가 진행 단계였고 사대부의 격하와 공상계층의 부상으로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으나, 이후엔 더했다.
  3. 각주: 필리핀
  4. 2세기 황건적의 난을 모방한 구호이다.